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봐야할 고전 영화 명작 100편 Vol.2 (51~100)

by lizard2019 posted Jun 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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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페르소나 Persona>(1966) / 감독: 잉마르 베리만

 

  펠리니는 그를 '중세의 음유시인'이라고 불렀고 고다르는 낭만적이라고 했다. 나라면  그를 낡은 예술 영화의 묘지기라고 부르겠다. 잉마르 베리만이 스웨덴에서  영화를 시작한 46년은 정신분석학과 결합한 실존주의가 전후의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던 시대였다. 영화사적으로 보자면 네오레알리슴이 그 새로움을 천명하던 시기였고 안토니오니와 고다르의 모더니즘 영화들이 나오기 이전이었다.

  <제7의 봉인>과 <처녀의 샘>들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베리만은 말 그대로 예술 영화의 대부가 되었다. 베리만의 종교적 색채를 쏟아부은 존재에 대한 사색과 특히 여성에 대한 '심오한' 정신분석 그리고 영화 안에서 영화 매체에 대해 언급하는 성찰적 태도 등은 영화의 예술성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후에도 영화적 예술성은 종종 베리만식 형식과 내용에 견주어 논의된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타르코프스키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국제적 명성과 달리 그 당시 스웨덴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베리만을 그리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스웨덴식 사회주의의 집단성에 대한 고민과는 달리 그는 개인의 심리나 종교적 문제에 매달렸고 이런 것들은 그 당시에도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완벽하게 고립시킬 수 있는 개인 소유의 섬에서 베리만은 흔들리지 않고 영화들을 만들어 갔다. <페르소나>는 <어두운 유리를 통해> <겨울빛> 그리고 <침묵> 이후의 2번째 3부작 가운데 한편이다.

  <페르소나>는 제목 그대로 가면과 그 가면 뒤에 있다고 추정되는 본질에 관해 복잡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가 시작되면 제물로 올릴 양이 살해되는 장면과 못이 박힌 손 등의 기독교적 이미지와 죽음과 악이 등장하는 스웨덴의 초창기 영화, 클로즈업으로 확대된 커다란 거미, 영화 카메라와 스크린 등이 보인다. 그리고 침상에 누운 아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주인공 엘리자베스(리브 울만)와 알마(비비 앤더슨)의 이미지가 중첩된다. 영화의 서두에서 <페르소나>는  이와 같이 꿈과 같은 형식으로 복제예술과 공연예술이 현실과 맺고 있는 관계, 모성과 죄의식 그리고 인간의 이중성 등의 문제들을 응축적으로 제시한다.

  이 영화에는 세명의 여자와 두명의 남자가 나온다. 남자들은 피상적으로 등장하는 반면 여자들은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재현된다. 결코 사회적 가면을 벗지 않는 여자 의사와 달리 여배우인 엘리자베스와 간호원 알마는 그 가면을 벗는 순간 정체성 위기를 맞는다. 알마는 연극 <엘렉트라> 공연 도중 언어를 거부하게 되면서 예술과  남편 그리고 아이를 포기하게 되는 엘리자베스를 돌보기 위해 함께 섬으로 떠난다. 곧 결혼해 안정된 삶을 살기를 욕망하던 알마는 위기에 빠진 엘리자베스에 동일화하게 되면서 임신 중절 수술이나 난교와 같은 과거의 죄의식이 여전히 자신을 억압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알마를 관찰하며 가학적 쾌락을 즐기던 엘리자베스 역시  점차 그녀의 어두움의 세계로 끌려간다. 그리고 자신 안에 숨어있던 공포스런 죄의식과 조우한다.

  영화에 사용되는 유대인 학살을 기록한 필름과 베트남전의 분신 장면들은 이렇게 제어할 수 없는 공포를 가시화하는 데 차용되지만 사실 좀 자의식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위에서 이야기한 양과 거미라든지 못박힌 손, 정체성의 융합과 분리 그에 따른 혼란, 이 모든 것들이 실제로 어딘지 예술연하는 수사학적 과장으로 보인다. 돌아보건대 베리만의 영화적 실험은 이제 그 시효를 다한 듯이 보인다. 시간은 상징과 상투성의 차이를 급히 무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아마도  베리만이 이즈음의 영화사나 영화 연구에서 잊혀진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필자: 김소영/영화평론가·국립영상원 교수>

 

 

52. <적과 백 Csillagosok, Katon k>(1967) / 감독: 미클로슈 얀초

 

  얀초 미클로슈의 영화는 잘 안무된 춤과 같다. 카메라는 항상 이동하고 등장하는 사람들도 이리저리 움직인다. 카메라로 찍은 집단의식, 혹은 총체극을 보는 느낌을 주는데, 혁명과 반혁명, 억압과 해방이라는 주제를 추구하는 마르크시스트 영화감독의 화면에서 이만큼 형식주의적인 성향을 발견하는 것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얀초는 헝가리 민속 예술의 집단군무와 그의 마르크시스트 세계관을 합칠 수 있는 지점에 그의 영화세계를 세우고자 했다. 매너리즘이 없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런 스타일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어떤 이론으로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어떤 풍부한 힘이 그의 영화에는 있다, 그의 영화세계는 그래서 흔히 '얀초의 나라'라는 명칭으로 정의된다.

  <적과 백>은 <귀향>(1964), <검거>(1965)와 더불어 얀초 미클로슈의 초기영화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옛 소련의 혁명 50주년을 맞아 헝가리와 소련이 공동으로 제작한 이 영화에서 그러나 얀초는 혁명 축하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진술을 하고 있다. 1만여명의 헝가리군 장교와 병사가 적군과 백군의 내전의 와중에 적군에 가담해서 소련과 세계 혁명을 위해 싸우는 내용이지만 영화는 승리를 향한 영웅적인 투쟁기라기보다는 처형과 학살을 시각화한 발레 같다는 인상을 준다.

  흑백 필름으로 찍힌 이 영화에서 흰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등장인물들은 서로 구분이 가지 않는다. 말을 들어보지 않으면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서로 죽이고 체포하고 죽임을 당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적군의 도덕적 우월성이 암시된다면 그것은 그들이 백군보다 조금 더 엄격하고 선택적으로 처형한다는 사실 뿐이다.  처형과 학살과 전투의 풍경을 따라가기 쇼트로 묘사하면서, 얀초는 서로 이기고 지는 힘의 부침 현상을 하나의 롱쇼트로 보여준다.

  억압과 폭력의 종식을 향한 싸움은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갈등과 대립을 낳는다.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화면 움직임은 쉽게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현실과 역사를 가리키지만 이 순환을 담아내는 스타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스타일은 역동적이다.

  얀초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방점을 찍는다. 멈추지 않는 힘은 새로운 질서를 향해 갈 수 있다는 것을 얀초의 화면 스타일은 암시하고 있다. 얀초의 70년대 이후 작품은 바로 이 역동적인 스타일에 기초한 보다 더 원숙하고 낙관적인 세계관을 보여준다. <붉은 시편> <헝가리 광시곡>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얀초는 한국에 온 적이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념하는 문화 행사의 하나로 한국방송공사 텔레비전의 드라마를 찍었던 얀초는 그 때 어느 대학 영화과 학생들과 가진 비공개 대화 석상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한다.

  "지난 시기의 우리 선배들은 현실에 지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싸웠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고 그럴 필요도 없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참을성있게 웃으며 혁명하자."

<필자: 김영진/영화평론가·씨네21 기자>

 

 

53.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1967) / 감독: 아더 펜

 

  보니 파커와 클라이드 배로는 1930년대의 부부 갱이었다. 금주령 시대(Depression)의 이들은 감옥에서 나온 클라이드가 카페 여급 보니를 만나면서 갱의 행각을 벌이기 시작한다.

  여기에 떠돌이 모스가 가담하고 나중에 형 버크와 형수 블랑슈가 합세해 모두 다섯명이 한 차에 타고 차례로 은행을 턴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던  보니가 초원에서 어머니와 친척들을 만나는 장면은 참으로 시적이다.

  보니와 클라이드의 실제 사진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미국의 '새로운 영화'의 효시 같은 작품이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 같은 작품이 된 이 영화에 주목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1967년 12월8일자 커버스토리로 이 작품을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는 월남전이 기폭제였다. 월남에서의 폭력 그리고 이제까지의 미국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는 관점이 젊은 영화인들에게서 일어난 것이다. <이지 라이더>는 이런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정점을 이룬 작품이다. 소자본으로 큰 돈을 번 이 작품부터 미국의 '새로운 영화'가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보니와 클라이드의 전기적인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에서 클라이드의 형 버크와 형수 블랑슈는 도중에 부상을 입고 떨어져 나가고 모스도 아버지에게 잡혀 결국 보니와 클라이드만이 벌집 같은 기총소사로 최후를 맞이한다. 보니는 사실은 전기의자에 앉아 죽어갔다. 이 기총소사의 처절한 라스트에서 보니는 성적 오르가슴을 느꼈을 것이라는 평이 있다. 클라이드가 성 불구자여서 잠자리에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평론가는 30년대에 있어 은행은 서민의 착취기관이요 클라이드의 갱단은 이를 공격함으로써 권위와 질서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보니는 시를 썼다. 그들의 행각을 쓴 시는 일종의 발라드다. 그 마지막 연은 이렇다.

  "어느날 그들은 함께 내려갈 것이다/사람들은 이들을 나란히 묻을 것이다/아주 적은 사람들에겐 슬픔-/그리고 법에게는 구원이리라/그러나 그것은 보니와 클라이드를 위한 죽음일 뿐."

  데이비드 뉴먼과 로버트 벤튼의 시나리오는 아서 펜이 프랑수아 트뤼포에게서 영감을 얻어, 특히 그의 <피아니스트를 쏴라>를 생각하며 지시한 것이라고 평론가 폴린 킬은 적고 있다. 클라이드 역의 워렌 비티가 제작했다.

  폭력과 시정 그리고 30년대에 대한 향수를 발라드식으로 구성한 이 작품에서 폭력은 베트남전과 무관하지 않다.  아서 펜은 이 작품의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 내가 이 영화중에 묘사한 것은 베트남에서의 폭력과 관계가 있다는 말을 덧붙일 수  있다. (또) 클라이드가 죽는 장면을 촬영할 때 나는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을 생각했다."

  보니 역의 페이 더너웨이는 모자와 시거로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일본에서 붙인 제목인데 우리가 그대로  사용했지만 원제는 <보니와 클라이드>이다.

<필자: 안병섭/영화평론가·단국대 교수>

 

 

54. <저개발의 기억 Memorias del Subdesarrolo>(1968) / 감독: 토마스 구티에레즈 알레아

 

  쿠바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일어났고 승리를 거뒀다. 부르주아에게 그 승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의미할 뿐이다.  그래서 부모와 아내 또 친한 친구는 쿠바를 떠난다. 90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미국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택한다. 그 이별에 한 남자는 결코 슬프지도 고통스럽지도 않다. 그렇다고 그가 혁명을 열렬히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식인이며 혁명 전까지는 스물다섯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가구점을 경영해 왔고 이젠 아파트 임대로 먹고 사는 부르주아다. 그는 홀로 하바나에 남는다.

  <저개발의 기억>은 세르지오라는 이 남자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현실과 몽상을, 그리고 픽션과 기록(?)을 넘나들며 쿠바를 말한다. 그것은 불연속선이고 산발적이며 변덕스러운 영상의 흐름으로 전해진다. 더욱이 그 영상들은 세르지오의 끊임없는 내적 독백으로 강화되고 또 어긋나기도 한다.

  세르지오는 그가 모든 사회적 관계로부터 떠난 만큼이나 멀리서 쿠바의 정치적 현실을 관찰한다. 아내가 남긴 물건들이, 또 이미 소원해진 아내와 싸우던 소리가 생생히 녹음돼 과거를 되살리는 아파트에서 그는 망원경으로 하바나를 둘러본다. 거기엔 미국의 쿠바 개입 초기에 세운 상징물인 거대한 독수리가 혁명후 제거된 것이 보이며, 하바나항의 수비대의 모습이 보이며, 미국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준비하는 탱크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 먼거리 관찰과 변증법적으로 조우하는  것은 영화의 주축을 이루는 세르지오의 여인들과의 관계다. 그는 과거와 현재의 여인들을 통해서 쿠바를 말하고 혼란스런 자신의 정체성을 읽는다. 그에게 있어서  십대에 경험한 창녀촌의 여자들, 그를 지겨워하며 떠나버린 아내, 성적 몽상의 대상인 청소년, 거리에서 유혹한 엘레나, 심지어는 그의 어머니까지 모두가 하나의 감정이나 관념을 지속시키지 못하고 전체를 보는 눈이 결핍된 열등한 존재다. 나아

가 그들은 저개발의 상징들이다.

  유일하게 그가 만족한 여성은 독일인의 피를 이은 한나였다. 유럽인처럼, 쿠바처럼 후진하는 곳이 아닌, 무언가 진정한 일들이 벌어지는 유럽에서 살고 싶었던 세르지오에게 한나는 그 모든 것을 표상한다. 그러나 현재의 그가 관계를 맺고 있는 엘레나는 모든 면에서 저개발을 느끼게 할 뿐이다. 엘레나가 지니는 저개발을 아내의 옷으로 갈아입히고 성적으로 이용하지만, 그는 참을 수 없는 경멸감만을 느낀다. 결국 그 경멸의 대상에게 성폭행자로 고소되지만. 

 순간적이고 산발적인 회상들, 정지되고 파편화하는 움직임들, 쿠바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보여주는 뉴스영화와 사진들, 그리고 영상에 질의하고 또 그와 어긋나는 세르지오의 내적 독백은 이 영화를 혁명과 혁명이 한 개인에 미치는 영향을 변증법적 형식으로 그려낸 강도 높은 보고서로 만들었다. 그렇다고 이 영화는 우리를 설득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끊임없이 질문을 받을 뿐이다.

  혁명 이후 현재까지 쿠바영화산업기구의 주요직을 맡고 있는 구티에레즈 알레아는 이 영화를 통해 사회변혁을 위한 영화의 미학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으며  라틴아메리카의 제3영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쿠바의 사회주의나 거기서 꽃피웠던 영화문화가 이제는 분명히 쇠퇴의 길로 들어섰지만 아직도 그는 영화를 통해 그 사회의  모순과 딜레마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최근의 <딸기와 초컬릿>(93년)이 그 예다.

<필자: 주진숙/영화평론가·중앙대 교수>

 

 

55. <만다비>(1968) / 감독: 우스만 셈벤

 

  아프리카 세네갈의 탁월한 영화감독인 우스만 셈벤은 제3세계 지식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민지 본국 유학이라는 경로를 밟지 않았다. 그는 10대에 이미 자동차 수리공, 벽돌공을 거쳤고, 단지 배고픔 때문에 군대에 지원했는가 하면 고향에 돌아와선 철도대파업에 참가하고 파리의 공장과 마르세이유의 부두노동자로 노동조합 활동에 몰두했던 노동자 출신 지식인이다.

  그는 이런 경험을 소설로 쓰게 되는데 결국 프랑스어로 써야만 한다는 현실 앞에서 마르크시즘과 아프리카 민족주의를 대중에게 전파하고 검증하는 수단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특히 문자화된 예술형식으로는 대부분 문맹인 동포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없다는 깨달음은 그를 기꺼이 영화로 관심을 돌리게 했다.

  늦깎이 영화감독이 된 셈벤은 1963년부터 1977년까지 8편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우편환'이란 뜻의 <만다비>는 그 네번째 영화이자 첫 컬러영화이며 같은 이름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프랑스어와 울로프어판이 있는 이 영화는 국립프랑스영화센터(the Centre National de la Cinematographie Francaise)의 부분적인 자금지원에 힘입어 만들었다. 훌륭한 영화감독이라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영화작업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다비>는 문화적 경제적 '저발전'에 대한 드라마다. 두 아내가 있는 남편의 실업은 그가 프랑스어나 울로프어를 읽고 쓸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교육의 부재를 암시한다. 또 그는 주민등록증이 없어서 파리에서 청소부 일을 하는 조카가 보내준 우편환을 현금으로 바꿀 수 없다. 그의 모든 재난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우리는 여기서 대부분의 동포들처럼 지금까지 주민등록증 없이 살아온, 그리고 그에 따른 불이익에 대한 정보없이 살아온 50대 남자를 볼 수 있다. 동시에 현대적인 삶의 욕구들이 전혀 의지할 데 없는 한  남자에게 갑자기 가하는 폭력을 보여준다.

