계견승천 (鷄犬昇天 닭 계, 개 견, 오를 승, 하늘 천)
중국 한나라 때 회남왕 유안은 팔공이라고 불리는 신선에게 먹으면, 장생불사의 신선이 된다고 하는 선단의 제조법을 배워서 만들어 먹은 뒤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닭과 개도 이 선단을 먹자 모두 함께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집안 가운데서 한 사람이 권세를 누릴 수 있는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면 온 집안 친척들도 뒤따라 출세하거나 능력이 없어도 남의 권세에 빌붙어 승진하는 것을 가리켜 계견승천(鷄犬昇天)이라고 하게 되었다.
같은 의미로 집안의 한 사람이 출세하여 온 집안사람이 덕을 보는 것을 발택비승(拔宅飛升)이라고 하며, 권세에 아부하여 출세하는 사람을 회남계견(淮南鷄犬)이라고도 한다.
고좌우이언타 (顧左右而言他 돌아볼 고, 왼 좌, 오른 우, 말이을 이, 말씀 언, 다를 타)
맹자가 제나라의 선왕을 찾아가 물었다.
“왕의 신하가 그의 처자를 친구에게 맡기고 초나라에 놀러 갔다 돌아와 보니 그 친구가 처자를 굶주리고 추위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왕께서는 그 사람을 어떻게 조처하시겠습니까?”라고 하자,
“믿고 맡긴 처자를 굶주리게 한 그런 친구라면 당장 절교를 해야 합니다.”하고 했다.
그러자 맹자가 다시 “장관이 그 부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하자,
“당장 그만두게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맹자는 다시 왕에게 물었다.
“그러시다면 나라 안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하자, 선왕은 맹자의 질문에 상관없는 다른 일을 말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못들은 체하였다 王顧左右而言他.
맹자의 유도심문에 걸린 왕은 “그것은 과인의 잘못이오.”하고 시인하지 않고, 딴전을 피웠던 것이다.
이 처럼 참된 지도자라면 자기의 잘못을 시인 할 줄 알아야 한다.
고주일척 (孤注一擲 외로울 고, 물댈 주, 한 일, 던질 척)
북송 진종 때에 요나라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송나라를 공격해 왔다.
송나라는 이에 대항하여 힘껏 싸웠으나 계속해서 패배하였다.
요나라 군이 송나라의 수도를 향해 점점 다가오자, 진종은 대신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당시의 재상이던 구준이 “황제께서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면 승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방책을 내었다.
황제는 구준의 의견대로 직접 군사를 지휘했는데, 잇달은 패배로 사기가 땅에 떨어졌던 병사들은 용기백배하여 싸워 승리를 거두고 전연의 맹약을 맺어 장기간의 평화를 이끌어 냈다.
이 일로 인해 구준에 대한 황제의 신임은 특별하여, 구준은 태자태부가 되었다.
그런데 왕흠약이라는 간신이 틈만 나면 황제에게 구준을 헐뜯었다.
하루는 왕흠약과 진종이 신하와 왕 사이에 도박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왕흠약이 왕인 진종에게 “지금 폐하와 저는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계속해서 돈을 잃게 되면 가지고 있는 돈을 한판에 다 거는 모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고주(孤注)라고 합니다. 지난번 요나라와의 싸움에서 구준이 폐하께 직접 군사를 이끌고 진두지휘하시길 청한 일을 기억하시지요. 그것은 도박에서의 ‘고주일척’과 같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진종은 구준이 자신에게 도박의 고주일척을 시킨 것으로 비유한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잘못되었으면 자기의 목숨까지도 날아가는 도박을 하게 했다는 마음이 들어지자, 진노하며 구준을 재상에서 협주지부로 좌천시키고 말았다.
그 후에도 왕흠약의 참소로 또 다른 유배지인 뇌주에 갔다가 결국엔 병사하고 말았다.
그 후로 진종의 곁에서 계책과 충언을 하는 신하가 없어 미신적인 도교에 심취하여 국비를 낭비하여 국력이 쇠퇴하게 되었다.
임금에겐 충신이 필요하지만 나라엔 충성된 군주가 있어서 자신의 생명보다 나라를 위해야 국가가 부강해지는 것이다.
현대의 평범한 우리에게도 자신을 위하기보다 남을 위하는 이타심이 있어야 삶이 바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유래한 고주일척(孤注一擲)은 노름꾼이 계속하여 잃을 때 마지막으로 나머지 돈을 다 걸고 일거에 승부를 겨루는 일을 말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어떤 일에 모험을 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고침안면 (高枕安眠 높을 고, 베개 침, 편안할 안, 잘 면)
전국시대 소진과 장의는 종횡가(縱橫家)로서 유명한데, 소진은 합종(合縱), 장의는 연횡(連衡)을 주장했다.
합종이란 진(秦)나라 이외의 여섯 나라, 곧 한(韓)· 위(魏)· 조(趙)· 연(燕)· 제(齊)· 초(楚)가 동맹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진의 합종책을 뒤집어 진나라로 하여금 유리한 위치에 서게 한 사람이 바로 장의였다.
장의의 연횡이란 여섯 나라가 각각 진나라와 손잡는 것이지만 실은 진나라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장의는 본래 진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임을 받았다.
소진보다 악랄했던 장의는 진나라의 무력을 배경으로 이웃나라를 압박했다.
진나라 혜문왕 때에는 장의 자신이 진나라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침략했다.
그 후 위나라의 재상이 된 장의는 진나라를 위해 위나라 애왕(哀王)에게 합종을 탈퇴하고 연횡에 가담할 것을 권했으나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러자 진나라는 본보기로 한나라를 공격하고 8만에 이르는 군사를 죽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애왕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위의 애왕 뿐만 아니라 다른 제후들도 위협을 느껴 불안에 떨었다.
이 기회를 포착한 장의는 애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위나라는 영토도 좁고, 병사도 적습니다. 그런데 사방으로 초나라와 한나라 같은 강력한 제후들이 핍박하고 있습니다. 위나라는 열국의 통로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남은 초, 서는 한, 북은 조, 동은 제와 국경을 이웃해서 그 어떤 나라와 동맹을 맺어도 다른 나라의 원한을 삽니다. 또, 진이 위와 조의 길을 끊고 한나라를 설득해서 위를 공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진나라를 섬기는 것이 최상입니다. 만일 진나라를 섬기게 되면 초나라나 한나라가 감히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초나라와 한나라로부터의 재앙만 없다면 대왕께서는 베개를 높이 하고 몸을 뉘어 편안히 잘 수가 있을 것이고 나라에도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然以事秦 則楚韓不敢動 無楚韓之患 則大王高枕而臥安眠 國必無憂矣.”
여기에다 진의 목적이 초에 있으므로 진과 위가 함께 초를 공격하여 초를 나누어 갖자는 미끼까지 던져 꾀었다.
결국 위나라 애왕은 합종에서 빠져 나와 진나라와 우호동맹조약을 맺었다.
장의는 이 일을 시작으로 나머지 다섯 나라를 차례로 설득하여 마침내 주(周)나라 난왕(赧王) 4년에 연횡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이는 6국을 진에 헌상하려는 장의의 계책에 불과할 뿐이었다. 여기서 유래한 고침안면(高枕安眠)은 베개를 높이하고 편안히 잔다는 뜻으로, 근심 없이 잠을 잘 수 있을 만큼 안심할 수 있는 상태라는 말이다.
교취호탈 (巧取豪奪 교활할 교, 취할 취, 굳셀 호, 빼앗을 탈)
북송에 서가이자 화가로 유명한 미불이 있었다.
서(書)는 왕희지에게 배웠으며 산수화를 잘했다.
그에게는 미우인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만큼이나 서화(書畵)에 뛰어나 아버지에 비해 소미라 불렸다.
그는 옛 선배 화가들의 작품을 좋아하여 닥치는 대로 모았다.
어느 날 그가 배를 타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당나라 화가의 서첩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빌려 달라 해서 빌리고는, 서첩의 진품 그림과 똑같이 그림을 그린 후 모사품은 돌려주고 진품은 자기가 가졌는데, 며칠 후에 서첩의 주인이 찾아와 자기의 서첩을 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미우인은 그의 변별력에 놀라 어떻게 진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느냐고 묻자, 서첩의 주인이 “내 그림에는 소의 눈동자에 목동이 그려져 있는데, 당신이 내게 준 그림에는 없었습니다.” 라고 하니 미우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진품을 돌려줄 주었다.
이 처럼 교취호탈(巧取豪奪)은 ‘교묘한 수단으로 빼앗아 취한다는 뜻으로, 정당하지 않은 방법에 의해 남의 귀중한 물건을 가로채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계명구도 (鷄鳴狗盜 닭 계, 울 명, 개 구, 훔칠 도)
전국시대 중엽에 제나라의 왕족으로 설 땅의 영주가 된 맹상군은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손님 대접이 후하기로 소문이 났는데, 그는 무엇이든 한 가지 재주가 있으면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후대했으므로, 그의 저택에는 3,000명이나 되는 식객들이 들끓었다.
그는 그들의 재주를 기록해 두었다가 곤란한 경우를 당한 친지가 있으면 딱 들어맞는 사람을 보내어 도와주곤 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덕망과 명성은 천하에 알려졌고, 덩달아 제나라 역시 위상이 높아졌다.
진(秦)나라 소양왕은 그런 맹상군을 흠모하여 자기네 나라로 정중히 초청했다.
제나라의 왕과 맹상군 본인도 국제관계로 볼 때, 그의 초청에 응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좋을 것 같아 맹상군은 식객 중에 엄선한 십여 명만 데리고 진나라로 갔다.
진왕을 배알한 맹상군은 많은 예물을 바쳤는데, 그 중에서도 진왕을 홀딱 반하게 한 것은 여우 겨드랑이의 흰 털가죽 여러 장을 이어서 만든 호백구(狐白裘)라는 갖옷이었다.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명품을 얻어 대단히 흡족한 진왕은 겨울이 되면 사용하려고 그것을 보물 창고에 소중히 보관하도록 명했다.
그런 후에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맹상군을 융숭하게 대접하고, 그를 진나라의 재상으로 기용하려 했다.
깜짝 놀란 진나라 대신들이 “전하, 그는 제나라 왕의 일족입니다. 그런 사람을 이 나라 재상으로 등용하는 것은 불가할 뿐 아니라 마음을 놓을 수도 없습니다.”라고 아뢰자, 정신을 차린 진나라 왕이 “짐이 이미 그 말을 내비쳤으니 어쩐다?”하고, 자기의 입장이 곤란함을 말했다.
그러자 여러 명의 신하들이 나서서 “눈 딱 감고 목을 베십시오. 그래서 후환을 없애면 우리에겐 오히려 잘 된 일입니다.”라고 했다.
진왕은 양심상 차마 그런 가혹한 짓은 할 수 없어서 일단 맹상군을 영빈관에 머물게 했는데, 사실상 연금 상태나 다름없었다.
눈치 빠른 맹상군은 상황이 급변하여 자기한테 위험이 닥쳐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러던 중에 마침 평상시에 맹상군을 흠모하던 진왕의 아우가 찾아오자, 그를 붙들고 도움을 청했다.