  그의 이후 작품들에 비하면 소박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가 보는 세네갈 사회의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배어 있다. 주인공  디엥은 허풍선이에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이며 그의 두 아내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생활에서 그는 두 아내만큼의 지혜도 없다. 영화는 그가 살고 있는 작은 세계의 사소한 탐욕과 질투뿐만 아니라 이 남자를 주변의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자비에 맡겨버린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관료들과 탐욕스런 사업가를 비판한다.

  영화는 이런 모든 과정을 배우들의 연기, 특히 주인공의 몸짓, 트림, 불평하는 소리로 채워간다. 이 영화에는 셈벤의 작품에서 계속 나타나는 연출상의 특징이  있다. 그는 어떤 특수효과도 거부한다. 야외촬영과 비직업배우의 등장도 또다른 특징이다. 연기는 자연스럽고, 카메라는 예술적 기교나 형식적  탐색에 집착하지 않는다. 널리 배급되어 세네갈 영화, 나아가 아프리카 영화에 주목하게 만든, 최초의 세네갈 영화인 <만다비>는 관료주의와 고립된 전통주의자 사이의 갈등이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적·사회적 차원의 변화를 통해서만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는, 풍부하게 채색된 아프리카 사회연구라 할 수 있다.

<필자: 변재란/영화평론가>

 

 

56. <만약에... If...>(1968) / 감독: 린제이 앤더슨

 

  <언제나 마음은 태양>에서 <위험한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문제학생들에게는 '좋은' 선생들이 있었고, 그 덕분에 그 학생들은 곧 평정을 찾았다. 하지만 '혁명의 해'인 68년에 만들어진 <만약에…>는 이런 화해를 거부한다.

  이 도전적인 영화는 제목이 같은 키플링의 시, 장 비고의 <품행 제로>라는 영화, 데이비드 셔윈과 존 홀리트의 '십자군들'이라는 대본에 힘입은 린제이 앤더슨의 특별한 영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힘은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찾아야 한다. 50년대 중반의 영국의 변화, 다시말해서 신좌파의 등장, 프리시네마의 탄생, 브레히트의 재발견, 존 오스본 등 연극계의 '성난 젊은이'들의 활약, 린제이 앤더슨을 주축으로 <사이트 앤 사운드>를 통해 펼쳐진 비평활동이 두드러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다큐멘터리 리얼리즘'(존 오스본), 놀랄 만하게 초현실주의적인 사건들(프리시네마), 권위를 전복하고자 하는 충동들(신좌파), 그리고 자기성찰의 장치 사용(브레히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영화란 감독 개인의 자기진술의 장이고 그것이 동시대 사회에 대한 주석으로 기능해야 하며 영화감독이  도전하고자 하는 기본 가치에 대한 견해가 반영돼야 한다는 앤더슨의 

견해는 여기서 참여가 결여된 자유주의의 허약함에 대한 주석으로 바뀐다.

  영화는 영국의 한 공립학교를 배경으로 권위주의적인 제도 안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변화를 추구하려는 학생들의 작고 큰 반란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물리적 환경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영화의 핵심은 아니다. 그것은 권위에 의한 개인의 억압을 보여주기 위한 사회의 축도다. 동시에 지성과 상상력이 분리돼 있는 체제에 대한 은유다. 공립학교의 환경은 개인의 창조적인 발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아의 분열과 파편화를 초래할 뿐이라는 게 앤더슨의 생각이다.

  <만약>은 고전적 극영화에 전형적인 일종의 리얼리즘의 경계 안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브레히트적 장치와 초현실주의적 영상에 의해 방해된다. 브레히트적  장치는 8개의 시퀀스를 대표하는 8개의 소제목과 칼라장면 안에 흑백장면을 집어 넣은 것과 관련된다. 연대기적으로 배치된 '학교기숙사―신학기' '학교―한번 다시 모이다' '과외활동' '종교적 의식과 로맨스' '훈육' '저항' '이제 전선에' '십자군'이라는 자막은 색채와 흑백장면이 교차되는 편집과 더불어 관객이 영화매체에 대해 깨닫게 하는 '거리두기' 장치로 기능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환상일 수도 있는 일들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대부분의 관객들은 일어나는 사건들을 환상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앤더슨은 "그것 모두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서 알 수 있듯 환상장면(총 맞은 교목이 서랍 안에서 부활한다든지, 주인공들이  카페에서 나체가 돼 뒹구는 장면, 복도에서 교장 부인이 벌거벗고 달려가는 모습, 학생들이 학부모과 교사들과 전투를 벌이는 마지막 장면)은 사실과 환상을 구별하기보다는 그것이 섞이고 침투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힘은 무엇보다도 체제(?)로부터 해방된 믹(말콤 맥도웰)이 기존 질서의 파괴라는 최종적 행동에 돌입해 행동의 주체이자 창조자가 된 데 있다. <만약에…>의 미덕은 다른 영화들과의 차별성, 결국 기존체제에 순응해 버리고 마는 대중적 장르 영화들을 초월했다는 사실이다.

<필자: 변재란/영화평론가>

 

 

57.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A Space Odessey>(1968) / 감독: 스탠리 큐브릭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영화가 철학이고 종교일 수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6백만달러로 시작된 대작 SF영화가 1천만달러짜리 언더그라운드영화로 탈바꿈한 것도 기적이지만(메이저영화사가 멋지게 당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메이저 스튜디오가 만들어낸 사상 최고의 실험영화인 셈이다), SF영화가 이처럼 진지한 문명비판과 철학적·종교적 주제를 심오하게 구현했다는 것도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다.

  큐브릭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완벽한 독립영화작가이다. 메이저의 돈을 끌어다 쓰면서도 그의 영화는 수시로 메이저영화의 관습을 벗어나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그는 내러티브의 관습적 전개방식을 따르지 않고 있다. 경이로운 우주의 공간과 우주선의 기하학적 구도가 영화 전반부에 걸쳐 플롯보다 더 중요하게 제시되는 것이다. 특히 <푸른 다뉴브>의 멜로디와 함께 하는 우주선의 '기계발레'는 데이비드 린의 '사막'과 더불어 영화사에 있어 전혀 뜻밖의, 가장 아름답고도 놀라운 장면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궁극적으로 이야기되는 주제는 '신'의 문제와 '기술의 진보에 따른 인간의 비인간화'이다. '인류의  기원' 편에서부터 시작되는 인간의 진보는 도구·무기가 발견되고 만들어지는 과정과 일치한다. 그러나 기술의 진보는 곧 인간의 비인간화를 낳고 그리고 마침내는 2001년 즈음에 이르러 컴퓨터가 더 인간적인 감성을 지니게 된다.  우주선 디스커버리호의 통제컴퓨터 핼(철자로는 HAL이지만 발음은 마치 '지옥'처럼 들린다)은 자신의 기능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고 조그만 실수에도 그것을 수치로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내 우주비행사 데이브에 의해 해체되어 갈 때 핼은 '데이지'를 부르며 죽어간다. 그는 일면 빅 브라더였으면서도 프랑켄시타인이었던 것이다(HAL의 철자 하나씩을  뒤로 넘기면 IBM이 된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또한 과학문명의 발달은 곧 '커뮤니케이션'의 발달과도 그 맥을 같이 하는데 큐브릭은 이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이  발달할수록 '간접적'이 

되며, 그에 대한 신뢰가 커질수록 진실은 왜곡되기가 쉽다고 본다. 여기서 21세기의 많은 사람들은 통신수단을 통한 간접적인 커뮤니케이션만을 행하며, 또한 핼은 절대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완벽한 컴퓨터라는 절대적인 신뢰가 커뮤니케이션의 왜곡을 낳고 불행한 사고를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점차 간접적으로 변해가는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인간적 유대관계는 점차 상실돼 가는 것이다.

  목성을 향하던 데이브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다. 자신의 늙은 모습, 임종, 그리고 새로 태어나는 아기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탄생'의 의미에 이르러 비로소 큐브릭은 '신'의 존재를 묻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에서부터('인류의 기원') 플로이드 박사의 딸의 생일, 우주비행사 프랭크의 생일, 그리고 마지막 장면인 데이브의 재탄생에 이르기까지 '탄생'은 곧 생명의 존귀함과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신비를 신에게 물을 수밖에 없는 인간존재의 미미함을  의미한다(이를테면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이 신의 존재에 비하면 부처님 손바닥에서 노는 손오공 같다고나 할까). 그런 면에서 데이브는 예수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예수가 때로는 다윗(DAVID)의 아들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는 점(마태복음 1:1)에서 이는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주제를 큐브릭은 논리적으로 제시하기보다는 관객으로 하여금 경험하고 느끼게 하려 했다. 음악과 구도, 특수효과 등은 이를 위해 세심하게 배려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SF영화는 이러한 <2001년: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우주선과 우주공간, 스타게이트의 이미지 등 독창적인 세트디자인과 막스 오필스의 그것에 비견될 만한 카메라움직임,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학적인 주제에 이르기까지 이 '우주의 대서사시'는 이제 신화가 되었다.

<필자: 김지석/부산예술전문대학 교수>

 

 

58. <루시아 Lucia>(1969) / 감독: 움베르토 솔라스

 

  <루시아>는 움베르토 솔라스가 스물여섯의 나이에 만든 대작이다. 그는 열네살에 이미 카스트로가 이끄는 반란군의 도시게릴라였으며 스무살도 되기 전에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섯번째 작품인 <루시아>는 구티에레스 알레아의 <저개발의 기억>과 더불어 국제적으로 비평적 찬사를 받은 쿠바의 혁명영화다.

  솔라스는 영화 소재를 역사적 사실로부터 끌어온다. 역사란 현재를 바로보기 위한 대화를 열어주고, 인간의 어떠한 경험도 모두 역사성을 간직하기 때문이다. <루시아>는 쿠바의 근세사에서 중요한 시기를 여성들의 사랑 이야기로 전환시켜 탐구한다. 영화는 세개의 드라마로 나뉘며 그 주인공들의 이름은 모두 루시아다.

  첫 이야기의 루시아는 1895년 스페인 식민시대를 살고 있는 귀족이다. 거리엔 반란군들의 시체가 나뒹굴고 그의 남동생도 농민들과 연대해 싸우고 있지만, 루시아의 일상은 친구들과의 한담과 놀이로 채워져 있다. 루시아는 그에게 접근해 온 스페인군의 앞잡이 라파엘과 사랑에 빠지고 그것은 곧 동생의 죽음을 가져오는 배신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는 라파엘을 찔러죽임으로써 복수한다. 끌려가는 거리에서 루시아는 한 미친 여자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전장에서 스페인군에게 강간당한 수녀, 그 뒤 "쿠바여 깨어나라!"고 절규하며 거리를 헤매던 여자로부터.

  두번째 이야기는 마카도의 독재가 바티스타의 독재로 대치되던 1930년대 정치투쟁 속의 루시아를 다룬다. 그는 담배공장에서 기계적인 일을 하면서 혁명운동가  알도와의 사랑을 회상한다. 그와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도 행동가가 되어 시위에 참여했던 일, 알도의 경찰 습격, 마카도를 타도했을 때 그들이 잠시 누린 행복, 그리고 알도를 죽게 한 폭력적인 정치활동 등이 루시아의 내레이션과 함께 재생된다. 이야기는 알도의 아이를 가진 채 혼자가 된 루시아가 카메라를 직시하는 것으로 끝난다.

  마지막 이야기의 루시아는 혁명후 농촌의 노동자다. 질투심 많은 남편 토머스는 루시아를 밖에 나가거나 일하러 가지도 못하게 한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의 말을 따르지만 루시아의 불만은 커져만 간다. 그러다 문맹퇴치를 위해 아바나에서 온 혁명군에게 루시아는 글을 배운다. 그가 쓴 첫 글은 남편에게 남긴 "난 떠나요. 난 노예가 아니어요"다. 그러나 루시아는 토머스에게 돌아온다. 일도 하고 당신도 사랑할 것이라면서. 이야기는 루시아와 토머스가 바닷가에서 엉켜 싸우는 것으로 끝난다.

  이 세 이야기는 모두 형식을 달리하고 있다. 각 형식은 그것이 다루는 역사적 시기와 계층을 가장 정확하고 자세하게 제시하는 전략이 된다. 식민시대 귀족계급의 파괴적 열정은 서사적 멜로드라마로, 혁명가와의 사랑에 대한 중산층의 회고는 관습적인 드라마로, 그리고 쿠바의 뿌리깊은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노동계급의 투쟁은  경쾌한 코미디로 그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지배적 형식들은 그 속에 사용된 다양한 양식에 의해 전복되기도 한다. 특히 들고 찍은 카메라로 현실감을 증폭시켜 지배적인 형식의 신비를 벗겨버림으로써 장중하고도 우아한 서사멜로드라마나 서정적인 사랑의 회고, 그리고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익살의 차원을 변환시킨다.

  솔라스의 이 형식적 전략은 여성을 중심인물로 택한 전략과 일치한다. 그에게 있어서 여성의 이야기는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변혁의 필요성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여성에 대한 이중적 억압은 혁명영화의 극적 잠재성을 배가시킬 수 있기 때문에. 과거의 이야기들을 장엄한 비극으로 혹은 모호한 슬픔으로 전하던 솔라스는 마지막 이야기에서 낙관적인 결말을 내린다. 혁명이 여성-인간-사회가 갖는 모순을 모두 풀어줄 수 있다는 듯이.

<필자: 주진숙/영화평론가·중앙대 교수>

 

 

59. <죽음의 안토니오 Antonio-das-Mortes: O Prag o da Maldade Contra o Santo Guerreiro>(1969) / 감독: 글로베르 로샤

 

  쿠바혁명의 승리는 라틴아메리카의 민족주의 운동에 불을 붙였으며 영화를 통한 민족주의와 탈식민화의 구현은 60년대 말 정점에 달했다. 시네마 노보는 쿠바의 혁명영화와 더불어 진보적 영화미학의 정수를 국제무대에 알린 브라질의 민족영화 운동을 일컫는다.

  글로베르 로샤는 브라질 시네마 노보의 핵심적인 이론가이자 실천가이다. 그는 브라질 영화사나 시네마 노보의 이론을 담은 책과 글들을 통해  브라질 나아가서는 라틴아메리카 고유의 영상언어를 탐색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지배적인 영화에 대한 반역에서 나오며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아우르는 것이어야 했다. 그 현실의 핵심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굶주림과 폭력의 미학이다. 굶주림은 브라질 사회의 본질이며 그것을 가장 당당하게 표명하는 길은 폭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미학의 성취를 위해 로샤는 브라질의 다양한 민중문화적 요소들 - 민중종교, 신화, 전설, 음악 - 을 영화로 끌어들인다. 억압에 대한 영원한 반항인 동시에 현실로부터의 도피라는 양면성을 가진 민중문화로부터 로샤는 진보적인 힘을 끌어내고자 시도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죽음의 안토니오>다. 영화는 가뭄과 빈곤의 땅인 브라질 북동부 황야를 배경으로 한다. 거기엔 억압받고 무력한 민중이 있고 그들의 편엔 천년도래를 전파하는 성녀와 의적의 무리가 있다. 그들 반대편에는 농지개혁을 반대하며 농민을 착취하는 눈먼 지주가 있고 그의 정부가 있고 그를  보좌하면서 황야를 산업화하고 외국자본을 끌어들이자고 주장하는 하수인이 있다.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인물로 알코올에 찌들어 현실을 망각하고 있는 교수가 있다.

  이 곳에 '죽음의' 안토니오가 나타난다. 그는 의적대장 코이라나를 죽이고자 지주가 고용한 킬러다. 코이라나에게 치명적인  상해를 입히는 데 성공한 안토니오에게 성녀는 말한다. 민중들은 형제이며 형제를 죽이는 자는 심해로 떨어질 것이며 코이라나가 죽게 되면 곧 민중도 죽게 될 것이라고. 성녀는 그에게 '끝없는 전투' 혹은 '끝없는 불길 속을 걷기'를 촉구한다.

  코이라나의 죽음은 안토니오뿐만 아니라 교수를 혁명적인 투사로 만들며, 또한 아프리카 토속종교를 대표하는 안타오라는 수동적인 흑인을 전사로 만든다. 다시 고용된 킬러들에게 민중들은 모두 학살당하고 안토니오와 교수는 킬러들을 죽인다. 성녀를 말 뒤에 태운 안타오는 지주를 죽이며 교수는 코이라나의 칼과 총으로 무장한다. 안토니오는 마을을 떠난다. 마지막으로 그는 셸 석유회사의 간판이 걸려있는 현대적인 거리를 걷는다. 그 간판이 표상하는 새로운 식민주의가 그에게 주어진 끝없는 전투의 새로운 장이라는 듯이.

  서부극의 틀과 주인공을 패러디한 듯한 이 이야기의 의미를 로샤는 브라질의 전설과 신화를 이용해 확장한다. 전설적인 실제 의적의 이야기를  빌려와 그 혁명적 부활의 의미를 말하며, 악을 상징하는 드래곤을 찔러 죽인다는 게오르그 성인의 신화로 흑인들의 혁명 역량의 토대를 마련해준다.

  또한 로샤는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담은 인물유형들의 갈등과 투쟁을 결코 편안하게 보게 두지 않는다. 수평적이고도 깊이 있는 공간을 창출하는 카메라, 원사와 길게 찍기로 보여준 지형과 인물들의 움직임, 브라질 고유의 색채를 재현한 의상과 세팅, 양식화한 연극적 연기, 안무된 칼싸움, 영상에 동반하는 음유시적인 노래 등의 양식적 요소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일깨우고 비판적으로 참여하게 한다

  저개발 사회에 공명을 일으킨 이 우화적인 영화를 만든 뒤 로샤는 정부의 탄압을 피해 브라질을 떠났다. 망명 중 기록영화 등 소수의 작품을 만들긴 했지만 이 영화나 <검은 신 하얀 악마>에서 보여준 브라질적 미학의 성취를 다시는 재현하지 못한 채 80년 마흔셋의 나이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필자: 주진숙/영화평론가·중앙대 교수>

 

 

60. <콘돌의 피 Yawar Mallku>(1969) / 감독: 호르헤 산히네스

 

  잉카족의 성스러운 호수 티티카카호에서 찍은 <우카마우>는 볼리비아 최초의 장편극영화로 기록돼 있다. 볼리비아 영화협회가 제작하고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던 호르헤 산히네스(1936∼)가 연출한 이 영화는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인디오의 모습을 개인적이고 다소 탐미적으로 담았다.

  그러나 <우카마우>는 영화로서가 아니라 제3세계의 민중영화 운동의 상징적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 차원에서 제작된 이 영화는 쿠데타로 등장한 군부정권에 의해 상영금지되고 호르헤 산히네스는 <우카마우>의 대중적 명성을 살려 그의 영화그룹을 '우카마우 집단'으로 이름지었던 것이다. 우카마우는 아이마라어로 '올바른 길'을 뜻한다.  <우카마우>에서 그것은 아내를 잃은 인디오가 메스티조 상인에게 복수하는 것을 의미했다면 '우카마우 집단'에 와서 그것은 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중투쟁의 길을 뜻하게 된다. 우카마우 집단은 그 '올바른 길'을 "민중영화는 민중 속에서 탄생하고 민중적 미학을 담으며 민중에게 보여져 그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민중노선'으로 걷고자 했다. <콘돌의 피>는 '우카마우 집단'의 첫 영화다.

  안데스 산지의 칸타 마을. 인디오 이그나시오는 술에 취해 아내 파울리나를 괴롭힌다. 그들에게는 자식이 있었으나 전염병으로 잃고 말았다. 이그나시오는 파울리나를 때리기까지 하지만 파울리나는 남편이 자기자신을 때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상하게도 이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태어나지를 않는다. 이그나시오는 그 원인을 밝혀나가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바로 마을에 들어온 미국의 평화봉사단(볼리비아에서는 '진보부대'로 불렸다)이 개설한 산부인과병원에서 은밀하게 불임시술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농민들을 조직하여 '여성의 배에 죽음을 뿌리는' 선교사와 병원과 평화봉사단을 습격한다. 곧 이어 닥친 탄압. 그는 간신히 생명을 건지고 도시에 노동자로 나간 동생 시스토를 찾아간다. 

 시스토는 자신의 뿌리를 떠나 메스티조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다. 의사는 이그나시오의 출혈이 심하여 급히 수혈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말한다. 시스토는 피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지만 헛수고다. 혈액을 가진 백인 의사들은 그들의 사교모임을 인디오 때문에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그나시오는 죽는다. 시스토는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을 깨닫고 인디오로서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마지막 장면은 하늘로 치솟은 총구들을 긴 정지화면으로 잡고 있다.

  <콘돌의 피>는 물론 칸타 현지에서 촬영됐다. 이 영화는 비록 출연자 모두가 비전문배우거나 농민들이며 거의 자연광과 들고 찍기에 의존하곤  있지만 민중적 삶의 양태를 탁월하게 담아내고 있으며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에 강렬한 동의를 표시하고 있다. 영화는 극적 맥락, 인물  구성, 음악, 리듬 등 모든 면에서 대립적인 구조로 짜여져 있다. 아이들이 뛰노는 마을 잔치와 아이들의 인형을 땅에 묻는 장면, 푸쿠나(피리)를 부는 인디오 농민과 로큰롤에 맞추어 춤추는 평화봉사단,  전투적 이그나시오와 백인 여배우의 사진을 벽에 붙여놓은 도시의 시스토, 피를 구하기 위해 트럭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는 시스토와 고상한 의사들의 사교모임을 대조시키는 호르헤 산히네스의 관점은 매우 분명하다. 이야기 구성은 파울리나가 시스토에게 들려주는 회상 형식을 취한다. 그 때문에 잦은 플래시백의 사용이 불가피한데 그것은 농민들의  이해를 방해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또한 

그는 이 영화가 지나치게 개인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농민들에게 왜 그들이 불임시술을 하는가를 밝혀주지 않는다.

  이런 부분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콘돌의 피>는 제3세계 전투적 민중영화 운동에서 하나의 이정표와 같은  작품이다. 볼리비아 정부는 1971년 미국의 평화봉사단을 추방하게 되는데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콘돌의 피>다. 우카마우집단은 이후 본격적인 집단적·전투적 영화인 <민중의 용기>(1971), <제1의 적>(1974) 등을 발표했다. 비록 80년대 이후의 활동은 미약해졌지만 우카마우 집단의 믿음과 실천은 간단히 평가돼서는 안될 것이다.

<필자: 이정하/영화평론가>

 

 

61. <순응주의자 Il Conformasta>(1970) /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초기영화는 등장인물의 '분열'에 주목했다. 머리는 혁명가인데, 가슴은 퇴폐적인 부르주아. <혁명 전야>의 주인공 아고스티노와 <파리에서의 마직막 탱고>의 여자주인공 잔느는 모두 그런 인물이다. 마르크시즘과 파시즘, 부르주아식 결혼과 성 해방의 욕구 사이에서 망설이는 그들은 보수적인 순응주의를 택한다. 아마 그것은 베르톨루치의 무의식을 반영했던 것 같다.

  <순응주의자>의 주인공 마르첼로 클레리치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어린시절 자기를 유혹하는 게이를 권총으로 쏜 기억에 시달린다. 그는 자신의 동성애 기질을 부정하기 위해 부르주아 여성과 결혼하고 이탈로라는 파시스트를 스승으로 모신다. 그리고 대학시절 은사였고 지금은 반파시즘 진영에서 싸우는 콰드리 교수를 암살하기 위해 파리로 간다.

  자신의 '정상성'을 증명하기 위한 마르첼로의 노력은 파시즘과 부르주아식 결혼을 택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순응주의자>가 매력적인 것은 성과 정치에 대한 이런 식의 해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베르톨루치는 당시까지 서구영화가 개발해낸 모든 표현 수사를 총동원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마르첼로가 파리로 가는 도중에 불쑥불쑥 끼어드는 마르첼로의 과거 회상 장면은 잘못된 기억과 믿음으로 고통받는 한 남자의 분열된 의식을 아주 화려하게 펼쳐놓고 있다. 이 스타일의 뿌리에는 오슨 웰스와 요제프 폰 슈테른버그와 막스 오퓔스의 영향이 보인다.

  <순응주의자>의 주제는 성정치학에 기초해 파시즘의 심리적 기원을 캐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에서 베르톨루치의 '부친 살해' 욕망도 보인다. 당시 베르톨루치는 장 뤼크 고다르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고다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일어난 68년 5월혁명을 계기로 두 사람은 결별한다. 고다르는 점점 과격해졌고 한 때 이탈리아 공산당원이었던 베르톨루치는 오히려 온건해졌다. <순응주의자>는 과거의 '적' 파라마운트 영화사와 손잡고 만든 영화다. 그러나 이 당시에 고다르는 모든 상업 배급망과 절연하고 노동자들과 실험영화를 찍고 있었다.

  <순응주의자>에서 콰드리와 고다르의 이름이 비슷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콰드리 교수가 사는 파리 주소는 실제 고다르가 살았던 집 주소다.  콰드리 교수가 숲 속에서 암살당하는 장면은 장관이다. 아마 영화사상 가장 잔인하고 장엄한 살인장면일 것이다.

  베르톨루치는 "난 마르첼로이며 파시스트 영화를 만든다. 혁명적인 영화를 만드는 과거의 선생 고다르를 죽이고 싶다"고 스스로 자문자답했다.  사실 좌파정치학을 표방하는 화려한 외피에도 불구하고 <순응주의자>의 속내는 그다지 진보적이지 않다. 콰드리 교수의 부인인 안나는 자유주의자이며  해방된 여성이지만 부르주아적인 퇴폐미를 물씬 풍기고 동성애자에 대한 관점도 모호하다. 동성애에 대한 억압된 심리를 파시즘과 연관시키는 대목도 그리 명확하지는 않다.  그 모든 것을 제치고 이 영화를 대하면 남는 것은 거듭 봐도 찬탄하게 되는 스타일의 매혹뿐이다.

<필자: 김영진/영화평론가·씨네21 기자>

 

 

62. <이지 라이더 Easy Rider>(1969) / 감독: 데니스 호퍼

 

  1960년대는 두개의 세계 대전과 원자폭탄으로 얼룩진 20세기에 대한 비판의식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매카시즘으로  얼어붙었던 1950년대를 지나 60년대에 도착한 미국은 좌파경향의 사회운동(흑인·성의 권리운동과 반전운동)과 보수주의자들의 반격으로 흥분과 혼돈이 교차해 나갔다. 사회운동은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날로 심각해져가는 베트남전과 거듭되는 암살사건(케네디 형제, 마틴 루터 킹과 말콤 X)은 1970년대의 패배를 암시하고 있었다.

  장르-스타-스튜디오 시스템의 공식으로 운영되던 할리우드 영화는 급격한 사회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가 발표된 1967년은 '혁명의 해'로 불릴 만큼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아메리칸 뉴 시네마는 또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60년대 젊은이들의 복잡한 감정을 영화로 담아낸 결과였다.

  데니스 호퍼의 1969년작 <이지 라이더>는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결정판이었다. 빌리(데니스 호퍼)와 캡틴 아메리카(피터 폰다)는 모터 사이클을 타고 '미국을 찾아서'(캡틴 아메리카의 가죽잠바와 헬멧과 모터 사이클에는 성조기가 그려져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뉴올리언스까지 여행을 떠난다. 돈은 마약밀매로 마련했고, 일용할 양식은 마약과 마리화나이다. 그들의 여정에 히피들과 변호사 조지 핸슨(잭 니콜슨)이 스쳐지나간다. 히피들은 문명을 거부하고 기존의 질서를 비판하면서, 무한한 '자유'가 허용되는 새로운 삶과 기독교의 원시공동체로의 회귀를 꿈꾸고, 조지(조지 워싱턴?)는 전쟁과 빈곤과 지도자와 모든 인생고가 사라져 버린 '평등'한 사회를 이야기한다.

  영화는 자유와 평등을 명시한 미국독립선언의 실현불가능성, 아메리칸 드림과 미국역사에 대한 회의로 빠져들어간다. 모래땅에 씨를 뿌리는 히피들은 이상주의자들이며, 알코올중독에 빠진 조지는 허무주의자일 뿐이다. 빌리와 캡틴 아메리카는 뉴올리언스에서 열리는 마르디그라(사육제의 마지막 날)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하지만, 축제의 제물로 바쳐진 것은 기성세대(또는 보수주의자들)의 총에 맞아죽는 그들 자신이었고 남은 것은 아메리칸 드림의 파산이었다. 노예시장으로 악명 높았던 뉴올리언스에서 실패했다고 고백하는 두 사람은 미국역사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할리우드식 영화 만들기에서 벗어난 방법은 영화의 주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스타를 배제하고, 카메라를 스튜디오에서 야외로 옮기고, 장르를 패러디하는 저예산의 독립영화. 서부영화의 와이어트 어프와 빌리 더 키드는 캡틴 아메리카와 빌리가 되고, 그들은 서부로부터 동쪽으로 와서 영웅이 아니라 패배자가 된다. 동성애를 암시하는 버디 무비와 가정이 부재한 로드 무비의 형식. 록 다큐멘터리와 뮤직비디오를 예견케 하는 반전무드의 록 음악 사용. 고전적 영화문법에 정면으로 도전한 장 뤼크 고다르의 <네멋대로 해라>와 미국 언더그라운드 운동의 기수 케네스 앵거의 <떠오르는 전갈궁>은 참고서가 되었다.

  '위대한 영화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게 되었을 때, 오류가 발생한다'는 고다르의 예언처럼, 데니스 호퍼와 아메리칸 뉴 시네마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1970년대의 보수주의 물결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모두 빼앗겨버리고 덧없이 시들어갔다.

<필자: 김경욱/영화평론가>

 

 

63. <떼오레마 Teorema>(1970) / 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당신들을 지옥과 천국이 마주보는 문으로 안내하겠다. 파솔리니의 영화 가운데 카톨릭 보수파들로부터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던 작품인 <떼오레마>에서 부르주아 가족은 그리스도 같기도 하고 때로는 악마 같기도 한 신비한 인물 테렌스 스탬프로부터 성의 향연에 초대 받는다. 그것은 지옥으로 가는 길일까 아니면 천국일까.

  1961년 <아카토네>로 국제영화계에 이탈리아의 가장 논쟁적 감독으로 알려지게 되는 피에로 파올로 파솔리니. 그 당시 이탈리아 영화계는 네오레알리슴의 시대를  끝내고 펠리니와 안토니오니를 중심으로 한 모더니스트 시네마의 새 장을 열고 있었다. 그 두 거장에 비하면 파솔리니는 오히려 주변부의 아방가르드였지만, 바로 그 주변성이 그의 영화를 오늘날에도 여전히 날카로운 칼처럼 휘번득이게 한다.

  이미 50년대에 시인이며 소설가로서 몇 편의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던 파솔리니는 이탈리아 지식인의 두가지 짐, 카톨릭과 그람시의 마르크시즘을 그의 영화 속으로 끌어들였다. 도시 빈민들에 대한 그의 애정과 카톨릭에 대한 재해석은 <마마 로마>(1962)와 <성마태복음>(1964) 등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비기독교적 신화에 대한 매혹과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한 비판 때문에, 카톨릭계는 물론 좌파 역시 그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 신비주의에 대한 경도와 마르크시즘적  태도 사이의 화해불가능한 모순은 파솔리니 영화의 특징이 됐고, 그는 회화, 르포르타주, 연극, 비평 등을 넘나들며 더욱 그 모순들을 다면화했다. 따라서 더 많은 적들이 생겨났다. 거기다 그의 육체 자체가 일종의 실험실이며, 논쟁의 장이었다. 뿌리 깊은 카톨릭 사회에서 파솔리니의 동성애 성향은 스캔들 이상의 파문이었기 때문이다. <캔터베리 이야기>(1972), <쌀로-소돔의 120일>(1975) 등의 영화에

서 그는 과잉적 성과 폭력 그리고 신성모독을 다뤘으나, 오히려 죽음 자체가 역설적으로 자신의 영화를 재연하는 무대 혹은 장이 됐다.

  <떼오레마>에서 테렌스 스탬프는 부유한 이탈리아 가정에 머물며 가족들을 차례로 유혹하는 역을 맡는다. 그가 하인과 아들, 어머니와 딸,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성 관계를 갖고 떠나자 이들은 모두 서서히 자기파괴의 길로 들어선다. 다양한 현상을 주재하는 추상적 법칙이라는 뜻의 영화 제목 <떼오레마>는 바로 이 신비한 손님을 가리키며 다섯명의 가족들의 운명은 바로 그에 의해 결정된다. 이 영화에서 성애는 신과 인간의 충일한 관계에 대한 은유이지만, 그 관계는 테렌스 스탬프가 갑작스레 떠남으로 파괴된다. 랭보를 읽는 테렌스와의 천국의 나날들이 지옥의 한철로 바뀌는 수난은, 사실 신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순간이기도 한 셈이다.