맹상군의 청을 들은 진왕의 아우는 형인 왕이 끔찍이 사랑하는 연희를 찾아가서 맹상군 구명운동을 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연희가 “그야 어렵지 않죠. 대신 저한테도 호백구 한 벌을 바치라고 하세요.”라고 했다.
왕의 아우가 돌아와서 전하자 맹상군은 기가 막혔다.
이미 진왕한테 헌상해 버린 호백구를 당장 어디서 또 구한단 말인가! 일단 알았노라고 하고 왕의 아우를 돌려보낸 맹상군은 부하들과 상의했다.
그러자 도둑질 솜씨가 귀신같은 자가 나서며, 자기가 왕의 보물 창고에 잠입해 호백구를 훔쳐 내겠다고 했다.
평상시의 맹상군으로서는 할 수 없는 떳떳한 방법은 아니지만, 지금에는 어쩔 도리가 없으므로 맹상군은 허락하였다.
그 날 밤 맹상군의 식객 중에 좀 도둑의 달인이 개가죽을 뒤집어쓰고 대궐에 잠입하여 보물 창고에 접근했는데, 하는 짓이 워낙 개와 흡사한 데다 컴컴했기 때문에 창고지기는 자기가 기르는 개인 줄 알고 전혀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좀도둑은 창고지기가 잠들기를 기다려 살며시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 감쪽같이 호백구를 훔쳐내는 데 성공했다.
이튿날 맹상군은 진왕의 아우가 찾아오자 시치미를 떼고 호백구를 내주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왕의 아우는 그것을 가지고 연희를 찾아가 그녀에게 건네자, 매우 기뻐한 연희는 왕에게 간청했다.
“듣자니까 맹상군이 죽게 된다는 소문이 돌던데, 그런 출중한 인물을 해친다면 세상이 전하를 어떻게 볼 것이며, 천하의 어느 어진 선비가 이 나라를 찾아오겠습니까? 그 사람을 붙잡아 둔다 해도 소인배들의 참소가 끊이지 않아 골머리를 앓을 것이니, 하루빨리 자기 나라로 보내 버리는 게 상책일 것입니다.”
진왕도 과연 옳은 말이라 생각하고 날이 밝자 마자 맹상군을 풀어 주었다.
위기에서 놓인 맹상군은 진왕의 마음이 변하거나 호백구 절취 사건이 발각나기 전에 부지런히 마차를 몰았다.
그리하여 한밤중에 함곡관에 다다랐으나, 첫 닭이 울어야만 관문이 열리기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거기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짐승소리의 잘 내는 식객이 마을로 달려가서 ‘꼬끼오!’ 하고 닭소리를 냈다.
그러자 집집마다 닭들이 덩달아 목을 뽑아 울어댔다.
관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잠이 덜 깬 채 관문을 열었고, 맹상군 일행은 부리나케 빠져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얼마 후 진나라의 소양왕이 보낸 추격대가 도착했으나 허탕을 치고 말았다.
무사히 귀국한 맹상군은 탈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두 식객들에게 큰 상을 내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추켜세웠다.
“내가 목숨을 구한 것은 순전히 이들 계명(鷄鳴)과 구도(狗盜) 덕택이다.”
여기서 비롯된 계명구도(鷄鳴狗盜)라는 말은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과 개처럼 변장하여 좀도둑질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하찮은 재주를 가진 사람도 쓸모 있을 때가 있음을 말한다.
다른 뜻으로는 ‘고상한 학문은 없고 천박한 꾀를 써서 남을 속이는 사람’을 이르기도 하며, 계명구도지도(鷄鳴狗盜之徒)라고도 한다.
구밀복검 (口蜜腹劍 입 구, 꿀 밀, 배 복, 칼 검)
당나라 현종은 45년 치세의 초기에는 측천무후 이래 정치의 난맥을 바로잡고 안정된 사회를 이룩하여 칭송을 받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양귀비를 총애하여 주색에 빠져 들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이임보라는 간신이 있었는데, 그는 환관에게 뇌물을 바친 인연으로 왕비에게 들러붙어 현종의 환심을 사 출세하여 재상이 된 사람으로, 황제의 비위만을 맞추면서 절개가 곧은 신하의 충언이나 백성들의 간언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한번은 비리를 탄핵하는 어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명군이시오. 그러니 우리 신하들이 무슨 말을 아뢸 필요가 있겠소. 저 궁전 앞에 서 있는 말을 보시오. 어사도 저렇게 잠자코 있으시오. 만일 쓸데없는 말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소.”
이런 식으로 윽박질러 아예 신하들의 입을 봉하여서, 직언을 생각하고 있는 선비가 있더라도 황제에게 접근할 엄두조차 낼 수 없게 해 버렸다.
훗날 사가에서 평하기를 “이임보는 현명한 사람을 미워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질투하여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배척하고 억누르는, 성격이 음험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 李林甫 妬賢嫉能 性陰險 人以爲 口有蜜腹有劒.”라고 했다.
그가 야밤중에 그의 서제인 언월당에 들어앉아 장고를 했다하면, 다음날엔 예외 없이 누군가가 주살되었으며 자주 옥사를 일으켰으므로 황태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그를 두려워했다.
그가 재상의 지위에 있던 19년 동안에 천하의 많은 난리를 길러냈으나 현종은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안녹산도 이임보의 술수를 두려워하여 감히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다가, 그가 죽은 후 3년 뒤에야 난을 일으켰으며, 그리고 그의 후임으로 양귀비의 일족인 양국충이 재상이 되자마자 그의 죄목을 하나하나 들어 현종에게 고하자, 그제 서야 깨달은 현종은 크게 화를 내며 명령하여 그의 생전의 관직을 모두 박탈하고 패가망신과 함께 부관참시의 극형에 처했다.
여기서 비롯된 구밀복검(口蜜腹劍)이란 말은 ‘입에는 꿀을 바르고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는 말로, ‘겉으로는 꿀맛 같이 절친한 척하지만 내심으로는 음해할 생각을 하거나, 돌아서서 헐뜯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동가식서가숙 (東家食西家宿 동녘 동, 집 가, 먹을 식, 서녘 서, 집 가, 묵을 숙)
옛날 제(齊)나라에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다.
어느 날 그 처녀에게 두 집에서 청혼이 들어왔다.
그런데 동쪽집의 총각은 인물은 볼 것이 없으나 부잣집 아들이었고, 서쪽 집 총각은 인물은 뛰어나지만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 어려워진 처녀의 부모는 본인의 생각을 알아보자며 처녀에게 물었다.
“어느 쪽으로 정하기가 쉽지 않구나. 네 뜻은 어떠하냐? 만일 동쪽 집으로 시집가고 싶으면 오른손을 들고, 서쪽 집으로 시집가고 싶으면 왼손을 들어라.”
그러자 딸은 망설이지도 않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깜짝 놀란 부모가 그 이유를 묻자, 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밥은 동쪽 집에서 먹고 잠은 서쪽 집에서 자고 싶어요.”
동가식서가숙이란 말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조선 때의 ‘대동기문(大東奇聞)’이란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조정에서 개국공신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다.
그때 어떤 정승이 술이 얼근하게 취해서는 설중매라는 기생에게 추근대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동가식서가숙하는 기생이니 오늘 밤에는 이 늙은이의 수청을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러자 설중매는 “동가식서가숙하는 천한 기생이, 어제는 왕씨를 모시다가 오늘은 이씨를 모시는 정승 어른을 모신다면 궁합이 잘 맞겠습니다.”하였다.
이 말을 들은 공신들은 얼굴이 뻘개져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술자리는 흥을 잃고 파하였다 한다.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은 동쪽 집에서 먹고 서쪽 집에서 잔다는 뜻으로, 본래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말하던 것이었으나, 차츰 자기의 잇속을 차리기 위해 지조 없이 여기저기 빌붙어 사는 행태를 가리키게 되었다.
동병상련 (同病相憐 한 가지 동, 병들 병, 서로 상, 불쌍할 련)
춘추시대에 오나라의 태자 광은 오자서가 천거한 자객을 보내어 오왕 요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합려다.
오자서는 이때의 공으로 대부로 임명되었다.
오자서는 초나라 사람으로, 초나라 평왕의 태자부 태부인 오사의 아들인데, 태자부의 소부 비무기의 모함으로 아버지와 형인 상이 죽음을 당하자 복수할 뜻을 품고 오나라로 망명하였다.
그가 태자 광을 도운 것은 태자의 힘을 빌려 초나라에 복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왕 합려가 즉위한 해에 초나라로부터 또 한 사람의 망명객이 찾아왔다.
초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백주려가 비무기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하자, 그의 아들 백비가 오자서를 의지하여 오나라로 망명해온 것이다.
백비는 오자서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라 대부에 임명되었으며 오자서와 함께 정치를 하게 되었다.
후한의 조엽이 엮은 오월춘추의 합려내전(闔閭內傳)에 두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는 가사가 실려 있다.
같은 병에 서로 가엾게 여기며 근심을 같이하고 서로 구하네 同病相憐同憂相救.
놀라서 날아오르는 새 서로 따르며 날고 驚翔之鳥相隨相飛,
여울에 떨어진 물 서로 어울려 다시 함께 흐르네 瀨下之水因復俱流.
같은 대부인 피리가 오자서에게 백비를 평하여 응시호보(鷹視虎步), 즉 “눈길은 매와 같고 걸음걸이는 호랑이와 같아 그는 살인을 할 관상이니 결코 마음을 허락해서는 안 될 것이라.” 하였다.
오자서는 설마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하고 피리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후일에 월나라에 매수된 백비가 모함하여 오자서를 분사하게 하였다.
오늘날에도, 곤경에 처한 사람끼리 또는 적의를 품은 사람끼리 한자리나 같은 처지에 있게 되는 경우, 공동의 어려움이나 이득에 대해서는 서로 협력하다가도 일단 성공하게 되면 성과를 독점하고 상대방을 파멸시키는 비정한 호랑이와 같은 인간이 있음을 경계한 말이다.
여기서 유래 된 동병상련(同病相憐)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긴다는 뜻으로, 같은 병 또는 같은 처지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끼리 서로 고통을 헤아리고 동정하는 마음을 말한다.
하지만 성어의 이 내력을 알면 배신과 음모와 복수가 그 들의 마음 바닥에 깔려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즉, 동병상린이라 해서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은 자기를 해하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득기소(得其所) or 득기소재 (得其所哉 얻을 득, 그 기, 바 소, 어조사 재)
춘추시대 정나라에 자산이라는 재상이 있었다.
정나라가 강대국인 초나라와 진(晉)나라 사이에 끼여 있으면서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자산 같은 유능한 정치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산은 20여 년간 재상자리에 있으면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힘썼으며 외교 능력도 뛰어나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 의도를 번번이 좌절시키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자산에게 살아있는 물고기 한 마리를 선물로 보내왔다.
자산은 연못을 관리하는 하인에게 물고기를 건네주면서 그것을 연못에 놓아기르도록 했다.
그러나 하인은 자산의 분부를 어기고 그 물고기를 끓여먹고 와서는 이렇게 복명했다.
“물고기를 연못에 놓아주니까 처음에는 어릿거리고 비실비실하더니 조금 있다가 기운을 차리고는 꼬리를 치면서 연못 한가운데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하인의 그럴듯한 거짓말을 곧이들은 자산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제자리로 갔구먼, 제 자리로 갔어 得其所哉 得其所哉.”라고 말했다.