  실현되지 않은 약속의 땅을 기다리며 사막과 같은 밀라노에서 몰락하는 한 가족의 우화는 사실 종교와 마르크시즘 사이에서 그리고 네오레알리슴의 유산과 자신의 '신비적 리얼리즘' 스타일 사이에서 동요하는 파솔리니 자신에 대한 영화적 성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동요는 노상의 비극적 죽음으로 끝난다. 1975년  파솔리니를 살해했던 17살의 청년은 그가 자신을 유혹했기 때문에 죽였노라고 진술했다.

<필자: 김소영/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

 

 

64. <대부1·2·3 The Godfather partⅠ,Ⅱ,Ⅲ>(1972∼1990) / 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신천지, 약속받은 땅이었던 미국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가. 미국의 70년대는 집단적 나르시시즘의 시대였고 코폴라는 미국의 번영 뒤에 가려있던 치부를 갱스터 영화의 양식을 빌려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1972년에 시작된 대부 시리즈는 90년대에 와서야 3부작이 완성됐다. 제1부는 비토 코를레오네의 쇠락과 마이클의 성장, 그리고 제2부는 비토의 젊은 시절과 마이클 가족의 해체, 제3부는 마이클의 사회적 성공과 쓸쓸한 죽음을 그리고 있지만 세 편 모두가 사실은 동일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화려한 파티와 은밀한 거래에서 시작해 음모와 살인, 갈등이 빚어진 다음 혼자 남은 마이클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코폴라는 마이클이야말로 순수악이며 미국적 부패의 총체적 상징으로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1편에서는 관객이  마이클에 은근히 동조하는 현상이 빚어졌다. 이는 권력에 대한 관객의 환상과 욕망을 마이클이라는 인물이 충족시켜 준 탓이기도 하지만 이야기 구조 자체가 신화나 전설의 서사적 구조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갱스터 영화의 보편적 특성 가운데 하나인 고독한 영웅(마이클)과 그 적들, 그리고 영웅을 돕는 후원자(비토)의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친숙한 느낌을 주면서 동시에 마이클을 동정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 2편에서 코폴라는 마이클을 좀더 고통스런 인물로 묘사하기로 했고 그와 더불어 아메리칸 드림의 악몽을 좀더 깊이 그리고자 했다.

  시실리에서 피살의 위험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비토는 성공의 기회를 잡지만 그것은 살인과 범죄의 대가로 이뤄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은 가족의 안전과 패밀리(조직)의 영화였다. 그러나 그러한 가족의 가치와 사회적 가치는 늘 대립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이클은 이러한 아버지의 뒤를 이으면서 음지에서 양지로, 암흑가의 보스에서 존경받는 기업가로 끊임없는 변신을 꾀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노력은 그를 암흑의 세계로 더 깊숙히 빠져들게 하고 가족과도 멀어지며 마침내 혈육인 형까지도 죽이게 한다.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원죄는, 마이클이 아무리 씻으려 해도 씻을 수 없으며 오히려 더 깊어만 가는 것이다.

  3편에서 마이클은 그 죄의 대가를 가장 처절하게 치른다. 1편과 2편에서 소외돼가는 모습으로만 비치던 마이클이 3편에서는 목숨과도 같은 딸을 잃고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코폴라는 미국적 악몽의 상징인 마이클을 처단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폴라는 미래에 대해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하다. 코를레오네 패밀리는 마이클 이후에도 그가 평생을 걸쳐 소원했던 합법적 기업의 탈을 쓰고서, 한층 더 냉혹한 조카 빈센트에 의해 사업을 계속 확장해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선과 악의 구분은 무엇인가. 미국적 가치의 숭고함은 어디에 있는가. 낙원을 만들고자 했던 이민세대의 꿈과 희망은 처절한 악몽이 되어 후세대에 이어지고 있지만 그 악몽이 깨어질 가능성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코폴라의 미국 묵시록, 이 비극의 대서사시는 그래서 너무나 암울하다.

<필자: 김지석/영화평론가·부산예술전문대학 교수>

 

 

65. <아기레,신의 분노 Aquirre, der Zorn Gottes>(1972) / 감독: 베르너 헤어쪼그

 

  승려 카스파르 데 카라발의 일기형식으로 엮은 스페인의 페루탐험기 <아기레, 신의 분노>는 황금의 이상향 엘 도라도를 찾아가는 정복자들의 이야기다.

  1560년 크리스마스로부터 시작해 뗏목에 탄 모든 스페인 사람들이 죽고 반란을 주도한 돈 로페 아기레만이 남는다. 자신이 "신의 분노"라  외치며 미쳐 날뛰는 마지막 장면에는 원숭이떼만이 온통 뗏목을 뒤덮는다. 진화론과 인류의 종말을 연상시킨다. 아기레의 저주받은 광기 속에서 세계 정복을 꿈꾸던 나치 히틀러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우화가 강력한 메시지로 전해진다.

  2차 대전 뒤 독일 영화는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스웨덴에 비해 뒤떨어진 상업영화만이 판쳤다. 

  1956년 독일의 젊은 영화인들은 '오버하우젠 선언'을 통해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고 외친다. 그리고 곧 의회는 독일 영화 부흥을 위한 지원법안을 통과시킨다. 뮌헨을 중심으로 젊은 영화인들이 영화를 만들고, 70년대에 들어서 독일 영화는 새로워진다. 그 새로운 변모를 영국평론가들이 먼저 발견해 '새로운 독일 영화', 즉 뉴 저먼 시네마라고 했다. 독일 국내에서는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의 '노이에 벨레'라고 했다. 이렇게 독일 영화는 부활했다. 1910년대 말에서 20년대 찬란했던 표현주의의 영광이 70년대에 와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 대표주자의 한 사람이 베르너 헤르초크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독일 영화의 르네상스'라는 커버스토리로 새로운 독일 영화 특집을 마련하며 새로운 독일 영화에는 표현주의의 맥이 보인다고 했다. 헤르초크에게서는 <최후의 인간>의 프리드리히 무르나우의 영향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르초크는 지나간 시대의 표현주의 영화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독일인의 핏속에 흘러내려오는 표현주의적 국민성이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기레, 신의 분노>는 남미의 자연 그리고 급류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정복자들의 모습과 뗏목과 숲 속에서 겪는 권력과 이에 반항하는 아기레의 집요한 대결이 잠시의 숨돌림도 없는 긴장 속에 전개된다. 파스빈더에게서도 그렇지만 새로운 독일 영화에는 유머가 없다.  인디언의 화살이 날아오고 하나씩 죽어가는 뗏목 위에서 혼자 남은 아기레는 외친다.  "나는 신의 분노이다. 멕시코를 코르테스로부터 되찾고, 그리고 우리는 역사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내 딸과 결혼해  함께 순수한 왕국을 건설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대륙을 지배할 것이다. 우리는 참고 견뎌나갈 것이다. 나 말고 다른 누가 있겠는가. 나는 신의 분노이다."  신의 저주받은 정복자를 자처하는 아기레 역의 클라우스 킨스키의 연기가 일품이다. 마치 세계 정복의 망령에 휩싸였던 히틀러와 나치 그리고  모든 독재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헤르초크가 시나리오와 연출을 겸했다. 영화는 카스파르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다가 누가 잉크를 마셔버려 일기는 중단되고 아기레의 독백으로 내레이션이 계속된다. <필자: 안병섭/영화평론가·단국대 교수>

 

 

66. <내슈빌 Nashville>(1975) / 감독: 로버트 앨트먼

 

  <내슈빌>은 70년대 미국영화의 성취를 얘기할 때면 꼭 맨먼저 거론되는 작품이다. 제임스 모나코의 <미국영화는 지금>이란 책의 말미에 실린 68년에서 77년까지의 미국영화 수작 목록을 보면 <내슈빌>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1, 2편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설문에 응한 20여명의 미국 평론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내슈빌>을 추천작 10편 안에 넣었다.

  <내슈빌>은 미국영화가 앞으로도 좀처럼 도달하기 힘들 것 같은, 아주 수선스러우면서도 날카롭기 그지없는 사회 풍자극이다. 미국 컨트리 음악의 총본산인 내슈빌. 이곳에서 열리는 음악제에 참석하기 위해 각지에서 대중음악인들과 구경꾼들이 몰려온다. 유명한 컨트리 가수, 야심에 불타는 무명가수, 포크음악그룹, BBC의 리포터, 정치유세꾼 등 24명의 인물이 등장해 한바탕 떠들썩한 일화들을 꾸린다.

  감독 로버트 앨트먼은 누구 한 사람에게도 초점을 맞추지 않고 집단이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 구조로 2시간 40분을 끌고 간다. 영화 초반에 묘사되는 교통체증 장면부터 장관이다. 공항에서 내슈빌까지 오는 도로가 차로 꽉 막히고 이 사태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앨트먼은 한사람씩 차근차근 소개하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영화의 주인공이다.

  이 영화는 에피소드식 구성으로 돼 있기 때문에 줄거리가 한가닥으로 이어지지 않고 따로따로 노는 듯한 느낌을 준다. 클로즈업이나 반응 숏도 별로 없다. 미디엄 롱 숏이나 풀 숏 위주로 화면을 짠 연출은 어느 등장인물에 특별히 주목을 요하지 않고 그저 전체를 담담히 보게끔 유도한다. 따라서 이런 스타일과 얘기구조에서는 누가 성공하고 누가 사랑을 맺느냐 하는, 극적 장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앨트먼의 연출의도는 효과가 있었다. 음악인과 관객 사이에 오고가는 공감이 감동을 주는 사이에 슬그머니 이 영화의 진짜 주제가 드러난다. 가수들은 사랑과 가족을 노래하지만 그들의 실제모습은 그런 메시지와는 관계가 없다. 망가진 인간관계, 음반업계의 착취로 인해 그들의 사생활은 멍들어 있다. 한번도 화면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스피커를 통해 자주 방송되는 대통령 입후보자의 연설도 같은 맥락에 있다. 앨트먼은 떠들썩한 집단 축제의 끝에서 속빈 강정과 같은 미국 대중문화와 미국인의 허상을 본다. 미국인들을 기만적인 정치와 문화산업의 책략에 장단 맞추는 희생자로 그려내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키스 캐러딘이 불러서 유명해진 노래, <그건 걱정이 안돼(It Don't Worry Me)>도 이 주제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이 영화에 담긴 노래는 모두 출연 배우들이 직접 불렀다). "그건 걱정이 안돼. 그건 걱정이 안돼. 당신은 내가 자유롭지 않다고 말하겠지. 하지만 그건 걱정이 안돼."

  그러나 앨트먼은 걱정이 많았던 것 같다. 내슈빌이라는 마을 자체는 미국을 표상하는 하나의 이미지다. 많은 등장인물과 다층적인  이야기 구조로 앨트먼은 미국 사회의 겉으로 보이지 않는 재앙을 그려낸다. 영화 <내슈빌>이 없었으면 70년대 미국영화역사는 아주 허전할 뻔했다.

<필자: 김영진/영화평론가·씨네21 기자>

 

 

67. <길의 왕 Im Lauf der Zeit>(1976) / 감독: 빔 벤더스

 

  <베를린 천사의 시>로부터 1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빔 벤더스의 초기작 <길의 왕>(원제: 시간의 흐름 속에서)을 만난다.

  로드 무비의 왕이라고도 불리는 이 영화에서 두 남자 브루노 빈터와 로버트 란더는 몰락해가는 동독 접경지대를 여행한다. 젊은 영화관객들에게  이 영화가 특별한 종류의 로드 무비로 남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주인공 브루노 빈터가 영사기 수리기사이며 영화광이라는 점때문이다. 그래서 <길의 왕>은 그 장르의 영화들이 그렇듯 젊은 시절의 고뇌에 관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영화에 관한 영화가 되었다. 1970년대 미국 배급업자들의 횡포로 값싼 포르노를 강매 당하던 시골 극장들의 이야기가 에피소드로 삽입된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영화와 록에 경도되어 자라난 세대의 대변자로서 로버트가 내뱉는 대사, "양키들이 우리의 의식을 식민화했어"가 암시하듯이 미국 문화에 대한 애증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아내와 헤어진 뒤 엘베 강에 차를 처박아 자살하려다가 실패한 로버트는 브루노의 밴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그의 영사기 수리 여행에 동참한다. 둘은 서로에게 기묘한 우정을 느끼면서 여자와는 화해로운 관계를 만들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 이것은 고독하고 금욕적인  영웅이 등장하는 서부 영화의 주인공들과 동일화하면서 여성없는 세계에 머물게 된 영화광의 고백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개인사적 차원을 넘어서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로버트는 여자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브루노를 설득한 뒤 그들이 함께 밤을 지낸 미군용 오두막 문 위에 "모든 것이 변해야만 해" 라는 쪽지를 남기고 떠난다.

  미국 대중문화의 집중적인 세례를 받고 자라난 벤더스는 미국 영화와 록 음악이 자신의 삶의 구명대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어떻게 그 영향에서 벗어나 할리우드 영화와 유럽 영화를 새롭게 결합, 재창조할 것인가가 벤더스의 영화 여정의 이정표였는데 <미국 친구> <파리 텍사스> 등이 바로 그 기착지들이다.

  <길의 왕>에는 미국 문화에 대한 이런 애증어린 성찰뿐만 아니라 독일 사회에 잔존하는 나치즘도 명시하고 있는데 히틀러는 늙은 극장주의 모습으로, 촛대의 장식으로 망령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로버트와 아버지가 만날 때 그 아버지와 교차되는 히틀러 모양의 촛대는 나치 세대인 아버지와 교통할 수 없는 젊은 세대의 딜레마에 대한 암시다.

  할리우드 영화에 대항해 '자전거를 만들 만한 돈으로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만들려고 시도'했던 알렉산더 클루게와 빔 벤더스를 포함한 신독일 영화 감독들의 고민은 사실 오늘날 한국 영화산업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서독은 적극적인 국가지원이 있었고, 그 결과 신독일 영화는 70년대 롤스로이스처럼 서구 영화제와 영화시장을 질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영화감독이 되기 전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독특한 문체를 지닌 영화비평가이기도 했던 벤더스는 짐 모리슨의 노래와 하워드 호크스 그리고 존 포드를 오가며 '순간적인 몰아'의 이미지를 남기는 어떤 순간에 대해 글을 쓰기도 했는데 흔히 '감각주의'라고 불리는 그의 영화세계는 이미 비평가 시절부터 마련되었던 셈이다.

  그는 영화를 이미지가 야기한 감정의 움직임 '(E)motion'이라고 명명하는데, 이것은 문자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미지에 몰입하는 독일 신세대의 감수성으로 영화를 재정의한 것이고 그의 영화가 특히 젊은 관객들을 사로잡는 근거가 된다.

<필자: 김소영/영화평론가·국립 영상원 교수>

 

 

68. <칠레전투 Batalla de Chile>(1975) / 감독: 파트리시오 구즈만

 

  1973년 9월11일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 선거에 의해서 입성한 칠레의 사회주의 민중연합정부의 지도자 살바도르 아옌데가 반동적 쿠데타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비극적 다큐멘터리 <칠레전투, 비무장 민중의 투쟁> 3부작(1975∼79)은 바로 거기서 끝나고,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과 독립, 투쟁과 전투의 진보운동 속에서 칠레는 20세기의 파리 코뮨이었다. 말 그대로  '마르크스가 <프랑스 내란>에서 문제제기하고,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정식화한' 모든 일들이 민중들의 힘에 의해 눈 앞에서 펼쳐졌다. 이것은 책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스펙터클이었다.

  1972년 11월2일 아옌데 정부의 출범과 함께 진보적인 젊은 영화인들은 이 '위대한 사건'을 기록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아무런 영화 현장 경험이 없었으며, 또한 기자재도 부족하였다. 하지만 파트리시오 구즈만(연출), 페데리코 엘론(기획), 호르헤 뮬러(촬영), 베르나르도 멘조(사운드), 호세 피노(조명)는 16㎜ 에클레어 카메라와 나그라 녹음기 한 대, 그리고 코닥 흑백필름만으로 무장하고 '새로운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매일매일의 경이적인  체험과의 만남이었으며, 그들은 작업일지에 '이 영화는 새로운 역사의 첫번째 영화가 될 것'이라고 써넣었다. 대부분의 장면은 롱테이크로 촬영되었으며, 수많은 생산계층의 민중들을 인터뷰했다. 그리고 어두운 조명 때문에 많은 장면들은 자연광 아래서 '생생하게' 찍혀야만 했다.

  그러나 희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옌데 정부는 쿠데타로 무너졌고, 촬영은 중단되었다. 파트리시오 구즈만과 그의 동료들은 필름과 녹음 테이프를  들고 6개월에 걸친 밀반출 끝에 쿠바로 망명했다. 그리고 아옌데 민중정부 아래서의 8개월에 걸친 삶과 희망을 담은 필름은 그로부터 6년에 걸친 편집과정을 통한 후반작업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이 영화는 3부작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래서 제1부 <부르주아지의 봉기>와 제2부 <쿠데타>, 그리고 제3부 <민중의 힘>으로 다시 쓰였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전례없는 정치적 실험과, 사회주의에 대한 제국주의와 매판 부르주아지들의 반동적 폭력에 대한 4시간 30분에 걸친 이 장대한 진술은 영화에 담겨 있는 현실 속에서의 '좋은 세상에 대한 희망'과, 또 한편으로는 비극적으로 끝난 아옌데 정부에의 냉철하고 분석적인 시도가 서로 변증법적으로 보여주고 대답하고, 질문하고 다시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다큐멘터리는 선동적이라기보다는 분석적이며, 예언적이라기보다는 희망적이다. 부르주아 국가의 억압적 기구들의 파괴없이 정말 사회주의에로의 평화적 이행이란 불가능한가? 더 나아가 계급투쟁에서 부르주아지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바꾸는 진정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파트리시오 구즈만과 그의 동료들은 <칠레전투>가 영화에서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과도 같은 의미를 갖기 원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연민과 향수에 찬 아옌데 정부에의 기록을 넘어서서 바로 영화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다시 묻는 망치가 되었다.

  파트리시오 구즈만은 이 영화를 '세계사의 맥락에서 과도기적인 필름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일보전진, 이보후퇴!

<필자: 정성일/영화평론가>

 

 

69.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1976) / 감독: 마틴 스콜세지

 

  1970년대의 미국영화를 베트남전과 떼어내 살피는 것은 불가능하다. 베트남전은 60년대 이래 발전해온  급진적 사회운동, 청년문화, 페미니즘, 흑인 인권 운동, 동성애자들의 투쟁 등을 폭발시키는 뇌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 미국사회는 전면적인 위기에 빠진 듯이 보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이 위기를 더 부추겼다. 지배층은 대처능력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대안적 사회개혁 프로그램이 작동한 것도 아니었다. 미국을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보수와 냉전의 기반이 그만큼 두터웠던 것이다. 그래서 70년대의 미국의 위기는 혁명이 아니라 혼란의 양상을 보였다. 70년대 '새로운 미국영화'는 베트남전을 결코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로 그리는 법이 없다. 그들에게 그 전쟁은 자신들의 혼란을 증폭시킨 계기일 뿐이었다. 문제의식의 초점은 늘 자신들의 붕괴증후군에 모아져 있었다. 우리의 관점에서 <디어 헌터>나 <지옥의 묵시록>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들 또한 

항변의 근거를 가진 셈이다.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는 바로 이 혼란에 관한 혼란스런 영화다. 여기서도 주인공 트래비스 비클(로버트 드 니로)은 베트남에서 귀향한  제대군인으로 등장하지만 그는 베트남 전쟁에 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지만 그 원인을 찾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결단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그도 모른다. 트래비스는 택시를 몰고 뉴욕의 밤거리를 헤매고 다닌다. 의사소통의 단절을 겪고 있으며 몽유병자처럼 현실에 발을 대고 있지 못한 그에게 도시는 형태를 잃고 떠다니는 이미지일 뿐이다. 뉴욕의 뒷골목은 쓰레기로 가득하다. 

  그의 결단은 이 쓰레기들과 연관되어 있다. 물론 이 속에는 창녀, 포주, 마약꾼, 구역질나는 검둥이들, 호모와 레스비언 등의 '인간쓰레기'가 포함된다. 그는 거리를 청소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는 대통령 선거 홍보전을 치르는 베티를 만나지만 그 관계는 '어떤 결단'을 재촉하는 장치이자 허구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거리에서 10대의 창녀 아이리스(조디 포스터)를 만나면서 그는 드디어 어떤 결단을 내린다. 그것은 인간쓰레기들을 피로써 씻어내는 일이다.

  트래비스는 사회의 정상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정신병자이지만 미국영화의 전통 속에서 보자면 도시에 나타난 마을의 청소부, 곧 보안관이다. 이러한 성격 부여는 공포영화와 서부극의 영향을 엿보게 한다. 그가 결단에 이르기까지 내보이는 극심한 도덕적, 정치적 혼란은 이러한 성격화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는 대통령 후보 팰런타인을 암살하려 주변을 맴돌지만 결국은 아이리스의 포주 스폿(하비 케이텔)을 살해하고 만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빠져있던 혼란의 터널에서 벗어나고 도시의 영웅으로  등장하게 되지만 그 의미는 애매하기 짝이 없다. 그는 과연 존재의 혼란에서 벗어난 것일까. 그는 영웅으로 불러 합당한 인물일까. 그는 과연 아이리스를 사랑하기나 한 것일까. <택시 드라이버>는 이러한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미학적 견지에서 진보적이었던 스코시즈와 정치적으로 신파시스트였던 폴 슈레이더의 기묘한 결합은 이 모든 혼란의 근원이다. 초월로서

의 어떤 결단, 영웅주의, 인간쓰레기에 대한 경멸 따위가 슈레이더의 세계라면 뉴욕의 뒷골목, 트래비스의 소외, 존재의 혼란은 스코시즈에 속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영화  막바지에 트래비스가 모호크족의 머리모양을 하고 아파치족을 흉내낸 스폿을 쏘는 장면은 그러한 작가적 모순의 첨예한 돌출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필자: 이정하/영화평론가>

 

 

70. <애니 홀 Annie Hall>(1977) / 감독: 우디 앨런

 

  우디 앨런이 감독·각본·주연을 겸한 <애니 홀>은 프랜시스 코폴라의 <대부>,  로버트 앨트먼의 <내슈빌> 등과 함께 70년대 미국 영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무엇보다도 <애니 홀>은 장르로서의 코미디를 스타일로서의 코미디로 승화시킨 감독의 재능이 십분 발휘된 전환기적 작품으로, 이전의 슬랩스틱 코미디나 시각적인 개그가 주류를  이뤘던 <돈을 갖고 튀어라> <바나나> 등의 초기 작품과는 달리 이후 우디 앨런의 일관된 스타일을 이루는 대사 중심의 개그와 담론이 코미디의 핵심이다.

  우디 앨런은 주로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자전적 정신세계를 프로이트적인 정신분석 코미디에 가까운 영화로 만들어 내곤 했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애니 홀>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평소 뉴욕에 대한 사랑, 쇼 비즈니스 세계에 대한 환멸, 사랑과 죽음, 우울과 강박관념, 가족과의 관계와 여자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심각하게 탐구하고 있다. <애니  홀>의 이야기는 주인공인 앨비 싱어가 사랑하던 여자 애니 홀과 헤어지고 나서 왜 그렇게 되었나를 회상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애니 홀과의 만남, 사랑, 헤어짐, 그리고 그의 가족과 그가 이전에 사귄 여러 여자들의 관계 속에서 앨비의 독특한 성격이 마치 정신분석을 하듯이 보인다. 결국 앨비는 애니 홀과 헤어졌지만 자신이 쓴 희곡에서 허구의 인물을 통해 그와의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만든다.

  앨런의 대부분의 코미디는 주로 고통이나 강박증으로부터 나오는데, 그는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이나 현재의 괴로움, 자신의 열등감 등을 중요한 코믹요소로 승화시켜 항상 웃음 뒤에 페이소스를 느끼도록 만든다. <애니 홀>에서 앨비의 냉소적이고 신경증적이며 탐욕적인 성격은 실제 우디 앨런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한다. 무성영화 코미디언 해럴드 로이드처럼 안경을 쓴 앨비는 앤티히어로로서 현대미국사회의 관찰자, 기록자 노릇을 했던 채플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채플린이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면 앨런은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코미디에 접근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애니 홀>은 무엇보다도 진지한 주제의식과 파격적인 구성, 그리고 신선한 형식미가 돋보이는데, 그것은 앨런이 초기에 많은 영향을 받은 바 있는 필스, 막스 브러더스, 채플린보다는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와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 등에게서 더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주인공의 정신분석에 대한 의존도, 그리고 섹스를 삶의 중요한 모티브로 이용하고 있는 점 등이 프로이트와 관련이 있고, 삶의 의미와 신의 경험, 그리고 사랑과 죽음에 대한 고통스러우면서도 고독한 집착이 지극히 베리만적이다.

  <애니 홀>의 형식은 무척 파격적이어서 어떻게 보면 진부해질 수 있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주 근사하게 보이는데, 알고 보면 그 대부분의 새로운  형식 요소들은 과거의 걸작들에서 응용해 집대성한 것이다. 과거를 현재인물이 방문하는 모습은 베리만의 <산딸기>에서, 주인공이 관객을 향해 말하는 것과 속마음을 자막으로 처리하는 것은 고다르 영화에서, 이중노출에 의해 애니의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는 이미지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술취한 전사>에서, 애니메이션을 사용하는 것은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에서 그 영향을 받아 응용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형식요소들은 대부분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새로운 재해석에 의해 시각화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디 앨런의 특별한 재능은 그 모든 것을 내용과 조화를 이루며 철저히 코미디로 승화시켰다는 점에 있다.

<필자: 이정국/영화감독>

 

 

71. <파드레 파드로네 Padre Padrone>(1977) / 감독: 비토리오 따비아니 & 빠올로 따비아니

 

  타비아니 형제는 로셀리니와 각별한 관계에 있다. 이 형제가 영화를 시작한 것은 로셀리니의  <파이자>(1948)를 보고난 뒤고 이들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파드레 파드로네>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도 로셀리니로부터였다. 또 마르크시스트 영화인이라 불렸던 이들의 작품에서 우리는 로셀리니적인 인물을 만날 수 있는데 다만 유토피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더 강하다는 차이가 있다. 이는 네오리얼리즘의 영향 아래 좀더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를 수용한 타비아니 형제에게는 당연한 결과였다.

  타비아니 형제는 그들의 전작품을 공동연출하는 보기 드문 예를 보여준다. 그것도 거의 작업을 분담하지 않은 채 시나리오, 음악, 촬영, 편집까지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비토리오는 1929년, 파올로는 1931년에 이탈리아 신 미너이토에서 태어난다. 1950년께 피사의 시네클럽을 주도하면서 영화경력을 시작한 이들은 1954년 자바티니와 공동으로 나치즘에 관한 단편영화를 만들고 이후 많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전복자들>(1964)은 이들 형제의 첫 장편영화였고 그 뒤 3,4년마다 한편씩 꾸준하게 수작을 발표해 왔다.  톨스토이의 <신과 인간>을 각색한 <성인 미셸은 수탉을 가졌다>(1971)에서 <알몽장팡>(1975), <카오스>(1984), <굿모닝 바빌로니아>(1987), <밤에도 태양이>(1990)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은 당당한 자존심, 사회적 신분의 변화, 본원으로의 귀환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아버지, 주인>으로 옮길 수 있는 이 작품 <파드레 파드로네>는 양치기에서 대학교수로 성장한 한 사르디니아인의 베스트셀러 자서전을 각색했다. 이야기는 이 영화가 요리하는 삶의 주인공인 사르디니아의 방언학자 가비노에 의해 플래시 백으로 서술된다. 어린 가비노는 주인으로 군림하는 난폭한 아버지에 의해 교실에서 끌려나온  뒤 양치기로 일자무식의 생활을 하다가 군에 들어간다. 군에서 이탈리아 본토의 표준어와 사르디니아 지역의 방언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 방면의 권위자가 되지만 결국 모든 것이 세련된 본토에선 양치기들의 방언이 이데올로기적 불이익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타비아니 형제는 이 영화를 통해 두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사르디니아 섬 양치기들의 원시적인 생활을 그리는 객관적인 세계는 화면으로 직접 전달되는데, 탁월한 카메라 움직임이 양치기들의 삶과 광활한 사르디니아의 대지를 생생하게 훑고 있다. 또 다른 세계는 사운드 몽타주로 전해지는 주관적인 세계다. 타이틀 자막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합창, 영화 도입부에서 가비노가 끌려나간 뒤 들려오는 아이들의 내면의 소리, 그리고 나무와 시냇물 소리, 양치기들의 외침같은 청각적 요소는 그 자체의 독립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갖고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갈등, <아버지, 주인>으로부터의 극복이라는 주제를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 <파드레 파드로네>에서 구사된 타비아니 형제의 연출력은 이후 <굿모닝 바빌로니아>에서 주인공의 사회적 지위와 정신적 고양을 표현하기 위한 수직적인 카메라 움직임을, 그리고 <밤에도 태양이>에선 자기성찰을 위해 은둔과 병상을 택한 주인공을 묵상의 나무로 이끄는 수평적 카메라 움직임과 내면의 갈등을  그리는 주관적 사운드 몽타주를 찾게 된다.

<필자: 조인숙/영화평론가>

 

 

72.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1979) / 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계보에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이름이 없었으면, 그것은 허망한 신기루로 남았을 것이다. 코폴라는 60년대 말 이후 할리우드 영화에  개혁 바람을 일으킨 세대 가운데서 가장 선배축에 속하는 세대이며, 영화과를 졸업한 뒤 누구보다도 먼저 '타락한' 상업영화 체제에서 도전을 시도했던 감독이다. 그리고 그의 70년대는 빛나는 영화적 성취를 거둔 시기였다.

  <대부> 1, 2편으로 비평과 흥행 면에서 모두 대성공을 거둔 코폴라는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암시를 얻은 소품 규모의 문제작 <도청>으로 74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뒤 자신의 영화세계를 중간결산할 작품을 궁리하게 된다. 바로 베트남 전쟁을 다룬 대작 <지옥의 묵시록>이다. 코폴라는 패기만만했지만 영화제작은 숱한 난관을 겪었다. 주연배우의 교체, 미군의 비협조, 촬영지였던 필리핀을 때마침 덮친 태풍 등 결국 이 영화는 79년에 가서야 세상에 공개됐다.

  <지옥의 묵시록>은 잘 알려진대로 조셉 콘라드의 소설 <어둠의 심장>을 베트남 전쟁의 상황에 맞게 각색한 것이다. 원작의 제목처럼 이 영화는 어둠의 심장을 향하고 있다. 영화가 전개될수록 점점 화면의 명도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학살의 쾌감, 죽음과 인접해 있는 게임의 스릴을 만끽하게 하는 초반의 전투장면에서 오감을 자극하는 영화의 시청각적 공명효과는 미치광이 쿠르츠 대령이 등장하는 후반부 장면에서는 공격성을 감춘 인간 광기의 근원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바뀌어간다.

  말론 브랜도가 연기하는 쿠르츠 대령은 코폴라의 주제의식을 집약하고 있다. 그는 바이런의 싯귀를 읊조리면서도 사람의 목을 태연히 따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전쟁으로부터 공포를 느끼지만 동시에 그 전쟁에 매혹당해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베트남전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보편적인 전쟁의 광기로 추상화시킨 결함이 남는 대신, 그 광기를 영화적으로 형상화해 낸 점에 있어서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표한다. 현대의 가장 끔찍한 재난인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인간이 전쟁에 대해 느끼는 공포를 가장 추상적인 형태로 재현해 낸 스펙터클인 것이다.

  코폴라 감독은 괴물같은 사람이다. 미국적 토양에서 그는 좀처럼 보기 드문 예술가다. 동시에 베트남전을 미군들이 즐겼던 일종의 쇼, 로큰롤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다분히 미국적인 감각을 지녔다. 쇼처럼 즐거운 것은 없다. 그러나 예술적인 영화도 만들고 싶다. 그 이중적인 욕망이 충돌하면서 영화사상 가장 심오하고 복잡하지만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베트남전 영화가 만들어졌다.

  코폴라는 훗날 회고했다. "우리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전쟁을 치를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다. 우리의  인원은 너무 많았고, 돈과 장비도 너무 많이 낭비됐고, 조금씩 우리는 미쳐갔다." 마약과 히스테리에 쌓인 베트남 전쟁이라는 쇼처럼 <지옥의 묵시록> 영화 그 자체도, 영화 스태프들도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 <지옥의 묵시록>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레퀴엠이었다.