자산을 감쪽같이 속인 하인은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누가 자산을 지혜롭다고 말하는가. 그도 별 수 없더군. 내가 물고기를 잡아먹은 줄도 모르고 물고기가 ‘제자리로 갔구먼, 제자리로 갔어.’하고 좋아하니 말이야.”라고 했다.
여기서 유래한 득기소(得其所) or 득기소재(得其所哉)는 사람이나 사물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얻는다는 뜻의 말로서, 알맞거나 어울리는 자리를 얻는 것, 또는 능력이나 적성에 걸맞아서 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말한다.
후에 자산의 이 말을 딴 득기소(得其所)는 물고기가 물에서 놀아야 하듯이 능력과 적성에 맞는 자리,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앉혀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지만, 성어의 어원이 된 이야기 속의 인물인 하인 역시 속이는 자의 위치인 말단의 주인의 종의 위치에 있다는 방증도 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득롱망촉 (得隴望蜀 얻을 득, 땅이름 롱, 바랄 망, 나라이름 촉)
후한 광무제가 뤄양을 도읍으로 한을 재건했을 무렵의 일이다.
전한 말 중국은 장안을 점거한 적미적의 유분자를 비롯하여, 간쑤성 농서의 외효, 쓰촨 촉의 공손술, 허난 수양의 유영, 안후이 노강의 이헌, 산둥 임치의 장보 등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그 중 몇몇은 스스로 황제라 일컬을 정도로 세력이 컸다.
한을 재건한 광무제는 이들을 하나씩 모두 토벌하고 농서와 촉만 아직 복속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 중 세력이 약한 외효는 광무제와 공손술 간에 양다리 외교로 명맥을 유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외효가 죽자, 그 아들이 광무제에게 항복함으로써 마침내 농서도 후한의 손에 들어왔다.
이때 광무제가 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 득롱망촉이라는 말이 비롯되었다.
“두 성이 함락되거든 곧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촉나라 오랑캐를 쳐라. 사람은 만족할 줄 몰라 이미 농서를 평정했는데 다시 촉을 바라게 되는구나. 매양 군사를 출동시킬 때마다 그로 인해 머리가 희어진다 兩城若下 便可將兵南擊蜀虜 人固不知足 旣平隴復望蜀 每一發兵 頭髮爲白.”라고 하였다.
또한 촉을 차지한 유비가 오의 손권과 다투고 있는 틈을 노려 위의 조조(는 단숨에 한중을 점령하고 농을 손에 넣었다.
그러자 명장 사마의가 조조에게 말하였다.
“이 기회에 촉의 유비를 치면 쉽게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조조는 이렇게 말하면서 진격을 멈추었다.
“사람이란 만족을 모른다고 하지만, 이미 농을 얻었으니 촉까지는 바라지 않소 득롱망촉(得隴望蜀).”
그러나 실은 당시의 조조군으로 촉을 토벌하기에는 힘이 부쳤던 것이다.
이를 보면 조조의 말엔 항상 계산이 깔려있는 것을 보는데 이는 조조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모든 사람에겐 이런 욕심이 있는데, 다만 그 욕심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아는가 모르는가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득롱망촉(得隴望蜀)은 농서 지방을 얻고 나니 촉 지방이 탐난다는 말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가리키는 말인데, 하나를 이루면 그 다음이 욕심난다는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속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평롱망촉(平隴望蜀)이라고도 한다.
마고소양 (麻姑搔痒 삼 마, 시어미 고, 긁을 소, 가려울 양)
한(漢)나라 환제(桓帝) 때 마고라는 선녀가 무리들과 함께 수도인 장안에 들어와 채경이라는 관리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선녀인 마고의 손톱은 새의 발톱처럼 길고 뾰족하게 생겼는데, 마고를 영접한 채경은 마고의 손톱을 보면서 ‘만일 등이 가려울 때 저 손톱으로 긁으면 얼마나 시원하겠는가.’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채경의 이런 마음속에서 한 불경한 생각을 방평이라는 선녀가 읽게 되었다.
선녀 방평이 불경한 채경을 끌어다가 채찍질하고는 꾸짖었다.
“마고는 선녀다. 너는 어찌하여 불경스럽게 선녀의 손톱으로 등을 긁을 것이라 생각하였느냐.”
이로부터 마고라는 손톱이 긴 선녀가 가려운 곳을 긁어 준다는 ‘마고소양’이란 이 말이 확대되어, 오늘날엔 힘이나 능력을 가진 사람의 도움으로 자기의 원하는 바를 뜻대로 이룸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마고파양(麻姑爬痒)도 같은 말이다.
망매지갈 (望梅止渴 바랄 망, 매화나무 매, 그칠 지, 목마를 갈)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유비가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 하루는 조조가 유비를 불러 자리를 함께 하고는 손을 잡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조금 전 후원의 매실이 익은 것을 보고 장수를 정벌할 때의 기억이 나서 그대와 함께 담소하며 술이나 마시자고 불렀소.
그 때는 행군 도중 물이 떨어져 병사들의 고통이 아주 심했는데, 내게 문득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오.
그래서 말채찍으로 앞을 가리키며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소.
“저 앞에는 넓은 매실나무 숲이 있는데, 그 매실은 아주 시고도 달아 우리 목을 축이기에 충분할 것이다. 잠시만 참고 힘을 내자.”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매실의 신맛을 생각하고 입 안에 침이 돌아 갈증을 잊게 되었소.
그리고 오래지 않아 물 있는 곳을 찾아 다행히 갈증과 피로를 해소시켰다오.
조조는 망매지갈을 이룰 수 없는 것을 환상으로 대신한다는 뜻으로 사용하여 이로써 유비의 마음을 떠보려던 것이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육조 시대 송나라의 유의경이 지은 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진(晉)을 세운 사마 염(司馬炎)이 오(吳)나라를 공격할 때에 길을 잘못 들어 이리저리 헤매는 동안 병사들의 식수가 바닥이 났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물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병사들은 갈증이 심하여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고민을 하던 사마염은 문득 꾀를 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힘을 냅시다. 조금만 참고 가면 저 언덕 너머에 매화나무 숲이 있소. 그 곳에 가면 탐스러운 매실이 가지가 휠 정도로 매달려 있소. 그 매실이 우리 갈증을 없애 줄 것이오.”
매실이란 말을 들은 병사들은 갑자기 입안에 침이 고여 갈증을 잊었다.
그리하여 다시 진격하여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다.
이 경우는 거짓 사실로써 실제의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의미이다.
매림지갈(梅林止渴), 망매해갈(望梅解渴)도 같은 말이다.
이로부터 망매지갈(望梅止渴)은 매실을 바라보며 갈증을 해소한다는 뜻으로, 공상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는 말이 되었다.
면리장침 (綿裏藏針 솜 면, 속 리, 감출 장, 바늘 침)
중국 북송 때의 시인 소동파는 자신의 글씨가 ‘솜 안에 숨겨져 있는 쇠와 같다 綿裏鐵.’라고 표현했다.
면리철(綿裏鐵)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러우나 마음속은 꿋꿋하고 굳세다는 뜻에서 외유내강(外柔內剛)을 나타낸다.
그러나 면리철은 솜 안의 바늘이라는 면리침(綿裏針)으로 쓰이면서 의미가 달라져 웃음 속에 칼이 숨겨져 있다는 소리장도(笑裏藏刀)와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겉보기에는 미소를 띠고 부드러운 척하지만 속으로는 몰래 칼을 갈듯 사람을 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유래한 면리장침(綿裏藏針)은 솜뭉치 속에 바늘을 감출 만큼 겉으로 보기에는 약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듯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악한 마음을 숨기고 있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 또는 겉모습은 부드러우나 마음속에는 품은 생각이 있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모순 (矛盾 세모진창 모, 방패 순)
한비자의 난세편(難世篇)에 있는 고사로, 법지상주의자(法至上主義者)인 한비가 유가(儒家)의 덕치주의를 비판한 우화를 곁들인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 전국시대의 초나라에서 창과 방패를 파는 상인이 “이 창은 예리하기로 어떤 방패라도 꿰뚫을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방패의 견고함은 어떤 창이나 칼로도 꿰뚫지 못한다.”고 자랑하였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자네의 창으로써 자네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가?”하고 물었더니, 상인은 대답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처럼 유가에서 말하기를 ‘역산의 농장에서 농지의 경계 때문에 분쟁이 있어 성인인 순임금이 가서 몸소 일을 하였더니 1년에 분쟁이 사라지고, 황하지역에서 어장 문제로 분쟁이 있어 순임금이 가서 낚시질을 하였더니 이도 1년 만에 해결되었고, 동방의 이민족이 만드는 도기(陶器)가 조악(粗惡)하여 순임금이 가서 그릇을 만들었더니 이도 1년 만에 품질이 향상되었다. 이 모두가 순임금의 덕(德)에 의한 감화(感化)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순임금이 유덕한 성인이면 농부나 어부가 다투지 않을 것이요.
도기도 우량품으로 만들었다면 순임금이 덕을 베풀 여지가 있었겠는가?
또한 순임금이 덕을 베풀어 분쟁이 해결되고 도기의 품질이 향상되었다는 것은 요임금에게 실정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순임금을 성인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요임금의 치세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고, 요임금을 성인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순임금의 덕화(德化)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마치 ‘창과 방패의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순임금의 치세를 칭송하고 있는 유가의 설을 논란하였다.
전통적 논리학에서는 같은 주어에 대하여 서로 부정하는 판단을 내린 것을 연립시킨 명제의 성질이다.
현대 논리학에서는 하나의 명제와 이의 부정이 동시에 성립됨을 주장하는 명제이다.
여기서 부터 모순(矛盾)은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을 말하며, 논리학에서 두 개의 개념이나 명제(命題) 사이에 의미 내용이 서로 상반되는 관계를 말할 때 자주 쓰이는 단어와 예화가 되었다.
문외가설작라 (門外可說雀羅 문 문, 밖 외, 가할 가, 베풀 설, 참새 작, 그물 라)
전한의 무제 때 급암과 정당시라는 두 어진 신하가 있었다.
그들은 학문을 좋아하고 의협심이 강해 한때 9경(九卿)의 지위에까지 오른 적도 있지만, 지조가 강하고 직언하기를 좋아하여 매번 무제와 대신들을 무안하게 하였다.
다른 대신들이 그들을 책망하면 이렇게 말하였다.
“천자께서는 공경들과 같은 보필하는 신하를 두셨는데, 어찌 신하된 자로서 아첨하며 뜻대로 따르기만 하여 옳지 못한 곳으로 빠지게 하겠는가? 또 그러한 지위에 있으면 설령 자기 한 몸을 희생시키더라도 어찌 조정을 욕되게 하겠는가?”
이 때문에 좌천과 면직을 거듭하다가 벼슬을 마쳤지만, 이들은 각기 협객을 자칭하며 찾아오는 손님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이 없게 하고, 봉록 따위를 빈객과 잘 나누었다.
그래서 현직에 있을 때는 방문객이 들끓었다.
그러나 이들이 관직에서 물러나고 집안 형편이 나빠지자 방문객의 발길이 뚝 끊겼다.
이들의 열전을 쓴 사마 천은 그 말미에 다음과 같이 평을 달았는데, 여기서 문전작라(門前雀羅)라는 말이 비롯되었다.
급암과 정당시 정도의 현인이라도 세력이 있으면 빈객(賓客)이 열 배로 늘어나고, 세력을 잃으면 당장 모두 떨어져 나간다.
그러니 보통 사람의 경우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규의 적공은 정위가 되었을 때 빈객들이 문을 가득 메우다가 벼슬에서 물러나자 대문 밖에 참새를 잡는 그물을 쳐도 될 정도로 빈객의 발길이 끊겼다 門外可設雀羅.
그러다가 적공이 다시 정위 벼슬에 나아가자 빈객들이 모여들었다.
이에 적공은 다음과 같이 대문에 써 붙였다.
한번 죽고 한번 삶에 곧 사귐의 정을 알고 一死一生 卽知交情,
한번 가난하고 한번 부함에 곧 사귐의 태도를 알며 一貧一富 卽知交態,
한번 귀하고 한번 천함에 곧 사귐의 정이 나타나네 一貴一賤 卽見交情.
급암과 정당시 역시 이와 같으니 슬프도다.
여기서 유래한 문외가설작라(門外可說雀羅)는 문 밖에 새 그물을 칠 수 있다는 말로, 권세가 약해지면 방문객들이 끊어진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권력의 부침에 따라 변하는 인심을 나타내는 말로, 한국 속담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문 앞을 막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끊긴다.’는 말과 통한다.
문전작라(門前雀羅), 문전가설작라(門前可設雀羅)와 같은 말이고, 문전성시(門前成市)와 반대되는 말이다.
비견접종 (比肩接踵 견줄 비, 어깨 견, 닿을 접, 발꿈치 종)
안영의 언행을 기록한 안자춘추의 내편에 실려 있는,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재상을 지낸 안영이 초(楚)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일어난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제나라의 재상인 안영은 체구가 아주 작았다.
그가 초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초나라 왕이 왜소한 그를 골려줄 생각으로 성의 대문을 닫아 놓고 작은 문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안영은 “개의 나라에 들어갈 때에나 개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나는 지금 초나라에 사신으로 왔으니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초나라 왕은 이 말을 듣고 빨리 대문을 열게 하여 그를 맞아들였다.
초나라 왕은 안영을 접견하여 여전히 그를 깔보는 마음에 “제나라에는 사신으로 보낼 사람이 이리도 없소이까?”라고 물었다.
안영은 “임치(臨淄;제나라의 도읍)에는 300개의 마을이 있으며, 사람들이 입은 옷의 소매가 하늘을 가려 그늘을 이루며, 그들이 흘리는 땀이 마치 비가 내리는 것과 같으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이 서로 어깨가 닿고 발꿈치가 맞닿을 정도로 붐비거늘 어찌 사람이 없느냐고 물으십니까 臨淄三百閭, 張袂成陰, 揮汗成雨, 比肩繼踵而在, 何爲無人?”라고 하였다.
초나라 왕은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 왜 당신같이 조그만 사람을 사신으로 보낸 것인가?”라고 비꼬았다.
안영은 “우리 제나라에서는 어진 사람은 어진 왕에게 사신으로 보내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어질지 못한 왕에게 신하로 보냅니다. 저는 가장 어질지 못한 사람이라서 초나라에 사신으로 오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비견접종(比肩接踵)은 사람들이 아주 많아서 붐비는 모습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또 비견과 접종은 따로 사용되기도 한다.
비견(比肩)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능력이 비슷함을 비유하는 말로, 접종(接踵)은 발꿈치가 맞닿을 정도로 사람들이 잇달아 도착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비견계종(比肩繼踵) 또는 비견수종(比肩隨踵)이라고도 한다.
빙탄불상용 (氷炭不相容 얼음 빙, 숯 탄 , 아니 불, 서로 상, 얼굴 용)
한(漢)나라 무제의 신하 중에 동방삭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박학다식하므로 무제의 좋은 말상대가 되곤 했다.
동방삭의 글 중 ‘칠간전(七諫傳)’이 있는데, 이는 그가 초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인 '굴원'을 추모하여 지은 글이다.
이 시에는 굴원이 고향을 떠나 고민하는 모습이 담겨 있는데, 그 중에 “얼음과 불은 서로 나란히 할 수가 없다(氷炭不可以相竝兮, 빙탄불가이상병혜).”라는 문장이 나온다.
굴원은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멀리 고향을 떠나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를 모해하는 간신들과 충성심이 깊은 굴원은 마치 얼음과 숯처럼 화합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굴원은 결국 자살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은 ‘얼음과 숯은 함께 할 수 없다.’는 뜻으로, 충신과 간신은 함께 공존할 수 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상당연 (想當然 생각할 상, 마땅할 당, 그러할 연)
후한서(後漢書) 공융전(孔融傳)에 나오는 공융의 말에서 유래하였다.
후한 말기에 화북 지방의 2대 세력이던 원소와 조조는 하남성 관도전투에서 결전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원소의 군대가 조조에게 크게 패하자 조조는 화북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당시 조조의 군대가 기주에 쳐들어왔을 때 조조의 아들 조비는 원소의 집으로 갔는데, 원소의 아들인 원희의 부인 견씨에게 마음이 끌려 아내로 맞이하였다.
이 일에 대하여 공융은 조조에게 “주나라의 무왕은 은나라의 주왕을 토벌한 뒤 주왕의 비인 달기를 동생인 주공에게 아내로 주었다.”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달기가 실재 인물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지만, 주왕이 패하자 달기도 주왕과 함께 죽었다고 전해온다.
공융이 고의로 조조를 풍자하여 보낸 편지의 뜻을 알지 못한 조조는 “무왕이 주공에게 달기를 보내준 일은 처음 듣는데 어떤 책에 나오던가?”하고 공융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공융은 “지금 이 일로 보아 마땅히 그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以今之度 想當然.”라고 하여 조조를 비판하였다.
여기서 유래한 상당연(想當然)은 짐작하여 마땅히 그러하다고 여기는 것, 또는 마땅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상분 (嘗糞) or 상분지도 (嘗糞之徒 맛볼 상 , 똥 분, 어조사 지, 무리 도)
상분은 극진한 효성과 도가 지나친 아부라는 크게 다른 두 가지의 뜻이 있다.
먼저 ‘서언고사’에 나오는 지나친 아부에 관한 이야기다.
당나라에 위원충을 모시던 곽홍패가 있었는데 그의 벼슬은 시어사(侍御史)였다.
위원충이 와병 중이어서 동료들은 거의 문병을 갔는데, 그 자리에 곽홍패가 없는 것을 보고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곽홍패는 혼자 몰래 문병을 갔다.
곽홍패가 위원충에게 변을 보여 달라고 하여 그것을 주었다.
곽홍패는 아무 거리낌 없이 위원충의 변을 손으로 찍어 맛보고 나서 “변의 맛이 달지 않으니 곧 완쾌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곽홍패의 아부에 위원충은 조정에 가서 이 사실을 폭로하였다.
상관의 변을 맛볼 정도로 아부하는 곽홍패의 처신을 두고 이후로 지나친 아부를 말할 때 상분(嘗糞)이라고 하며, 그런 무리들을 상분지도(嘗糞之徒)라고 하였다.
사기(史記) 월세가(越世家)에 나오는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왕 구천은 오나라의 부차에게 패하였는데, 항복한 것처럼 위장하였다.
이후에 오나라에 끌려가 온갖 수모를 겪었을 때 그의 옆에는 충신 범려가 있어 늘 지극 정성으로 받들어 모셨다.
어느 날 부차가 구천을 죽이기 위해 그를 불렀다.
이때 부차는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런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범려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범려는 원래 점쟁이였기 때문에 부차의 쾌차 할 날짜를 예견할 수 있었다.
범려는 구천에게 부차의 쾌차 예정일을 알려 주었고, 또한 구천에게 부차 문병 시에 부차의 변을 맛보고 그의 쾌차 예정일을 이야기해 주라고 권하였다.
비록 붙잡혀 온 상태이지만 변을 맛보라는 것은 심한 모욕일 수밖에 없었으나 이것은 순간적인 치욕이라 생각하고, 범려의 의견에 따랐다.
범려의 시킨 대로 실행하자 구천이 말한 시일에 부차는 씻은 듯이 나았다.
이후로 부차는 고마움을 표시하는 뜻으로 구천을 풀어주었다.
구천은 돌아온 다음 부차에게 복수할 그 날만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면서 기다렸고, 결국 목적을 달성하였다.
여기서 상분(嘗糞) or 상분지도(嘗糞之徒)는 남의 이목은 아랑곳하지 않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대편의 변까지도 맛보아 아부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상분지도는 주로 인사 때 발생하며 자신의 실력이 부족할 때 더욱 그러한데, 상분지도도 문제지만 이를 간파하지 못한 사람도 또한 문제다.
극진한 효성에 관한 것으로 남사(南史)의 유검루전(庾黔婁傳)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남조(南朝)시대의 제(齊)나라에 유명한 효자 유검루가 있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받았지만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번번이 사양하기도 했다.
유검루가 진릉의 현령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괴질이 걸리자 관직을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의원이 아버지의 병세를 알기 위해서는 변을 직접 맛보아야 한다고 하자 유검루는 주저하지 않고 변을 맛보았다.
달고 매끄러운 것으로 보아 며칠 넘기지 못할 상태였다.
그래서 유검루는 하늘에 빌었지만 결국 그의 아버지는 죽어 버렸다.
제나라의 화제(和帝)는 그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높은 벼슬을 내렸지만 끝내 사양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아버지의 변을 손가락으로 직접 맛볼 정도로 효성이 극진한 것을 말할 때도 상분(嘗糞) or 상분지도(嘗糞之徒)라고 하게 되었다.
이처럼 상분(嘗糞) or 상분지도(嘗糞之徒)는 상황에 따라, 지나친 아부 또는 극진한 효도의 의미로 나뉘어 쓰인다.
상하기수 (上下其手 위 상, 아래 하, 그 기, 손 수)
좌씨전(左氏傳) 양공 26년 조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중국의 춘추시대에 초나라가 정나라를 쳐들어갔을 때 초나라의 장수 천봉술은 정나라의 장수 황힐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이 일로써 초나라 강왕의 동생인 공자 위는 전투에서 세운 그 공로를 차지하려고 강왕에게 정나라의 황힐을 포로로 잡았다고 하자, 천봉술은 자신이 잡은 포로라며 서로 다투게 되었다.
그래서 강왕이 재상 백주리에게 판결을 맡겼는데, 백주리는 포로인 정나라 장수 황힐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하였다.
포로를 데려온 백주리는 손을 위로 들고 공자를 가리키면서 “이 분은 임금의 동생인 공자 위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또 손을 아래로 향해 천봉술을 가리키며 “이 분은 초나라의 변방을 다스리는 현감 천봉술입니다.”라고 말한 뒤 황힐에게 두 사람 가운데 누구에게 포로로 잡혔는지 물었다.
백주리의 손짓에서 그 뜻을 알아차린 황힐은 공자 위에게 포로로 잡혔다고 말하여, 공자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였다.
여기서 유래한 상하기수(上下其手)는 ‘위와 아래로 손을 들어 신호한다.’는 뜻으로, 권력과 세력을 방편으로 하여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을 알고도 하는 수 없이 옳고 그름을 반대로 바뀌게 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상황에 따라 시비가 서로 뒤바뀌게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또는 사사로운 정에 끌려서 마지못해 서로 짜고 일을 다른 쪽으로 돌려서 공정하지 않게 처리하는 것을 비유한다.