<필자: 김영진/영화평론가·<씨네21> 기자>

 

 

73. <이레이저 헤드 Eraserhead>(1978) / 감독: 데이비드 린치

 

  1970년대의 가장 흥미진진한 영화현상은 컬트영화의 등장이었다. 심야극장의 영화광들은 <럭키 호러 픽처 쇼>를 계기로 해서 컬트영화 신드롬을 만들어 냈으며, 세상에서 가장 기괴하고 이상한 영화들을 차례로 뒤져나갔다. 그리고 1978년에 드디어 자기 세대의 컬트영화 감독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바로 데이비드 린치이었다.

  미술을 공부하고 애니메이터로 일하던 데이비드 린치는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살려서 장편영화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를 찍었고, 그 결과 초현실주의  회화와 실험영화가 결합한 악몽 그 자체의 영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단숨에 컬트영화의 명단에 올라간 이 영화는 꿈과 현실, 천국과 지옥이 모두 끔찍하게 뒤틀려버린 세상의 풍경을 보여준다. 방전된 것처럼 머리털이 곤두선 헨리는 움직이는 닭요리를 먹고, 운행에 문제가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해초더미가 자라나는 방에서 산다.

  헨리는 강경증(强硬症)에 걸린 여자 매리(그의 할머니는 살아 있는 시체 같고, 아버지는 한쪽 팔이 마비되어 있다)와 결혼하여  기형아를 키우게 된다. 매리의 주변에는 두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창 밖을 바라보는 남자의 세계인데, 그는 헨리에게서 정충처럼 보이는 것을  빼내어 기형아를 만들어낸다. 다른 하나는 라디에이터 속에 살고 있는 소녀의 세계이다. '천국에서는 모든 일이 잘된다'고 노래하는 소녀는 춤을 추면서 정충처럼 보이는 것을 발로 밟아 터뜨려 버린다. 라디에이터를 바라보며 마음의 안식을 얻던 헨리는 아내가 버린 기형아를 가위로 찔러 죽이고, 그 세계로 들어가서 소녀의 품에 안긴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매리라는 이름을 성모 마리아로 생각하고, 기형아의 모습에서 털을 벗겨낸 어린 양을 떠올린다면(매리의 어머니가 헨리에게 매리와 성관계가 있었느냐고 추궁할 때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화상을 입은 남자는 신으로 해석된다. 그는 원자폭탄과 공해에 찌들어 기형아를 만들어내고, 낙태로 무수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세상의 신이며, 침묵으로 일관한다. 폐허 같은 건물들과 썩은 물이 고여있는 거리,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음은 또한 산업사회의 악몽이다(헨리의 직업은 인쇄공이다).

  헨리의 가족은 외디푸스 가족 내부의 컴플렉스를 드러낸다. 끊임없이 울어대며 부모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 아이는 가정의 행복이 곧 불행의 씨앗으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매리는 헨리의 손길을 피하고, 헨리는 매리의 배에서 탯줄 같은 것을 꺼내어 벽에 던진다. 그들의 절망적인 몸짓에는  성관계의 공포와 아버지가 되는 두려움이 들어있다. 그러나 무수한 퍼즐 조각으로 가득찬 수수께끼 같은 영화는 이 모든 해석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데이비드 린치는 <엘리펀트 맨>과 <블루 벨벳>으로 아카데미 영화제의 감독상 후보에 지명되었고, 곧장 제도권으로 진입하였다. 그는 텔레비전 시리즈 <트윈픽스>를 제작하면서 컬트영화의 감수성을 일반 대중에게 확산시켰으며, 칸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받은 <광란의 사랑>으로 그것이 포스트 모던 시대의  작가주의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이레이저 헤드>에서 <광란의 사랑>까지, 데이비드 린치가 걸어간 길은 또한 컬트영화 신드롬의 운명이 되었다.

<필자: 김경욱/영화평론가>

 

 

74.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Die Ehe der Maria Braun>(1979) /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쓰빈더

 

  파스빈더의 영화에선 죽음의 전조와도 같은 이상한 흥분이 발견된다. 폭발을 기다리는 억눌린 광기, 무정부주의적 페시미즘  그리고 데카당스한 탐미적 경향들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를 60년대 이후 독일 반문화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뉴저먼시네마는 사실 그의 존재와 더불어 국제화했고 또 독일화했다. 하지만 1982년 36살의 파스빈더는 과다한 마약복용과 일년에 다섯편에 이르렀던 영화생산으로 때이른 죽음을 맞는다. 실제로 그의 죽음은 뉴저먼시네마에 조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베로니카 보스의 갈망>(1981), <롤라>(1981)와 더불어 3부작인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1979)의 원제는 <우리 부모의 결혼>이다. 영화는 전후 독일 중산층의 성장을 자본주의와 가부장적 착취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마리아(한나 쉬굴라)라는 한 여성의 삶에서 읽어낸다.

  1943년 마리아와 헤르만 브라운의 결혼식은 공습으로 엉망이 된다. 전쟁에 끌려간 헤르만이 러시아에서 실종되자 마리아는 흑인 미군 빌에게 매춘해 삶을 이어나간다. 그 와중에 남편 헤르만이 돌아오고 마리아는 빌을 살해한다. 헤르만이 마리아 대신 감옥에 들어가고 빌에게서 익힌 능숙한 영어 덕분에 마리아는 사업가 오스발트의 경제적, 성적 파트너가 된다. 하지만 마리아는 남편에겐 사랑을, 그리고 오스발트에겐 섹스만을 제공한다고 믿고 자신이 그 관계들을 조절하는 주체라고 생각한다. 마리아의 꿈은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부르주아적 가정을 마련하는 것이지만, 오스발트가 남긴 유언은 그를 뒤흔들어놓는다. 마리아는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실제로 그의 삶은 오스발트와 헤르만의 계약에 의해 설계된 것이었다. 사실 문, 창문 그리고 계단에 의해 계속 프레이밍되는 마리아의 이미지와 급하게 움직이는 카메라는 관객들에게 그의 인식 이전에 이미 그가 

누군가에 의해 프레임화해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마리아가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 부주의하게 켜둔 가스가 폭발해 집은 삽시간에 폐허로 변하고, 그 순간 1954년의 독일과 헝가리의 축구 경기를 중계 중이던 라디오에선 '독일은 세계의 주인'이라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우연성에 지배받는 여주인공을 등장시키는 멜로드라마의 관행을 따르고 있는 이 영화를 그 세계로부터 구출한 것은 전후 독일사에 대한 파스빈더의  역사의식이다. 마리아 브라운이 남편 헤르만과의 관계에서 표현하는 개인적 희생이라는 덕목은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의 저급한 형태이면서 파시즘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영화의 후기, 아데나워에서 헬무트 슈미트에 이르는 수상들의 초상화 몽타주가 음화로 재현되고 이것은 영화 도입부의 히틀러 초상화와 맞물려 역사의 악순환을 지시한다. 이 장면들은 파시즘적인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아래 놓인 마리아 브라운이라는 한 여성의 삶을 멜로드라마의 예정된 해피엔딩이 아닌 비극으로 몰아간 것임을  명시하면서, '독일은 세계의 주인'이라는 공언 또한 파시즘의 연장선상에서 구축된 것임을 시사한다. 실제로 이 영화를 만들기 2년 전에 일어났던 모가디쉬 하이재킹과 슐레이어 납치사건 그리고 바더·마인호프 테러리스트 살해사

건 등은 파스빈더가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을 우회하며 펼쳐보이는 독일  현대사 읽기가 멜로드라마적 과장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신독일  영화의 기수인 파스빈더는 사실 1945년 이후를 신독일사회의 시작이 아니라 옛 독일의 연장으로 간주했던 셈이며, 우파는 물론 좌파로부터도 지지받지 못했던 그의 역사적 페시미즘은 아직도 그 깊이를  짐작하기 힘든 심연으로 동시대 영화 속에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 김소영/영화평론가·국립영상원 교수>

 

 

75. <양철북 Die Blechtrommel>(1979) / 감독: 폴커 슐렌도르프

 

  <양철북>을 본 사람은 누구나 떠올릴 만한 것들이 있다. 어린아이의 장난스런 목소리이지만 반음조 쯤 높여져 신경질적으로 들려오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유리를 깰 수 있는 주인공 아이의 높은 기성, 바다에서 건져올린 말의 머리에서 꾸역꾸역 나오는 뱀장어들, 연민을 느끼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로테스크한 난장이 연기자들.

  자극적인 기억을 남겨준 이 영화의 시작은 동화 같다. 황량하고 드넓은 감자밭에서 촌부가 군감자를 호호 불며 먹고 있다. 한 남자가 경찰을 피해 달려오고 있고 그는 여자의 네겹 치마 속에 피신처를 구한다. 여자는 그를 깔고 앉아 경찰을 따돌려주고 남자는 치마 속에서 바지앞춤을 여미며 나온다. 그렇게 잉태된 이가 주인공 오스카의 엄마다. 오스카는 자신이 태어나게 된 유래를 아주 자랑스럽고 기고만장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영화는 동화처럼 흘러가지는 않는다. 자궁 속에서부터 엄마를 동시에 사랑하는 두 남자중 어떤 이가 자신의 아버지인지를 혼동하면서, 또한 그때부터 너무나 섬뜩한 어른의 눈빛을 한 아이로 오스카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기이해져간다. 아이의 목소리도 이제는 히스테리컬하게 들려온다. 그 아이는 세살이 되던 날 자신의 눈을 통해 보이는 세상의 모습, 특히 합법적인 아버지의 눈을 교묘히 피해 성적 관계를 끈질기게 이어가는 얀 아저씨와 엄마,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방조하는 아버지의 행태에 실망하고는 더이상 자라지 않기로 맹세하고 계단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그는 스물한살이 될 때까지 세살의 크기로 남아있게 된다. 얀 아저씨가 준 양철북을 분신처럼 메고 다니며.   그가 성장을 멈춘 동안 마을에 나치가 등극하고 위세를 떨치고 그리고는 패배한다. 엄마는 얀의 아이를 잉태한 채 자살하고, 아버지는 나치당원이 되고, 얀 아저씨는 폴란드인이란 이유로 나치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오스카가 사랑한 동갑의 마리아는 아버지의 정부가 된다. 또 독일군 위문공연에 나서는 서커스단에서 만난 난장이 여자를 사랑하고 그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리고 패전 뒤에는 아버지로 하여금 나치를 색출하는 소련군 앞에서 자신이 버린 나치 배지를 다시 삼키게 함으로써 죽음으로 밀어넣는다.

  그런 세상에 오스카가 개입하는 것은 양철북을 두드리고 기성을 질러 유리를 깨는 것을 통해서다. 엄마의 간통행위의 절정을 온동네 유리를 깨어가며 망치고, 나치전당대회를 왈츠를 추는 무도장으로 바꾼다. 성적 열정과 정치적 엄숙함은 파괴되고 희화화해 버린다.

  귄터 그라스의 1959년도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독일역사에 대한 일종의 학습이다. 영화는 오스카라는 비정상적인 아이의 시각이라는 우회도로를 통해 이 학습에 이르게  한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인류에 대한 최대의 죄악을 범한 이 역사에 대한 접근을 아주 기이하고 변태적인 것으로 만든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과거 독일을 죽이고 아버지가 남긴 정부와 자신의 아이일지도 모르는 동생, 즉 아버지의 짐을 지고 어딘지 모를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오스카는 어쩌면 독일 전후세대의 자화상이자 새로운 독일영화의 자기선언일지도 모른다.

  폴커 쉴렌도르프가 새로운 독일영화의 대표적 감독들과 공유하는 감성은 바로 이러한 역사에 대한 해석에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벤더스나 파스빈더 또는 헤어초크 등에서 보이는 개성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독일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추구하되 그 원천을 문학작품에서 찾는다. 사회비판적이고 정치적인 소재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이야기는 자극적이되 스타일은 그에 흡족한 것이 못된다. 하지만 <양철북>은 칸에서도 수상하고 아카데미에서도 외국영화상을 수상했으며, 새로운 독일영화 가운데 상업적인 성공까지 거둔 드문 작품이다.

<필자: 주진숙 영화평론가·중앙대 교수>

 

 

76. <성난 황소 Raging Bull>(1980) / 감독: 마틴 스콜세지

 

  <성난 황소>는 마틴 스콜시스와 로버트 드 니로 짝이 만든 흑백 권투영화이자 뉴욕의 뒷골목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통 권투영화는 아니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는 1970년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권투영화 <록키> 시리즈가 보여주는 노동계급 영웅의 성공을 위한 무대나 영웅주의자의 무대로서의 권투 링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콜시스는 권투영화와 전기영화를 결합시켜 관객의 전통적인 기대들을 당황스러울 정도로 뒤집음으로써 할리우드 장르들의 모순들을 두드러지게 하고 그것들을 철저하게 재고찰한다.

  거의 항상 그의 영화의 배경이 되는 뉴욕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분명 걷고 대화하기에 상쾌한 우디 앨런의 뉴욕 거리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그리고 <폐점 후>처럼 <성난 황소>의 뉴욕은 거친 사람들, 복잡한 거리, 끊임없이 이어지는 싸움, 창녀들의 장소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롤랑 바르트의 개념을 빌어온다

면 '뉴욕적임'으로써 도시 그 자체와 거의 관계가 없고 오히려 거기 사는 많은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뉴욕에 대한  공유된 이미지이며 집단적인 기표이다. <성난 황소>의 뉴욕은 한때 미들급 챔피언이었던 제이크 라모타의 힘의 반영이며 혼란스러운 폭력의 장소이다.

  폭력은 미국영화에서 널리 사용되며 종종 오락의 기본 토대가 된다. <성난 황소>는 난폭한 권투시합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또한  가혹한 싸움들로 폭력을 전경화한다. 하지만 그폭력은 매력적이면서도 혼란스럽게 묘사되고 있다. 오히려 서사구조나 사실주의의 양식적 관습의 사용과 주인공 라 모타의 마음의 풍경으로서의 표현주의적 현실을  통해 링 위에서나 가정 모두에 걸쳐 있는 미국생활에 있어서의 폭력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주로 제이크 라 모타의 실제 삶에 기초하고 있는 이 영화는 제이크의 삶을 지배하는 폭력의 상징으로서 권투시합장면을 사용한다. 그는 권투시합이 없을 때도 말다툼, 협박, 구타 등이 아니면 어느 누구와도 교제할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특히 두번의 결혼생활, 사실상 매니저 역할을 하는 동생 조이와의 관계에서 보이는 질투와 폭력은 타인들에게 상처를 주는 동시에 그 자신에게도 파멸만을 안겨 준다. 이런 행위들은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을 몰아내고 마침내는 비만한 몸으로 마이크 앞에서 관객을 웃기는 삼류 배우로 전락한 그가 행사하는 자학적 폭력으로 귀결된다. 이 영화에서 '오락'은 폭력 못지않은 처벌이고 희생이다. 그것은 고통을 주고받기 위해 사용하는 육체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출구이며 상처를 입히기 위한 사적인 욕구를 공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다.

  영화 마지막 부분의 "한때 눈이 멀었지만 지금은 볼 수 있다"는 성경 인용구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제이크는 비판받을 인물이긴 하지만 동정어린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다.

  젊은 제이크 라 모타와 늙은 제이크 라 모타, 긴장된 챔피언으로서의 제이크와 몰락한 삼류배우로서의 제이크는 모두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에 기대고 있다. 그것은 단순하거나 편안한 성격을 창조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이해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인물의 슈도(의사·疑似)마조히즘에 대한 심리연구로서 탁월한 의미를 가진다.

<필자: 변재란/영화평론가>

 

 

77. <메피스토 Mephisto>(1980) / 감독: 이슈트반 자보

 

  자보 이슈트반(1938∼)은 1956년 반소봉기 이후 탄생한 새로운 헝가리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그는 당시 동서 유럽을 휩쓸던 모더니즘과 작가주의에 크게 영향받았다.

  단편시대를 거쳐 1961년 <백일몽의 시대>로 장편영화 감독이 된 자보의 초기 영화들은 명백히 트뤼포와 고다르를 반영하고 있으며 레네의 시간에 대한 실험을 적극 수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영화는 <부다페스트 이야기>(1976)를  기점으로 커다란 전환을 이룬다. 이때까지  시간, 몽타주, 현실과 환상에 대한 파격적  형식실험에 치우쳤다면, <신뢰>(1979) 이후의 영화는 리얼리즘 양식을 주된 서사구조로 채택하고 있다. 그는 늘 시대의 전형으로서의 개인에 초점을 두는데 초기 영화가 비극적 상황조차도 낙관의 시선으로 감싸고 있다면, 후기의 그는 시대의 희생이 된 인물들의 비극적 파멸에 동정어린 눈길을 보낸다. 서독과 합작한 <메피스토>(1980)는 자보의 후기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서방의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이다.