토사구팽 (兎死狗烹 토끼 토, 죽을 사, 개 구, 삶을 팽)
사기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에 실려 있으며, 춘추시대 월(越)나라 재상 범려의 말에서 유래된다.
범려는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춘추오패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보좌한 명신(名臣)이다.
월나라가 패권을 차지한 뒤 구천은 가장 큰 공을 세운 범려와 문종을 각각 상장군과 승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범려는 구천에 대하여 고난을 함께할 수는 있지만 영화를 함께 누릴 수는 없는 인물이라 판단하여 월나라를 탈출하였다.
제(齊)나라에 은거한 범려는 문종을 염려하여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蜚鳥盡 良弓藏 狡兔死 走狗烹”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피신하도록 충고하였으나, 문종은 월나라를 떠나기를 주저하다가 구천에게 반역의 의심을 받은 끝에 자결하고 말았다.
이 고사는 사기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한신의 이야기다.
중국을 통일한 유방은 일등공신 한신을 초왕(楚王)으로 봉하였으나, 그의 세력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도전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러던 차에 유방과 패권을 다투었던 항우의 부하 종리매가 옛 친구인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일찍이 전투에서 종리매에게 괴로움을 당하였던 유방은 종리매가 초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한신은 옛 친구를 배반할 수 없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상소한 자가 있어 유방은 진평과 상의한 뒤 그의 책략에 따라 초나라의 운몽에 순행한다는 구실로 제후들을 초나라 서쪽 경계인 진(陳)나라에 모이게 하였다.
한신은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진해서 배알하려고 하였는데, 부하들이 종리매의 목을 베어 가지고 가면 황제가 기뻐할 것이라는 계책을 진언하였다.
한신이 종리매에게 이 일을 전하자 종리매는 “유방이 초(楚)를 침범하지 못하는 것은 자네 밑에 내가 있기 때문이네. 그런데 자네가 나를 죽여 유방에게 바친다면 자네도 얼마 안 가서 당할 것일세. 자네의 생각이 그 정도라니 내가 정말 잘못 보았네. 자네는 남의 장(長)이 될 그릇은 아니군 좋아, 내가 죽어주지.”하고는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하였다.
한신은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가서 유방에게 바쳤으나 유방은 한신을 포박하였으며, 모반의 진상을 조사한 뒤 혐의가 없자 초왕에서 회음후로 강등하였다.
이에 한신은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도다.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고,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며, 적국이 타파되면 모신도 망한다. 천하가 평정되고 나니 나도 마땅히 ‘팽’ 당하는구나 果若人言 狡兎死良狗烹 飛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라고 한탄하며 유방을 원망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토사구팽(兎死狗烹)은 토끼 사냥이 끝난 뒤 사냥개를 삶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할 때는 쓰다가 필요 없을 때는 야박하게 버리는 경우를 빗대어 이르는 고사성어다.
- 성야소하 패야소하 (成也蕭何 敗也蕭何 이룰 성, 어조사 야, 쓸쓸할 소, 어찌 하, 패할 패)
홍매가 편찬한 용제속필(容齊續筆)에 나오는 말이다.
한신은 회음(강소성) 사람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문과 무예를 게을리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을 단련시켜 기회를 노렸다.
초나라의 항우가 회음을 지나가자 한신은 그에게 가담하여 여러 번 계략을 제안하였으나 번번이 수용되지 않았다.
실망한 한신은 자신을 중용할 것이라고 믿어 유방에게 가담하였다.
그러나 항우와 큰 차이가 없음을 안 한신은 동료와 술로 고민을 달랜 와중에 모반을 도모하였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때 한신은 사형 집행관인 하후영에게 “한나라 왕은 천하를 원하지 않는구나. 나와 같은 장수를 죽이려고 하니.”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말을 들은 하후영은 한신이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유방에게 사형을 면해 주도록 주청하여, 사형을 면할 뿐만 아니라 치속도위(治粟都尉)가 되었다.
이때 승상 소하를 알게 되었고, 소하는 한신이 큰 인물임을 알고 그를 삼군을 통솔한 대장에 천거하였다.
그러나 유방이 내키지 않음을 알아차리자 한신은 부하들을 데리고 도망쳤다.
이를 알게 된 하후영과 소하는 한신을 뒤쫓아 가서 겨우 설득하여 다시 데리고 왔다.
소하는 유방에게 재차 한신을 대장에 임명할 것을 진언하였고, 유방도 이에 동의하였다.
대장에 임명된 한신은 유방의 천하 통일 사업에 빛나는 공적을 세웠지만, 이후 유방은 초나라 왕에 봉해진 한신이 권력에 야망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여 왕이 아닌 제후로 좌천시켰다.
이로써 유방과의 관계가 더욱 소원해진 것이다.
유방이 진희(陳稀)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한 직후 한신이 진희와 내통하고 있다고 어떤 이가 여후(呂后 유방의 황후)에게 거짓으로 알렸다.
여후는 소하와 대책을 논의한 끝에 한신을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여후는 한신을 불러들이려 하였으나 그가 응하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소하와 상의하였다.
소하는 한신이 반란을 평정한 공을 치하한다는 핑계를 대고 그를 속여 궁궐로 들어오게 하였다.
소하는 경호원에게 입궐하는 한신을 체포하여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신이 입궁하다 체포되자 여후는 그에게 모반죄를 씌워 죽였다.
이 고사가 실려있는 용재속필(容齋續筆)에는 “한신이 대장군이 된 것은 소하가 천거했기 때문이요. 이제 그가 죽음을 맞이한 것도 소하의 꾀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항간에 ‘성공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고, 실패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다.’라는 말이 떠돌게 되었다 信之爲大將軍 實蕭何所薦 今其死也 又出其謀 故俚語有成也蕭 何敗也蕭何之語.”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성야소하 패야소하(成也蕭何 敗也蕭何)는 한신(韓信)이 공을 세운 것도, 뒤에 죽임을 당한 것도 모두 소하(蕭何) 때문이라는 뜻으로, 성공도 실패도 모두 같은 사람의 소행이라는 말이다.
성역소하 패역소하(成亦蕭何 敗亦蕭何)라고도 한다.
성호사서 (城狐社鼠 성 성, 여우 호, 땅 귀신 사, 쥐 서)
이 말은 진서의 사곤전(謝鯤傳)에 실린, 진(晉)나라 때 왕돈과 사곤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산동 지방의 명문세가 출신인 왕돈은 동진의 원제 때 대장군이 되었다.
그의 조부인 왕람은 조정의 대신을 지냈고, 사촌형인 왕도는 승상 자리에 있었으며, 그의 아내는 서진 무제의 딸이었다.
그래서 그 무렵의 사람들은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차지하였다고 말하였다.
왕돈의 세력이 점점 커져서 양자강 상류 지역을 장악하기에 이르자, 원제는 유외와 대연을 진북장군에 임명하여 그를 견제하였다.
왕돈은 원제의 의중을 간파하고 반란을 일으킬 뜻을 품었다.
그는 군대를 일으킬 구실을 찾기 위하여 참모인 사곤을 불러 “유외는 아주 간악한 자여서 나라에 해를 끼치고 있다. 내 이 자를 황제 곁에서 제거하여 나라에 보답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사곤은 “유외는 화를 불러올 자이기는 하지만, 성곽에 사는 여우나 토지묘에 사는 쥐와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은 성곽 틈에 굴을 만들어 살고 있는 여우를 잡으려고 여우 굴을 뒤지려다 성곽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 염려되고, 토지묘에 사는 쥐를 불에 태워 죽이거나 물에 빠뜨려 죽이려다 묘당을 훼손시킬 것이 염려되므로 제거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황제를 성곽과 토지묘에 비유한 것이다.
하지만 왕곤은 이 말을 듣지 않고 나중에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서 유래한 성호사서(城狐社鼠)는 ‘성곽에 사는 여우와 토지묘에 사는 쥐’ 라는 뜻으로, 임금 곁에 있는 간신들이나 몸을 안전한 곳에 두고 나쁜 짓을 일삼는 무리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직호사서(稷狐社鼠)라고도 하는데, 사(社)는 토신(土神), 직(稷)은 곡신(穀神)을 가리키며, 여기서는 토신과 곡신을 모시는 묘당을 뜻한다.
암전상인 (暗箭傷人 어두울 암, 화살 전, 해칠 상, 사람 인)
춘추시대 정나라의 영고숙과 공손자도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암전중인이라는 말은 송나라 때 유염이 지은 이언(邇言)에 보이는데, 이 고사성어는 좌씨전에 실려 있는 영고숙과 공손자도의 이야기를 전고(典故)로 한다.
정나라의 제후 장공(莊公)은 허(許)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군대를 점검하였다.
그 때 늙은 장군 영고숙과 젊은 장군 공손자도가 서로 병거를 두고 다투었다.
영고숙이 끌채를 옆에 끼고 달려가자, 공손자도는 창을 빼들고 뒤쫓았으나 따라잡지 못하였으므로 분노하였다.
그 해 7월에 정나라는 허나라를 공격하였다.
정나라 군대가 허나라의 도읍에 쳐들어갔을 때, 영고숙은 깃발을 들고 제일 먼저 성벽을 기어 올라갔다.
이에 공손자도가 뒤에서 활을 쏘았고, 영고숙은 화살에 맞아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로 부터 암전상인(暗箭傷人)은 ‘몰래 활을 쏘아 사람을 해친다.’라는 뜻으로, 남몰래 흉계를 꾸며 남을 해치는 일을 비유하는 고사성어가 되었다.
암전중인(暗箭中人) 또는 냉전상인(冷箭傷人)이라고도 하며, 비슷한 의미의 고사성어로 ‘남을 해치려고 몰래 꾸민 흉계는 막기 어렵다.’라는 뜻의 암전난방(暗箭難防)이 있다.
야합 (野合 들 야. 합할 합)
이 말의 출전은 사기의 공자세가다.
공자를 추앙했던 사마천이 공자의 출생을 야합이라 했던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역사가인 사마천이 역사 기록에 충실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따른다면 공자는 사생아가 된다.
둘째는 당시의 풍속으로 볼 때 남녀 간에 나이 차이가 많기 때문에 혼례를 올리지 않고 동거를 했다는 뜻이 된다.
경위야 어떻든 야합은 합당치 못한 결합을 의미한다.
공자의 선조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공방숙(孔防叔)이라 했다.
방숙은 백하를 낳고 백하는 숙량흘을 낳았다.
숙량흘은 안씨의 딸과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이구산에서 기도를 한 후에 공자를 얻은 것이다.
공자는 노나라 양공 22년에 탄생하였다.
낳고 보니 아이의 머리 중앙이 쑥 들어간 반면 주위가 불쑥 솟아 있어 구(丘:언덕 구)라 이름 지었다.
자는 중니(仲尼)고 성은 공(孔)이다.
숙량흘은 공자가 태어난 얼마 후에 죽었고 방산에 매장되었다.
방산은 노나라 동쪽에 있는데 공자는 부친의 묘소를 알지 못했다.
모친이 야합한 것을 꺼려 공자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자는 어렸을 때부터 놀이를 할 때에는 항상 예기(禮器)를 진열하였다.
이러한 예절 바른 행위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것으로 보였다.
이른바 선천적이었던 셈이다.
공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오보의 구라는 곳에다 빈소를 차렸다.
부친의 묘소를 몰랐기 때문에 훗날 합장을 위한 근신의 행동으로 보인 것이다.
여기서 유래한 야합(野合)은 ‘들에서 합치다.’라는 뜻으로, 남녀 간의 합당치 못한 결합을 말하며, 이후로 정치나 단체 등에서 정당치 않은 연합을 일컬어 야합이라고 한다.
양두구육 (羊頭狗肉 양 양, 머리 두, 개 구, 고기 육)
항언록(恒言錄)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시대 제나라 영공에게는 독특한 취미가 있었다.
궁녀들에게 남장을 시켜놓고 그 모습을 즐기는 것이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백성들 사이에서도 남장을 하는 여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영공이 재상 안영에게 ‘남장 금지령’을 내리라고 명령했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영공이 안영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전하께서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을 허용하면서 궁 밖에 있는 여인들에게만 금지하는 것은 ‘밖에는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파는 것(縣羊頭賣狗肉)’과 마찬가지입니다.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을 허용하는 한, 궁 밖에서도 고쳐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영공이 즉시 궁궐 내에서 남장을 금지하자, 다음 날부터 백성들 사이에서도 남장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여기서 유래한 양두구육(羊頭狗肉)은 양의 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으로 懸羊頭賣狗肉(현양두매구육)의 준말로서 즉, 좋은 물건을 간판으로 내세우고 나쁜 물건을 팔거나, 겉으로는 그럴 듯한 대의명분을 내걸고 이면으로는 좋지 않은 본심이 내포되어 있는 것을 일컫는다.
염량세태 (炎凉世態 더울 염, 서늘할 량, 세상 세, 태도 태)
더웠다가 서늘하여지는 세태라는 뜻으로, 무상한 변화의 세상형편이나, 권세가 있으면 아첨하고, 몰락하면 냉대하는 세상의 인심을 이르는 한자성어다.
또는 인생이나 사물의 성하고 쇠함이 서로 바뀐다는 영고성쇠(榮枯盛衰)와 같이 무상한 세태를 말하기도 한다.
우리 속담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다.
오유선생 (烏有先生 어찌 오, 있을 유, 먼저 선, 날 생)
까마귀는 온통 검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다들 ‘왜 그럴까?’를 연발했다.
결국 글자도 鳥(새 조)에서 점(' 은 눈을 뜻함)이 하나 빠진「烏」자로 만들었다.
곧 烏의 본디 뜻은 까마귀지만(烏飛梨落,烏合之卒,長頸烏喙 등), 검다는 뜻도 있으며(烏骨鷄),왜, 어찌 라는 강한 의문의 뜻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오유(烏有)는 ‘어찌 있을 수 있으랴?’가 되며, 오유선생(烏有先生)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사마상여는 한무제 때 살았던 희대의 풍류 문인이다.
그가 무제에게 바친 상림부는 사냥에 빠진 무제를 은근히 풍간(諷諫)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초나라의 사신으로 제나라에 간 자허가 제왕과 사냥하면서 서로 자국의 사냥터가 더 크고 호화롭다고 과장하자, 오유선생이 자허를 꾸짖고,또 이를 지켜본 무시공이라는 자가 나서서 양비론을 편다는 내용이다.
백성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고 사냥에만 빠져있는 두 나라의 국왕이 옳지 않다는 뜻에서다.
재미있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다.
자허(子虛)나 오유선생(烏有先生),그리고 무시공(無是公)은 모두 ‘이런 사람은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래한 오유선생(烏有先生)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람을 말한다.
요즘 세상엔 있을 수 없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그럴듯한 지위와 체면에도 불구하고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행위를 일삼는 자가 많다.
모두 현대판 오유선생(烏有先生) 들이다.
자허오유 (子虛烏有 아들 자, 빌 허, 까마귀 오, 있을 유)
사기의 사마상여열전에 실려 있는 한(漢)나라 때 사마상여가 지은 자허부에서 유래되었다.
한나라 무제는 사냥을 무척 즐겼다.
어느 날 무제는 사냥을 내용으로 하는 자허부를 읽고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칭찬하면서 작가와 동시대에 살지 못하여 만나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때 구감(狗監:황제의 사냥개를 관리하는 직책) 양득의가 그 말을 듣고는 작가가 자신의 동향 사람이라고 아뢰었다.
무제는 사마상여를 만나 자허부를 칭찬하자, 사마상여는 “이 부(賦)는 제후들의 사냥을 다룬 것으로 폐하께서 볼 만한 것은 못 되옵니다. 청컨대 천자께서 사냥하는 부를 짓도록 해 주옵소서.”라고 말하였다.
무제가 기뻐하며 허락하여 자허부의 속편격인 상림부(上林賦)가 지어졌다.
자허부는 자허(子虛)와 오유선생(烏有先生), 무시공(無是公) 세 사람의 대화가 주 내용을 이룬다.
초(楚)나라의 자허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제나라 왕이 성대한 사냥 행사를 베풀었다.
나중에 자허는 제나라의 오유선생과 사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허는 초나라 왕의 성대한 사냥 행사를 언급하여 제나라 왕을 깎아내렸다.
그러자 오유선생은 제나라 왕을 옹호하기 위하여 자허에게 여러 가지를 물으면서 초나라 왕이 방탕하고 사치스럽다고 비평하였다.
두 사람의 말다툼을 듣고 있던 무시공은 주(周)나라 천자의 사냥 행사는 그 성대함이 초나라와 제나라를 압도하였다고 말하였다.
끝에 가서는 사치와 방탕함을 반대하고 절제와 검소함을 내세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자허부에 등장하는 자허와 오유선생, 무시공은 모두 허구의 인물이고, 언급되는 일들도 모두 가공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유래한 자허오유(子虛烏有)는 ‘자허와 오유’라는 뜻으로,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 또는 그러한 일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전거후공 (前倨後恭 앞 전, 오만할 거, 뒤 후, 공손할 공)
사기의 소진열전(蘇秦列傳)편의 이야기다.
소진은 뤄양 사람으로 동쪽의 제(齊)나라에 가서 스승을 찾아 귀곡자에게 학문을 배웠다.
유학하는 수 년 동안 많은 곤궁을 겪고 돌아왔다.
이때 형제, 형수, 누이, 아내, 첩조차 모두 그를 은근히 비웃으며 말했다.
“주(周)나라의 풍속은 농업을 주로 하고, 상공업에 진력하여 2할의 이익을 올리기에 힘쓴다. 그런데 당신은 본업을 버리고 혀를 놀리는 일에만 몰두했으니 곤궁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소진이 이 말을 듣고 부끄럽고 한심스런 생각이 들어 방문을 닫고 틀어박혔다.
그러던 중 주서(周書)의 음부(陰符)를 손에 넣어 탐독하였다.
1년이 지나니 남의 마음속을 알아내는 술법을 생각해내었다.
그리고 “이제는 오늘의 군주를 설득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한 후에 먼저 연(燕)나라와 조(趙)나라로 가서 제(齊), 초(楚), 위(魏), 한(韓)의 여섯 나라가 연합하여 진에 대항하는 ‘합종책(合從策)’을 건의했다.
그래서 결국엔 여섯 나라는 합종의 맹약을 하고 힘을 합치게 되었다.
소진은 합종의 맹약의 장이 되어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했다.
북쪽의 조왕에게 경위를 보고하기 위하여 가는 도중 낙양을 통과했다.
소진을 따르는 일행의 행렬이 임금에 비길 만하게 성대했다.
주나라의 현왕은 이 소식을 듣고 도로를 청소하고 사자를 교외에까지 보내 위로하게 했다.
소진의 형제, 처, 형수는 곁눈으로 볼 뿐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소진이 웃으며 형수에게 말했다.
“전에는 그렇게 거만하더니 지금은 이렇게도 공손하니 웬일입니까?”
형수는 넙죽 엎드려서 얼굴을 땅에 대고 사과하며 말했다.
“계자의 지위가 높고 재산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소진은 탄식하며 “나는 한 사람의 동일한 몸인데 부귀하면 일가친척도 두려워하며 공경하고, 빈천하면 가볍게 보고 업신여기니 하물며 세상 사람들이야 더할 것이 없겠구나. 또 만약 내가 낙양성 부근의 비옥한 옥토 2백 묘만 가졌더라도 어찌 여섯 나라 재상의 인수(印綏)를 찾았겠는가?”라고 말한 후에 일족과 벗들에게 1천금을 나누어 주었다.
여기서 유래한 전거후공(前倨後恭)은 ‘전에는 거만했는데 나중에는 공손하다.’는 뜻으로, 상대의 입지에 따라 태도가 일변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조삼모사 (朝三暮四 아침 조, 석 삼, 저물 모, 넉 사)
춘추전국시대에 송나라의 저공이란 사람이 원숭이를 많이 기르고 있었는데 먹이가 부족하게 되자 저공은 원숭이들에게 말하기를 “앞으로 너희들에게 주는 도토리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로 제한 하겠다.”고 말하자, 원숭이들은 화를 내며 아침에 3개를 먹고는 배가 고파 못 견딘다고 하였다.
그러자 저공은 “그렇다면 아침에 4개를 주고 저녁에 3개를 주겠다.”고 하자, 그들은 좋아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는 열자의 황제편(黄帝篇)에 나오는 이야기로, 원숭이들은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받거나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받거나 총 7개를 받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데도 4개를 먼저 받는다는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어 상대에게 설복당하고, 저공은 같은 개수를 주고도 원숭이들의 불만을 무마할 수 있었다.
여기서 유래한 조삼모사(朝三暮四)는 눈앞에 보이는 차이만 알고 결과가 같은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비유하거나, 남을 농락하여 자기의 사기나 협잡술 속에 빠뜨리는 행위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지록위마 (指鹿爲馬 가리킬 지, 사슴 록, 할 위, 말 마)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전한다.
진나라 시황제가 죽자, 환관 조고는 거짓 조서를 꾸며 태자 부소를 죽이고 어린 호해로 2세 황제를 삼았다.
호해는 “천하의 모든 쾌락을 마음껏 즐기며 살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조고는 이 호해를 이용하여 경쟁 관계에 있던 승상 이사를 비롯한 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승상의 자리에 올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자 역심이 생긴 조고가 모반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따라주지 않을 것이 두려웠다.
이들을 시험하여 가려내기 위해, 사슴을 2세 황제에게 바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폐하, 말[馬]을 바치오니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러자 2세 황제가 웃으며 말하였다.
“승상은 농담도 잘 하시오. 사슴을 가지고 말이라고 하다니 趙高欲爲亂 恐群臣不聽 乃先設驗 持鹿獻於二世曰馬也 二世笑曰 丞相誤邪 謂鹿爲馬?”
호해가 이 말을 마치고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자, 잠자코 있는 사람보다 “그렇다.”고 긍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아니다.”고 부정하는 사람들도 몇몇이 있었다.
조고는 부정하는 사람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였다.
그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나 천하는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각처에서 진나라 타도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중 항우와 유방의 군사가 도읍 함양을 향해 진격해 오자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을 세워 3세 황제로 삼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고 자신이 자영에게 주살 당하고 말았다.