  클라우스 만이 1936년에 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브레히트의 혁명적 연극에서  출발해 나치즘의 선전원으로 전락하는 한 극예술가의 반생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회프겐의 모델은 독일 현대연극사의 한쪽을 차지하는 구스타프 그륀트겐즈(1899∼1963)다. 함부르크 지젤 극단에서 연기경력을  쌓기 시작해 나치 아래서 베를린 국립극장장을 지낸 그륀트겐즈는 1932년 상연된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텔레스 역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프리츠 랑의 <M>에서 지하세계의 음흉한 두목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사실 토마스 만의 아들인 클라우스 만이 소설 <메피스토>를 썼던 것은 구스타프 그륀트겐즈의 죄악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사적 감정이 개입돼 있었다. 그의 여동생 에리카 만이 바로 20년대 그륀트겐즈의 동료이자 애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보는 그를 매도하지는 않는다. 그는 회프겐이라는 인물에 내재된 욕망과 결핍과 두려움 따위를 복합적인 관점에서 조명한다. 회프겐은 출세를 위해 베를린 극장장의 딸과 결혼하고 나치 장군의 애인에게 접근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부를 해외로 도피시키고, 동료를 밀고하면서도 반나치 활동으로 체포당한 친구 오토의 석방을 탄원하기도 하며, 나치에 협력하면 할수록 무대에 더욱 광적으로 몰두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자보는 그를 연민한다. 이 점은 끝 장면에서 분명해진다. 회프겐은 사방에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경기장에 서 있다. 그는 후원자인 괴링 장군의 커다란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를 뒤쫓는 스포트라이트를 피해 달아나며 중얼거린다.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 난 단지 배우일 뿐인데…." 자보에 따르면 회프겐은 끝없이  스포트라이트(출세, 갈채, 명성)만 동경했다. 그는 그것에 모든 것을 종속시켰지만 결국 바로 그것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는 물론 예술적 지성을 결여한 인물이며 천박한 인격의 소유자다. 하지만 자보는 그가 특수한 개인이 아니라 시대 속에 놓인 보편적 개인이라고 말한다. 이 인물상은 <레들 대령>으로 계승되지만 <레들 대령>과 비교하면 자보의 관점은 분열돼 있다.

  자보는 연대기적 내러티브를 따르면서도 외적 상황은 리얼리즘으로, 내면세계는 표현주의적 미장센으로 잡아내고 있다. 전자가 교훈극을 낳는다면 후자는 비극을 예고한다. 자보가 화려한 기법으로 부각한 회프겐(클라우스 마리아 브란다우어)의 자기도취적 무대연기는 <천국의 아이들>의 장 루이 바로처럼 관객을 흡인해 버린다. 비극이 너무 생생해지면서 교훈극을 상투적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영화는 2차 대전 이전의 상황에서 끝나지만 그륀트겐즈는 전후에도 계속 활동했다. 그는 뒤셀도르프와 함부르크 시립극장장을 지내며 뒤렌마트, 오즈번 등의 현대극을 연출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파우스트>를 올렸는지는 알 수 없다. 자보의 해석대로라면 그는 결코 메피스토텔레스를 다시 맡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자: 이정하/영화평론가>

 

 

78. <욜 Yol>(1982) / 감독: 일마즈 귀니

 

  일마즈 귀니의 삶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지난했다. 터키의 군사정권 아래서 불온서적을 발표한 죄로, 수배학생을 은닉한 죄로, 그리고 반공주의자 판사를 저격 살해한 혐의로 그는 10년 이상을 감옥에서 보냈다. 60년 첫번째 감옥행은 그의 배우생활의 시작을 갉아 버렸고, 70년대  초 두번째 감옥행은 연출가로서 한창 활동하는 그를 옭아매었다. 그리고 곧이은 18년 형을 받은 세번째 감옥행은 그로 하여금 감독으로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게 했다. 감옥에서 지속적으로 시나리오를 집필하고는 조연출 혹은 다른 이를 통해 연출하게 하는 작업을 계속한 것이다. 80년 군사정부가 그의 작품을 상영금지시키고 영화작업이 불가능해지자 그는 감옥을 탈출해 스위스로 망명했다. 그리고  <벽>(82년)을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고 47살의 나이에 84년 암으로 숨졌다.

  <욜>도 그가 감옥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세리프 괴렌을 내세워 원격조정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망명지 스위스에서 그가 직접 편집한 이 영화에 82년 칸의 대상이 주어진 것은 어쩌면 작품 자체보다는 귀니가 생명을 건 영화에 대한 열정 혹은 정치적 폭력과 억압에 맞선 영화의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실제로 귀니가 장기간 수감됐던 감옥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모범수로 일주일의 휴가를 받은 다섯명의 인물에 초점을 두어 터키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고대하던 고향길이었지만 귀휴증을 잃어버려 다시 구치소에, 그것도 그가 있던 곳보다 더욱 자유가 억제된 공간에 갇히는 인물, 짧은 휴가 동안 친척들의 집요한 감시 아래서만 약혼녀와 데이트할 수밖에 없는 청년, 처남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로 처와 자식들을 처가에서 내주지 않아 결국은 함께 도망치나 처가로부터 죽음을 당하는 남자, 쿠르트족이란 이유로 밤이면 총성이 그치지 않는 고향에서 형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인물, 그리고 자신이 없는 동안 간통한 죄로 사슬에 묶인 채 살고 있는 아내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스스로 단죄해야 하는 인물 등이 그들이다.

  이들을 통해 본 터키의 현실은 너무도 암담하고 희망없고 처연하기까지 하다. 군인들은 총을 들고 차에 탄 남자들을 수색하고 신분증을  확인하며 민중들은 당연한 듯이 명령에 따른다. 기차 안 화장실에서 부부 사이의 성적 욕구를 해소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승객들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부부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하다. 자신이 단죄해야 할 아내가 오히려 지쳐 죽기를 바라며 허허로운 눈밭을 아들과 함께 걸어가는 사내의 모습도 있다. 또한 가족의 몰살을 피하기 위해 형의 주검을 보고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는, 그리고 형수에게 관습에 따라 형수의 남편이 됐다고 형의 죽음을 말하는 인물도 있다.

  이들을 억압하는 것은 현대 터키 속에 남아있는 봉건과 전통과 관습 그리고 군사정권이며 그  억압에서 자유로운 개인이란 영화 어디에도 없다. 아니 자유란 것은 이 터키라는 곳에 부재하는 단어로 보인다. 영화에는 어떤 영웅도 없으며 운명에 순응하는 무기력한 민중들만 있다. 여자들 또한 전통과 관습 그리고 남성의 명분을 위해 존재하는 듯 그저 수동적이다. 영화는 그저 그들을 보여주고 그들의 상황을 묘사한다. 그들의 조건은 정치적 목표의 좌절이나 절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자들과의 관계나 소수인종의 상황에서 인물들의 역정이 기인한다.

  이런 점에서 <욜>은 네오레알리슴의 새로운 작품 같기도 하다. 인물의 성격보다는 상황의 불가피함이 극을 이끌고, 그에 대한 비판보다는 묘사로 그치면서 열려진 결말로 이끄는 점이 특히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가까운 과거를 엿본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영화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직접적인 묘사는커녕 매춘의 영화를 만들던 시절을 부끄럽게 한다.

<필자: 주진숙/영화평론가·중앙대 교수>

 

 

79.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1982) / 감독: 리들리 스콧

 

  1982년,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E·T>와 동시에 개봉돼 흥행경쟁을 벌이다가 일주일 만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관객들은 현실도피적인 <E·T>의 유토피아를 어둡고 비관적인 <블레이드 러너>의 디스토피아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 이 영화를 '저주받은 걸작'의 명단에 올려놓은 이들은 컬트영화광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이 영화는 공간의 혼성모방(pastiche)과 시간의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으로 특징되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징후를 보여주는 일종의 교과서였다.

  2019년, 3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검은 비가 내리는 로스앤젤레스의 이미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혼성모방으로 채워져 있다. 세계 도처에서 이주해온  다양한 인종들, 코카콜라와 일본 여자의 광고판, 용의 형상을 한 네온사인, 그리스·로마 시대와 바로크 시대의 건물, 마천루 위에 자리잡은 고대 이집트의 피라밋, 로스앤젤레스는 또한 후기산업사회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햇빛이 없는 지상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과 지상에서 벗어나 맑은 공기를 마시는 부르주아들, 편리한 문명의 이기 옆에 널려 있는 쓰레기,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주의는 모든 것을 소모하고 황폐화시켜버린다. 25살에 늙은이가 되어버린 세바스티안은 발전의 속도가 가속화해 시간과 공간의 압축현상이 일어나는 후기 산업사회와 닮아 있다.

  복제인간 레플리컨트의 시간은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 시간의 연속성을 경험할 수 없고, 따라서 '나'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없는 레플리컨트의 상태는 정신분열증이며, 그들은 자신의 기원을 찾아 지구로 온다. 과거의 기억과 역사를 증명해 주는 가장 중요한 단서는 사진과 어머니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라는 슬로건으로 만들어진 레플리컨트는 진짜와 가짜, 현실과 상상, 원본과 카피의 구분이 없어지는 단계로 진입하는데,  이것은 장 보드리야르의 모조품(simulacra)과 원본 없는 복제(simulation)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해석에 성서에 대한 패러디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더하면, <블레이드 러너>는 더욱 복잡한 텍스트가 된다. '자본가이자 과학자인  타이렐이 레플리컨트를 만들고 4년의 수명을 주었다'는 내러티브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일정한 수명을 주었다'는 메타 내러티브로부터 온 것이다. 레플리컨트 로이는 아버지 타이렐을 찾아서 수명을 연장해 달라고 요구한다. '섭리는 변경될 수 없는 것'이라는 대답에, 로이는 타이렐의 눈(오이디푸스처럼)을 찔러 죽인다. 로이는 레플리컨트를 제거하는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를 살려주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이미지로 죽어간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복제인간은 '인간은 무엇이며,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라는 르네상스 이후부터 계속된 논의를 확신에서 의문으로 바꾸어 놓는다.

  1992년, <블레이드 러너>는 감독판으로 다시 개봉되었다. 1982년판과의 차이는 데커드를 레플리컨트라고 암시하는 부분이다. 그 결과, 낯선 공간에  타자를 던져 놓고 그들이 악전고투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그려온 리들리 스콧의 영화계보에 따라서, 영화를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더 많아졌다. 타자  레플리컨트가 낯선 공간 지구에 찾아와서 패배하는 이야기로 영화를 읽는 것은 포스트 식민주의를 논의하는 1990년대에 더욱 적합한 해석처럼 보인다.

<필자: 김경욱/영화평론가>

 

 

80. <향수 Sacrifice>(1983) /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고향이나 조국을 떠난 예술가는 어떤 삶을 살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은 특히 러시아인들에게 있어 좀 유별나 보인다. <향수>에서 보이는 러시아 예술가의 향수병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기까지 처절하며 또 전혀 변함이 없다. 18세기에 실존했던 러시아의 음악가 파벨 소스노프스키는 농노의 신분으로 지주의 후원을 받아 이탈리아에 음악유학까지 떠나지만 향수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귀향한 뒤 술에 절어 살다가 결국 자살하고 만다. 이 소스노프스키의 발자취를 따르던 소련의 시인 고르차코프는 낯선 이탈리아 땅에서 고향과 고향에 두고 온 아내, 자식들을 끊임없이 떠올린다. 여기까지가 영화 속의 과거와 현재다. 그렇다면 미래는? 바로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삶이다. <향수>를 만든 직후 서방세계로 망명한 그는 이후 <희생>을 만든 뒤 암으로 사망하고 만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소스노프스키), 현재의 영화속 현실(고르차코프), 미래의 현실(타르코프스키)이 모두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즉, 소스노프스키가 곧 고르차코프이며, 고르차코프가 또한 타르코프스키이다.

  영화란 `관찰'이라는, 평범하지만 잊혀졌던 진리를 깨우치며 인간의 근원적 고독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타르코프스키는 <향수>에서 시간을 자신의 영화 속에 가두고 공간을 재구성한다. 그래서 결코 어떤 상징적 의미로도 해석되기를 거부했던, 그의 영화 속의 미장센은 가장 강렬한 영상언어이자 동시에 `타르코프스키풍의 영화'(Tarkovskian film)를 규정하는 절대 요인이 된다. <향수>에서는 물과 물로 상징되는 `향수'와 `희생'의 의미화가 두드러진다.  타르코프스키의 뇌리 속에 고향은 비가 자주 구성지게 내리는 곳으로 각인돼 있다. 그래서 <향수>에서도 비나 물은 고르차코프의 향수를 일깨우는 중요 모티브로 기능한다. 그런데, 이 물은 불과 만나면서 인간의 이기주의를 꾸짖는 고귀한 희생정신의 모티브로 발전한다. 고르차코프가 투스카나 언덕에서 만난 광인(그리고 성인인) 도메니코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로마의 광장에서 스스로를 불사르며, 이 

순간 고르차코프는 도메니코와 약속한 대로 말라버린 야외온천탕에서 촛불을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나른다. 그리고 영화는 이탈리아식 성당에 둘러싸인 러시아의 농가(집 앞에 조그만 웅덩이가 있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것은 고르차코프/타르코프스키가 타국에서 느끼는 향수임과 동시에  고르차코프와 도메니코의 연대의식을 의미한다. 이처럼 불로 상징되는 `회생'과 `구원의식'은 그의 다음 작품이자 유작인 <희생>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고르차코프와 도메니코의 연대는 비범한 첫 만남에서부터 비롯되는데 고르차코프가 도메니코의 집안에 처음 들어설 때 물이 고여있는 빈 창고 같은 공간에서 그는 갑자기 고향의 산하를 본다. 이 독창적인 공간구성방식은 `시간의 개인적 흐름'과 일상적 삶에서 비롯된 꿈과 환상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데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즉, 그의 공간구성은 그의 영화 속에서 언제나 중요한 배경이 되는 자연, 그 자체의 거대한 세계와 타르코

프스키 자신의 가슴과 머리 속에 각인돼 있는 기억과 환상의 공간이 혼합되는 독특한 세계인 것이다.

  영화사상 이렇게 독특한 시공간을 보여준 감독은 없었다. 이러한 그의 영화세계는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못했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그의 영향을 받은 다른 감독들의 작품에 의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덴마크의 라스 폰 트리에, 뉴질랜드의 빈센트 워드, 영국의 마이클 래드퍼드, 그리고 러시아의 콘스탄틴 로푸샨스키,  알렉산드로 카이다노프스키, 알렉산드로 소쿠로프에서 한국의 배용균에 이르기까지 80년대 이후의 세계영화를 이끄는 주요 감독들의 면면을 보면 타르코프스키는 분명 80년대 이후 새로운 영화의 스승으로 기록될 것이다.

<필자: 김지석/부산예술대 교수·영화학>

 

 

81. <황토지 黃土地>(1984) / 감독: 첸 카이거

 

  <황토지>는 현대 중국영화의 분기점을 이루는 '시대의 영화'이다. 1930년대부터 문화혁명 직전까지 중국 영화계의 지도적 존재였던 문예활동가 시아옌은  문혁기의 영화에 대해 한마디로 '무'라고 표현했다. 중국영화가 문혁의 상처에서 벗어나 정상적 궤도에 진입한 것은 1978년 무렵이다. 이 때의 흐름은  숱한 정치투쟁의 상처와 회한을 고발한 감상적인 상흔영화들이 주도하였다. 셰친의 <천운산 이야기>가 대표작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 쪽에서는 "셰친의 영화를 타도하자"는 외침이 나오고 있었다. 그 주인공들인 첸카이거와 장이모는 1978년 다시 문을 연 베이징 영화학교의 셰친의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셰친은 진정 새로운 중국영화의 탄생을 위한 변증법적 부정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황토지>는 그들의 슬로건이 치기가 아니었음을 입증해 주었다. 1984년 로카르노 영화제와 이듬해 홍콩영화제에서 <황토지>를 본 사람들은 그 압도적인 땅의 구도 앞에서 경악했다. 그것은 중국영화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지금 중국의 제5세대 영화라고 부르는 것이 탄생했다. 열서너살에 문혁을 만나 난폭한 홍위병이 되었던 세대, 이윽고 믿었던 혁명에서 배반당한 채 도시에서 농촌으로 하방되었던 세대, 그러나 온몸으로 중국의 현실을 체험했던 세대, 그럼으로써 혹독한 현실체험을 통해 강인한 생명력을 획득한 세대가 그들이다. 아버지를 고발했던 홍위병이었던 첸카이거가 <황토지>를 만들기까지의 역정은 인생의 장정으로 표현할만한 드라마로 차 있다.