이후로 지록위마(指鹿爲馬)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농락하여 자기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는 말로 쓰였는데, 요즘에는 뜻이 확대되어 모순된 것을 끝까지 우겨 남을 속인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지치득거 (舐痔得車 핥을 지, 똥구멍 치, 얻을 득, 수레 거)
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에 나오는 우화이다.
송나라 사람 중에 조상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가 송나라의 임금을 위하여 진(秦)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그가 진나라로 떠날 때에는 고작 몇 대의 수레가 주어졌지만, 진나라의 임금이 그를 매우 반기며 수레 100대를 더 붙여 주었다.
그가 송나라로 돌아와 장자를 만나 말하기를, “대저 비좁고 누추한 빈민굴에 살면서 구차하게 신이나 삼고, 비쩍 마른 목덜미를 하고 두통 때문에 얼굴빛마저 누런 것은 내가 부족한 탓이었네. 그보다는 만승(萬乘)의 임금을 깨우쳐 100대의 수레를 얻는 것이 나의 장기였네.”하였다.
장자가 대답하기를, “진나라의 임금이 병이 나서 의사를 불렀을 때, 종기를 째고 고름을 빠는 자에게는 수레 한 대를 주었고, 치질을 핥아서 고치는 자에게는 수레 다섯 대를 주었다네. 따라서 치료하는 곳이 더러울수록 받는 수레의 숫자가 많았다네.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그 치질을 빨았기에 그리 많은 수레를 얻었는가? 더럽네. 빨리 돌아가게나.”하였다.
장자는 이 문답을 통해 윗사람에게 아첨하여 이익을 얻는 자의 비열함을 통박하고 있다.
여기서 유래한 지치득거(舐痔得車)는 ‘똥구멍을 핥아 수레를 얻는다.’는 뜻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차호위호 (借虎威狐 빌릴 차, 호랑이 호, 위엄 위, 狐여우 호)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 선왕편(宣王篇)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강을이라는 위(魏)나라의 선비가 초나라의 선왕에게 등용되었다.
그러나 삼려(三閭)로 불리는 소(昭), 경(景), 굴(屈)의 세 씨족이 초나라를 장악하고 있어서, 이들을 뒤흔들어 놓기 전에는 자기의 이상을 실현할 방법이 없었다.
이 중에 소씨의 두령인 소해휼이 초나라의 군사와 정치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을은 그를 초점으로 하였다.
어느 날 선왕이 여러 신하에게 물었다.
“북쪽에서는 소해휼을 두려워한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신하들은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강을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호랑이는 모든 짐승을 구하여 먹습니다. 어느 날 호랑이가 여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우가 말하기를, ‘당신은 나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천제(天帝)께서 나를 모든 짐승의 어른으로 삼으셨습니다. 지금 당신이 나를 먹으면, 천제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면, 내가 앞장서서 걸어 갈테니 당신은 내 뒤를 따라 오십시오. 그러면서 나를 보고 도망치지 않는 짐승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십시오.’ 호랑이는 여우와 함께 나갔습니다. 짐승들은 여우와 호랑이를 보자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짐승들이 자기를 두려워하여 도망치는 것이라고는 깨닫지 못하고, 여우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임금님의 땅은 사방이 5천리이고, 군대가 백만이나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로지 소해휼 한 사람에게만 맡기고 계십니다. 따라서 북쪽 사람들이 소해휼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은 임금님의 군대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짐승들이 호랑이가 두려워 도망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래한 차호위호(借虎威狐)는 ‘호랑이의 위엄을 빈 여우’라는 뜻으로, 남의 권세에 의지하여 위세를 부림을 이르는 말이다.
- 호가호위 (狐假虎威 여우 호, 빌리다 가, 범 호, 위엄 위)
전한(前漢) 시대의 유향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BC 4세기 초, 초나라 선왕 때의 일이다. 하루는 선왕이 신하들에게 “듣자하니, 위나라를 비롯하여 북방의 여러 나라들이 우리 재상 소해휼을 두려워하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오?”하고 물었다.
이때 위나라 출신인 강을이란 변사가 초나라 선왕 밑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왕족이자 명재상으로 명망 높은 소해휼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강을은 이야말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얼른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북방의 여러 나라들이 어찌 한 나라의 재상에 불과한 소해휼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호랑이가 여우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교활한 여우가 호랑이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명을 받고 내려온 사자(使者)다. 네가 나를 잡아먹으면 나를 백수의 왕으로 정하신 천제의 명을 어기는 것이니 천벌을 받게 될 거다. 만약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내가 앞장설 테니 내 뒤를 따라와 봐라. 나를 보고 달아나지 않는 짐승은 하나도 없을 테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여우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여우의 말대로 만나는 짐승마다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습니다. 사실 짐승들을 달아나게 한 것은 여우 뒤에 따라오고 있던 호랑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호랑이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북방의 여러 나라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일개 재상에 불과한 소해휼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초나라의 병력, 곧 임금님의 강한 군사력입니다.”
여기서 유래한 호가호위(狐假虎威)는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리다.’는 뜻으로, 남의 권세를 빌려 허세를 부림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서, 오늘날 이 말은 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권위를 빌려 허세를 부리는 경우에 사용된다.
가호위(假虎威), 가호위호(假虎威狐)라고도 한다.
청군입옹 (請君入甕 청할 청, 임금 군, 들 입, 독 옹)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편과 신당서(新唐書)의 혹리열전에 실려 있다.
당나라 때의 내준신과 주흥이라는 혹독한 관리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측천무후는 주나라를 열고 스스로 황제가 됨으로써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자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여성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측천무후는 혹리(酷吏)를 이용하여 반발하는 세력을 탄압하였다.
내준신과 주흥은 혹리들 가운데서도 가장 악명을 떨친 대신들이다.
내준신은 각종 고문 도구를 만들었으며, 그에게 붙잡혀 심문을 당하면 살아서 옥문을 나오기 어려웠다.
주흥 또한 그에 못지않게 잔혹한 인물이었다.
어느 날 측천무후는 주흥이 반란을 꾀한다는 밀고를 접하고 내준신에게 그를 조사해 보라고 명하였다.
내준신은 주흥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는데, 그 명령을 접한 때 마침 자기 집에서 주흥과 점심을 함께 먹고 있었다.
내준신은 짐짓 주흥에게 “어떤 죄인이 있는데 태도가 매우 완강하여 모반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흥은 “그 자를 큰 항아리 안에 집어넣고 사방에서 불을 때면 인정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걸세”라고 가르쳐 주었다.
내준신은 사람을 시켜 주흥이 일러 준 대로 항아리를 설치해 놓고서는 “어떤 사람이 그대가 모반을 꾀한다고 고발하여 나에게 조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네. 청컨대 그대가 이 항아리 안으로 들어가시게 請兄入此瓮.”라고 하였다.
이에 주흥은 두려움에 떨며 죄를 자백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청군입옹(請君入甕)은 ‘그대가 항아리 안으로 들어가시오.’라는 뜻으로, 자기가 놓은 덫에 자기가 걸려든 주흥의 경우처럼, 자기가 정한 규칙 따위에 자신이 해를 입게 되는 경우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또 내준신이 한 것처럼 미리 올가미를 쳐 놓고 상대를 유인하여 꼼짝 못 하게 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포장화심 (包藏禍心 쌀 포, 감출 장, 재앙 화, 마음 심)
좌씨전의 소공 원년 조에 실려 있다.
춘추시대에 소국인 정(鄭)나라는 대국인 초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나라의 대부 공손단은 자기 딸을 초나라의 공자 위(圍)와 혼인시키려 하였다.
초나라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정나라의 수도로 손쉽게 진입하여 정복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자 위는 무장한 대부대를 이끌고 정나라로 향하였다.
정나라의 재상인 자산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자우를 보내 그들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지 말도록 하였다.
자우는 공자 위에게 도읍이 협소하여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없으니 성 밖에서 혼례를 치르도록 하자고 말하였다.
그러자 초나라 측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으며 초나라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하면서 성 안에서 혼례를 치를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자우는 “나라가 작은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대국에만 의지하면서 조금도 방비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혼인의 인연을 맺은 뒤에 대국의 힘에 의지하여 안정을 구하려 한 것인데, 그대들은 나쁜 심보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小國無罪 恃實其罪 將恃大國之安靖己 而無乃包藏禍心以圖之?”라고 말하였다.
초나라 측에서는 자신들이 속셈이 드러났음을 알고 계획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무기를 휴대하지 않고 성 안에 들어가 신부를 맞이하겠다고 하자, 정나라는 그제서야 허락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포장화심(包藏禍心)은 ‘나쁜 마음을 감추고 있다.’라는 뜻으로, 남을 해칠 나쁜 심보를 품고 있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구밀복검(口蜜腹劍:말은 달콤하지만 뱃속에 칼이 있음)이나, 소리장도(笑裏藏刀:웃음 속에 칼을 감추고 있음)와 비슷한 의미다.
함사사영 (含沙射影 머금을 함, 沙:모래 사, 쏠 사, 그림자 영)
‘역’이라는 전설상의 동물의 고사에서 유래되었으며, '역'은 단호(短狐 또는 短弧)· 사공(射工)· 사영(射影)· 축영충(祝影蟲)· 구창(拘槍)· 수호(水狐)· 수노(水弩)라고도 한다.
전설상의 동물로 모습은 자라처럼 생겼고 발이 세 개이며, 날개가 있어 날 수도 있다.
진(晉)나라 때 간보가 지은 수신기(搜神記)에 따르면, ‘역’은 강물에 살며, 입에 모래를 머금고 있다가 사람에게 내뿜을 수 있다 能含沙射人.
사람이 그 모래에 맞으면 몸의 근육이 당기고 두통과 함께 열이 나는데, 심하면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사람들이 ‘역’을 잡아 살펴보니, 몸속에서 모래와 돌이 나왔다고 한다.
역시 진나라 때 갈홍이 지은 포박자(抱朴子)에 따르면, ‘역’의 입 안에는 활처럼 생긴 것이 가로로 걸쳐 있다. 사람 소리를 들으면 입 안에 머금고 있는 것을 숨기운에 담아 화살처럼 쏘는데, 몸에 맞은 사람은 즉시 부스럼이 나고, 그림자에 맞더라도 병이 나지만 즉시 부스럼이 나지는 않는다 如聞人聲 緣口中物如角弩 以氣爲矢 則因水而射人 中人身者卽發瘡 中影者亦病而不卽發瘡. 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함사사영(含沙射影)은 ‘모래를 머금어 그림자를 쏜다.’라는 뜻으로, 몰래 남을 공격하거나 비방하여 해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협견첨소 (脅肩諂笑 갈빗대 협, 어깨 견, 아첨할 첨, 웃을 소)
맹자(孟子) 등문공하(滕文文公下)편에 나온다.
공손추가 맹자에게 제후와 만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묻자, 맹자는 옛 사람들은 신하가 되지 않으면 가서 만나지 않았다는 예를 들어가면서 자신이 왜 제후를 만나지 않는지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증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깨를 들어 올리고 아첨하며 웃는 것은 여름에 밭일을 하는 것보다도 괴롭다.’라고 하였고, 자로는 ‘생각이 다르면서도 더불어 말하는 사람의 얼굴빛을 보면 붉게 상기되어 있으니 이러한 것은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보면 군자가 닦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曾子曰 脅肩諂笑 病于夏畦 子路曰 未同而言 觀其色 赧赧然 非由之所知也 由是觀之 卽君子之所養 可知已矣.”
사람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고개를 숙이게 되면 어깨가 올라가게 되는데, 그것도 모자라 아첨까지 하면서 웃는 낯을 한다는 것은, 군자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소인배의 짓이라고 훈계한 것이다.
여기서 유래한 협견첨소(脅肩諂笑)는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어깨를 들어 올리고 아첨하며 웃는다는 뜻으로, 아첨하거나 아부하는 사람들의 추함을 비유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교묘한 말과 꾸민 얼굴빛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어진 사람이 드물다 巧言令色鮮矣仁.”는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의 구절과도 통한다.
또한 어깨를 간들거리고 웃으며 아양을 떤다는 협견첨소(脅肩諂笑)도 같은 뜻이다.
우리말에 ‘불알을 긁어준다.’는 속담도 같은 뜻이다.
호랑지국 (虎狼之國 호랑이 호, 이리 랑, 어조사 지, 나라 국)
이 고사는 사기(史記)의 굴원열전에 실려 있다.
전국시대에 진나라를 비롯하여 제(齊)· 초(楚)· 연(燕)· 위(魏)· 한(韓)· 조(趙)의 7개국이 패권을 놓고 대립하였다.
진나라는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나라로서 나머지 6개국을 위협하였다.
초(楚)나라는 여러 차례 진나라에 기만당하였으며,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굴원은 초나라 회왕에게 제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간언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나라 소왕은 거짓으로 초나라와 통혼을 청하며 회왕에게 만나자고 제의하였다.
회왕이 이를 곧이듣고 진나라로 가려 하자, 굴원은 “진나라는 호랑이와 이리 같은 나라여서 믿을 수 없으니 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秦虎狼之國 不可信, 不如毋行.”라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회왕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진나라로 갔다가 억류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이 고사는 사기의 소진열전과 전국책(戰國策)의 초책(楚策)편에 실려 있다.
전국시대에 소진은 6개국을 돌아다니며 힘을 합쳐 진나라에 대적해야 한다는 합종책(合從策)을 유세하였다.
그는 초나라에 가서 “무릇 진나라는 호랑이나 이리와 같은 사나운 나라로서 천하를 삼키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천하의 원수입니다 夫秦虎狼之國也 有呑天下之心 秦天下之仇讐也.”라고 하면서 위왕(威王)을 설득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호랑지국(虎狼之國)은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괴롭히는 포학한 강대국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되며, 중국 전국시대의 최강국이었던 진(秦)나라를 지칭한 데서 유래되었다.
호사토비 (狐死兎悲 여우 호, 죽을 사, 토끼 토, 슬플 비)
송사(宋史)의 이전전(李全傳)에 실려 있는 남송(南宋) 시대 양묘진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송나라는 금나라에 밀려 북쪽 지방을 빼앗기고 강남의 임안으로 도읍을 옮기니, 이를 남송이라 한다.
금나라가 차지한 강북 지역에서는 한인(漢人)들이 자위를 겸한 도적 집단을 이루었고, 이들은 나중에 금나라에 빼앗긴 북송의 땅을 회복하려는 의병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양안아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양안아가 금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죽은 뒤에 그의 여동생 양묘진이 무리를 이끌었다.
여기에 이전의 무리가 합류하였고, 이전과 양묘진은 부부가 되었다.
이전은 남송에 귀순하였는데, 남송에서는 이처럼 귀순한 봉기군을 북군(北軍)이라고 불렀다.
이전은 초주(楚州)에 진출하여 남송과 금나라와 몽골을 상대로 항복과 배신을 반복하였다.
하전은 남송 회동제치사 유탁의 부하로, 본래 북군 출신이었다.
하전이 군사를 이끌고 초주를 공격하려 하자, 양묘진은 사람을 보내어 “여우가 죽으면 토끼가 우는 법이니, 이씨(이전을 가리킴)가 멸망하면 하씨(하전을 가리킴)라고 홀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장군께서 잘 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狐死兎泣 李氏滅 夏氏寧獨存? 愿將軍垂盼.”라는 말을 전하였다.
이는 하전을 안심시켜 속이기 위한 계책이었다.
하전은 이에 넘어가 유탁을 몰아낸 뒤 성으로 돌아왔으나 양묘진은 태도가 돌변하여 그를 성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나중에 하전은 금나라에 투항하였다.
여우와 토끼는 그 힘의 강약이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사람의 사냥감이 되기는 매한가지다.
따라서 여우가 죽으면 그 다음 차례는 토끼일지도 모르고,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그 다음 차례일지도 모르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처지인 것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호사토비(狐死兎悲)는 ‘여우가 죽으니 토끼가 슬퍼한다.’라는 뜻으로, 남의 처지를 보고 자기 신세를 헤아려 동류의 불행을 슬퍼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호사토읍(狐死兎泣) 또는 토사호비(兎死狐泣)라고도 한다.
화기소장 (禍起蕭墻 재앙 화, 일어날 기, 쓸쓸할 소, 담장 장)
이 이야기는 논어의 계씨편에 실려 있다.
춘추시대의 노나라는 계씨가 여러 대에 걸쳐 권력을 좌우하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계강자는 계씨 가문의 봉지(封地)인 비읍에 인접한 전유를 정벌하려 했다.
전유는 노나라의 속국이었으나 국력이 자못 튼튼하였으므로, 계강자는 전유가 후손들의 근심이 될 것을 우려하여 미리 후환을 없애려 한 것이다.
그 무렵 공자의 제자인 염구와 자로는 계강자의 가신으로 있었다.
공자는 염구와 자로로부터 이 말을 듣고는 전유가 사직(社稷)의 신하임을 들어 전유를 정벌하는 일이 부당하다고 하였다.
공자는 염구와 자로가 부당한 일을 막지 못하는 것을 꾸짖으며, “내가 보기에 계씨의 근심은 전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담장 안에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한 정현의 주석에 따르면, 소장(蕭墻)은 임금과 신하가 상견하는 예법으로서 병풍을 벽처럼 둘러 엄숙하고 공경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화기소장(禍起蕭墻)은 ‘재앙이 담장 안에서 일어난다.’라는 뜻으로, 내부에서 재앙이 비롯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내란이나 내분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화언교어 (花言巧語 꽃 화, 말씀 언, 교묘할 교, 말씀 어)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유래되었다.
논어의 학이(學而)편에 ‘교언영색하는 자 가운데는 어진 사람이 드물다 巧言令色 鮮矣仁.’라는 말이 있다.
송나라 때 주희는 주자어류에서 이 구절에 대하여 “내 생각에 따르면, 교언이란 이른바 화언교어를 말하는 것이다. 마치 요즘 과거 시험 응시생들이 붓 끝을 놀려 글을 짓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 據某所見 巧言卽所謂花言巧語 如今世擧子弄筆端做文字者 便是.”고 해설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화언교어(花言巧語)는 꽃 같이 화려하고 교묘한 말이라는 뜻으로, 듣기에는 좋지만 허황된 말이나 듣기 좋은 말로 남을 속이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남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달콤한 말을 의미하는 감언이설(甘言利說) 또는 감언밀어(甘言蜜語)와 같은 뜻이다.
황금용진환소삭 (黃金用盡還疎索 누루 황, 쇠 금, 쓸 용, 다할 진, 돌아올 환, 성길 소, 찾을 삭)
당나라 때의 시인 고적이 지은 시 한단소년행(邯鄲少年行)의 한 구절이다.
고적은 당나라의 전성기에 활동한 시인으로, 잠삼과 더불어 잠고(岑高)로 불린다.
젊은 시절에 그는 때를 만나지 못하여 방랑 생활을 하였는데, 생활은 빈곤하였으나 작풍은 호탕하고 낭만적인 기운이 넘쳤다.
한단소년행은 그가 북쪽의 계문에서 유랑하다가 한단으로 가서 지은 작품이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단성 남쪽에서 노니는 한량들 邯鄲城南遊俠子,
한단에서 자란 일 자랑스러워하네 自矜生長邯鄲裏.
어디서든 멋대로 놀아도 집이 부자이니 千場縱博家仍富,
몇 번이고 보복을 당하더라도 버젓이 살아 있네 幾處報仇身不死.
집 안에선 노랫소리 웃음소리 날마다 분분하고 宅中歌笑日紛紛,
문 밖에는 수레가 구름처럼 모이네 門外車馬如雲屯.
내 속마음을 누구에게 쏟을지 모르겠으니 未知肝膽向誰是,
옛날 평원군을 생각나게 하네 令人却憶平原君.
그대 보지 못했나, 요즘 사람들 경박하게 사귀는 행태를 君不見今日交態薄,
황금이 바닥나면 사이가 멀어지네 黃金用盡還悚索.
이러니 탄식하며 옛 놀던 곳과 이별하고 以玆感顚辭舊遊,
더 이상 작금의 세태에 바랄 것이 없네 更於時事無所求.
젊은이들과 어울려 좋은 술이나 마시면서 且與少年飮美酒,
서쪽 산 오가며 사냥이나 하려네 往來射獵西山頭.
평원군은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재상을 지낸 인물로, 인재를 후대하여 그의 집에는 식객이 3,000명이나 되었다.
고적은 그러한 인물을 만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부잣집에 손님이 끊이지 않지만 그 재산이 바닥나면 손님도 끊어지는 경박한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황금용진환소삭(黃金用盡還疎索)은 ‘황금을 다 써 버리고 나면 다시 사이가 소원해진다.’라는 뜻으로, 돈이 있고 없음에 따라 인간관계가 달라지는 세태를 풍자하는 말이다.
흑백전도 (黑白顚倒 검을 흑, 흰 백, 엎드러질 전, 넘어질 도)
굴원(屈原)의 회사(懷沙)에서 유래되었다.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굴원은 유배지에서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며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그가 죽기 전에 자신의 심경을 담아 지은 작품이 바로 ‘회사’이다.
여기서 굴원은 ‘흰 것이 변하여 검은 것이 되고, 위가 거꾸로 아래로 되었네 變白以爲黑兮 倒上以爲下. 봉황은 조롱 속에 갇히고, 닭과 꿩이 하늘을 나네.’라고 읊으며, 간신배들이 활개 치는 세상을 한탄하였다.
또 후한 시대 안제 때의 양진은 번풍과 주광 등 탐관오리의 행태를 고발하는 상소문에서 ‘흰 것과 검은 것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고, 맑음과 탁함이 그 근원을 같이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흑백전도는 문자 그대로 흑과 백이 뒤집힌 것처럼 옳음과 그름이 뒤집힌 부조리한 상황을 비유하거나, 검은 것을 희다고 말하고 흰 것을 검다고 말하는 것처럼, 고의로 옳고 그름을 흐리게 하거나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여기서 유래한 흑백전도(黑白顚倒)는 ‘검은 것과 흰 것이 거꾸로 되었다.’라는 뜻으로, 옳고 그름이 뒤집히거나 그러한 상황을 야기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전도흑백(顚倒黑白) 또는 반백위흑(反白爲黑), 흑백혼효(黑白混淆) 또는 혼효흑백(混淆黑白)이라고도 한다.
전도시비(顚倒是非)나 혼효시비(混淆是非)도 같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