  그렇지만 정작 <황토지>에는 그러한 드라마가 없다. 1930년대 항일전 시기 황하 주변의 고원 지대를 무대로, 민요채집을 위해 온 팔로군  병사와 전통적 농민 소녀의 교차점을 그린 이 영화는 전통적인 사회주의 중국영화의 경계를 박차고 나가버렸던 것이다. 병사는 와서 얼마간을 머물고 떠난다. 소녀는 병사에게 옌안의 해방된 생활 이야기를 듣지만 곧 돈에 팔려 시집을 간다. 병사가 다시 왔을 때 소녀는 떠나고 없다. 그는 소녀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그것을 현실화시켜 주지는 못했다. 소녀는 시집살이를 견디다못해 옌안으로 도망가기 위해 강을 건넌다. 그러나 첸카이거는 소녀가 무사히 강을 건넜는지 빠져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팔로군 병사가 마을을 떠날 때, 소녀는 자신도 옌안으로 데려가 달라고 한다. 병사는 군에는 규율이 있으며 자신은 규율에 따라 허락을 받은 다음 다시 소녀를 데리러 오겠다고 말한다. 소녀는 이렇게 되묻는다. 그 규율을 바꿀 수 없느냐고. <황토지>는 전통적인 사회주의 중국영화의 미학과 내용의 두 측면에서 바로 이 규율을 바꾸려 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점은 형식적 측면에서 탁월하게 표현되었다. 첸카이거와 촬영기사 장이모는 전통적 농민의 삶과 인민해방군의  접점, 민족해방과 여성해방의 모순을 광대하고 원근감이 깊은 화폭, 지루하리만치 호흡이 긴 화면, 토속 민요가 어우러진 강렬하고 독특한 시적 방법으로 담아내었다. <황토지>는 온갖 종류의 모호함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첸카이거는 그것이 현실의 모습이며 인간의 삶이며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주체적 선택의 문제가 남는다는 답변을 내놓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무책임하고 지식인적이라기보다는 민중의 생명력에 대한 체험적 믿음에 기반한 것이었다.

<필자: 이정하/영화평론가>

 

 

82. <천국보다 낯선 Stranger Than Paradise>(1984) / 감독: 짐 자무쉬

 

  헝가리 아가씨 에바가 뉴욕에 사는 건달 친척 윌리의 집에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되는 <천국보다 낯선>은 착상이 도전적이다. 이 영화에 담긴 미국 사회의 풍경은 아메리칸 드림, 모든 것이 넘쳐나는 풍요의 천국과는 거리가 멀다. 이 흑백 장편영화는 삭막하고 스산하기조차 한 미국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 영화로 청년 감독 짐 자무쉬는 84년의 칸 영화제 신인감독상과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 표범상을 받았다. 그는 단숨에 뉴욕 독립영화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천국보다 낯선>은 미국영화지만 사실 미국영화라기보다는 미국을 배경으로 한 유럽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 화면이 한 장면을 이루는 길게 찍기, 시선의 비상한 집중을 요구하는 고정된 카메라 스타일, 서로 진정한 의사소통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관계, 여기저기 떠돌지만 정신적으로 건조한 삶의 조건, 긴 페이드 아웃의 화면전환이 주는 형식의 단절감 등은 무엇보다 대리만족을 주는 이야기체 영화를 중시했던 미국영화의 전통과는 별로 상관없다.

  자무쉬는 빔 벤더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로베르 브레송 등의 유럽 영화감독과 일본 영화의 대가 오주 야스지로 등의 영화로부터 영감을 빌려와 황폐한 미국 생활의 이미지를 재구성했다. 영화 표현의 뿌리를 여러 혈통에서 빌려온 셈이다. 그래서 곧잘 '포스트모던'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나 자무쉬 영화의 새로움은 유럽영화에서는 이미 상투화한 진술을 미국의 상황으로 옮겨놓은 낯설음에서 온다. 예를 들면 에바와 에바의 사촌 오빠 윌리가 식탁에서 TV 디너에 관해 대화하는 장면같은 것이다. "티브이 디너 안먹을래?" "안먹어, 배 고프지 않아." "왜 티브이 디너라고 부르지?" "그냥... 티브이를 보면서 먹으니까... 텔레비전말이야." "텔레비전이 뭔지는 나도 알아." "그 고기는 어디서 난거야?" "뭐?" "그 고기는 어디서 난거야?" "쇠고기지 뭐." "쇠고기야? 고기같이 보이지 않는데." "휴... 상관하지마. 어쨌든 여기선 이런 걸 먹는다구. 고기, 야채, 디저트, 그리고 설거지할 필요도 없어." 이런 식의 반복된 대화의 연속과 단조로운 양식은 황폐한 미국생활을 암시하는 놀라운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자무쉬는 원래 이 영화의 1부인 <신세계>를 단편영화로 발표했었다. 영화가 평판이 좋자 자무쉬는 두 단락을 더 붙여서 장편영화로 공개했다.

  그러나 1부 '신세계'에 이어 추가된 '일년 후'와 '천국'은 1부의 부연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뉴욕에서 클리블랜드와 플로리다로 옮겨 다닌다. 이 여정은 야만의 땅에 문명을 심으며 서부영화의 주인공들이 걷던 신화적인 여정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장소이동 모티브에는 더 이상 상징적인 의미가 없다. 클리블랜드로 가는 차 안에서 주인공들은 어딜 가나 다 똑같다고 중얼거린다. 어디나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저 천국보다 낯선 곳일 뿐이다.

  자무쉬는 그러나 <천국보다 낯선> 이후에 만든 영화들에서 <천국보다 낯선>의 신선함에 맞먹는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형식이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는 종래의 미국적인 이미지를 뒤집는데 꾸준한 관심을 보여 왔다. 재미있는 것은 이 관심이 모방과 짜집기와 재구성이라는 80년대 이후의 양식적 경향 속에서 추구된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아주 미국적인 감독이다.

<필자: 김영진/영화평론가·<씨네21> 기자>

 

 

83. <마기노 마을의 이야기>(1985) / 감독: 오가와 신스케

 

  영화가 민중의 삶 깊숙이 침투하여, 일상을 함께 하고 희망과 미래, 그리고 투쟁의 현실을 화면 가득 담아내는 그런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처음 발견해낸 사람은 누구일까?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영화 1백년의 역사 속에서 우린 그 전형적인 인물들을 가끔 만날 수 있다.  <날으는 네덜란드인> 요리스 이벤스는 카메라와 한몸이 돼 세상을 대상으로 이를 실천했고, 장 뤼크 고다르는 그 이론을 발명했다. 그리고 이들과 지구 반대편에 살던 한 동양인이 이들의 양분을 섭취하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오가와 신스케. 수은중독에 의한 대표적인 공해병 미나마타 병에 관한 다큐멘터리 연작을 20여년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 유명한 노리아키 스치모토  감독과 함께 70년대 일본 다큐멘터리영화를 이끈 오가와 신스케 감독은 흔히 일본농민의 영화동지라 불린다. 

  70년대 일본 다큐멘터리영화의 부흥과 성장은 60년대 이후 일본 좌파운동의 성장과 그 맥을 같이한다. 오가와 신스케 감독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1969년 통신대학생들의  대학 자주화투쟁에 관한 기록영화 <청년의 바다>,그리고 학생운동권 지도부의 1년간의 투쟁과 패배를 기록한 <압살의 숲>을 통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1967년 오가와  감독에게 새로운 소식이 전해진다. 도쿄 근처의 조용한 농촌인 나리타에 새 공항을 세운다는 정부의 방침을 그 지역 농민들이 반대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새로운 투쟁이 진행중인 나리타로 자신의 무기인 카메라를 들고 간 오가와 감독은 투쟁하는 농민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흔히 오가와 감독의 대표작이며 <산리주카 7부작>이라고 불리는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 투쟁의 기록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1968년에 시작해 1977년에 시리즈를 완성한 오가와 감독은 그 마지막편이라 할 수 있는 <헤타부락>편에서 자신의 고민을 더

욱 심화시킨다. "이제 투쟁이 있는 곳에 카메라가 가는 것만이 올바른 방법은 아니다. 일상속에 카메라가 침투해 함께 시간을 기록해야 한다." 오가와 감독은 투쟁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보며 왜 그들이 농사짓는 것을 사랑하며, 자연의 섭리를 중요시하고 있는지를 고민하게 됐다. 1977년 오가와 신스케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농촌으로 가자'. 조감독 한명에게 그때까지도 끝나지 않은 나리타 투쟁에 관한 지속적인 작품을 만들 것을 지시하고 오가와 신스케 감독은 야마가타 지역의 마기노라는 마을로 가 집을  짓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영화 100년의 역사속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영화 <천년을 새기는 해시계 - 마기노 마을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마기노 마을의 이야기>는 오가와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나는 오가와 감독입니다. 이곳은 마기노 마을이고 우린 이곳에서 살면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화면 가득 논이 보인다. 해가 뜨고 벼가 자란다. 오가와 감독은 농민의 삶속에 자연과 과학이 함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농민을 사랑했고, 스스로가 농민이기를 원했고, 그래서 벼가 자라는 그 과정도 중요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는 과학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벼가 자라는 과정을 현미경 카메라와 저속촬영으로 기록해낸다. 그의 영원한 동지였던 촬영감독 다무라는 1년간 같은 장소에서 저속촬영으로 벼가 자라는 과정을 매일 15분 간격으로 촬영해낸다. 농사를 짓고 자연과 싸우며 벼를 생산해내는 노동의 시간과 공간을 기록한 영화 <마기노 마을의 이야기>는 영화를 하는 사람들에겐 민중의 일상 속에 영화가 어느정도까지 침투할 수 있는가를, 그리고  관객에겐 농민의 생산하는 시선을 일깨

워 준다. "나에게 있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일본의 농민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를 쓰는 것입니다." 오가와 감독의 말이다.

<필자: 변영주/영화감독>

 

 

84. <녹색광선 Le Rayon Vert>(1986) / 감독: 에릭 로메르

 

  이 영화에선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중년의 여자도, 그리고 주인공인 20대 여성 델핀도 녹색광선에 대해 말하고 생각한다. 태양의 적광이 수평선 아래로 잠기면 하늘과 바다에 잠깐 녹색 띠가 둘러지는데 이 녹색광선이 빚어내는 순간은 부지불식간에 삶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 된다. 물론 이 녹색광선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삶에서 그리 많지 않다.

  그 진실의 아름다움과 만나기 위해 델핀은 긴 바캉스 동안 해변을 따라 우울한 소요를  거듭한다. 하지만 에릭 로메르의 다른 영화들이 그렇듯 <녹색광선>에는 그 어떤 과잉이 없다. 델핀의 우울은 정신병에 걸리지 않을 만큼의 무게이고 마지막 진실을 확인하는 순간도 드라마틱하지 않다. 삶의 표면을 이야기하다가도 얼핏 그 심층을 한번 돌아보게 하고 또 불확정적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 사건을 만든 필연적 계기들을 영화 속 인물들의 정서와 감정에서 찾도록 하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들은 '문학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실 그의 배우들은 문어체의 말을 많이 하며 또 철학개론이나 문학개론 시간 외에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내용의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게다가 영화 속에선 주로 문학작품들이나 철학책들이 언급된다. <녹색광선> 역시 랭보의 시로 시작해 쥘 베른을 거쳐가며, 델핀은 소설을 읽다가 마침내 자신의 꿈의 연인을 만난다. 한 평자는 그의 영화들에서 프루스트와 파스칼, 발자크, 헨리 제임스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문학적인 것만큼 또 영화적이다. 빛의 움직임, 특히 일광과 석양을 인물의 심상에 맞추어 잡아내는 솜씨나, 배우들의 감탄할 만한 즉흥 연기 그리고 프랑스 도시들과 해안 지방의 풍광을 풍요롭게 활용하는 것 등은 분명 문학적인 경지를 넘어선다. 또한 그의 영화는 무거운 듯하면서도 가볍고, 속물적인 듯하면서도 질박해서 주인공들의 지적 허영은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일상의 지혜를 이기지 못한다.

  에릭 로메르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로 시작해 흔히  '도덕 이야기'로 묶이는 여섯편의  영화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1969),  <클레르의 무릎>(1970), <오후의  클로에>(1972)의 사이클이 끝난 뒤 클라이스트의 소설과 중세에 쓰여진 글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후 로메르는 1980년 <비행사의 아내>라는 영화로 '코미디와 격언' 시리즈를 시작하는데 <녹색광선>(1986)은 그 시리즈의 한 편이다.

  파리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는 델핀은 바캉스를 맞아 당황한다. 남자친구가 있긴 하지만 소원해진 데다 가족들은 그리스 등으로 떠나고 친구의  빈 별장으로 휴가를 가보지만 휴양지의 지나친 가벼움에 점점 더 소외감만 느낄 뿐이다. 하지만 우연히도 그는 녹색광선에 대해 듣게 되고 또 거리에서 자신의 운명을 일러주는 듯한 카드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녹색광선을 함께 볼 남자를 기다리게 되는데, 프롤로그에 인용된 랭보의 시처럼 마침내 그 시간은 오고 관객들은 델핀의 가슴 설레는 소망 충족에 함께 하게 된다.

  이미 몇가지로 우상화된 영화라는 매체의 성격을, 심각하고 무거운 스타일을 동원하기보다 이렇게 깜찍하고 귀여운 영화를 이용해 바꾸는 작업은 한층 더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에릭 로메르는 60∼70년대 영화사에 '영화적 문학성'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것을 소개했고 그곳에서 18세기와 20세기는  매우 역설적이고 희극적인 방식으로 만났던 것이 사실이다. 그 만남 속에서 유럽 영화의 우상적 얼굴, 즉 고급 예술로서의 문예 영화는 매우 명랑한 모습을 띠게 됐다. 그래서 예술 영화관을 나오며 반드시 철학자의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게 됐던 것이다.

<필자: 김소영/영화평론가·영상원 교수>

 

 

85. <메이트원 Matewan>(1987) / 감독: 존 세일즈

 

  80년대에 미국 독립영화의 대표주자로 떠오른 존 세일즈. 소설가이자 저예산 상업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이며 80년에 <세코서스 7인의 귀환>이라는 영화로 데뷔하면서 미국영화사에 등장했다. 그러나 87년에 <메이트원>을 만들 때까지 그는 독창성은 있으나 영화적 수완은 뛰어나지 못한 감독 쯤으로 평가받았다.

  <메이트원>은 20년대에 웨스트 버지니아의 탄광마을 메이트원에서 실제로 일어난 학살사건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미국판 '파업전야'라 부를만 하다. 레이건과 람보가 판을 치던 80년대에 이건 꽤 높이 평가해줄만한 작업이었다.

  광산노조가 아직 결성되지 않은 20년대. 메이트원에서 파업이 일어난다. 광산사장은 이탈리아 이민과 흑인들을 모집해 구멍난 노동력을 메우려고 한다. 그렇게해서  메이트원에 흘러들어온 비조합원 노동자 중에는 쿠퍼도 끼어 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세계산업노조에서 파견된 노동운동가다. 쿠퍼는 메이트원의 노동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독려한다.

  쿠퍼는 사용자측에 매수된 다른 노조원의 모함을 받기도 하고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다른 조합원들의 노력으로 노조는 점점 강해지고 파업은 최고조에 달한다. 이런 와중에 조합원 힐라드가 석탄을 훔치려다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용자측은 볼드윈 탐정사무소를 통해 사람을 사들이고 다음날 마을에는 피비린내나는 총격전과 학살이 벌어진다.

  <메이트원>은 노조 결성 투쟁기에 사람들이 품고 있던 완벽한 공동체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이 잘 포착돼 있는 영화다. 그러나 감독 세일즈의 의도는 너무 눈에 보이게 드러난다. 낭만적인 분위기로 미화된 등장인물의 성격화나 멜로 드라마적인 과장이 때로는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이 영화가 실제 역사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는 수많은 굴곡을 겪으며 변질된 20세기 미국 노동조합의 역사를 직설화법으로 담았다. 노조가 결성되고 투쟁이 시작되고 많은 사람이 죽어갔어도 <메이트원>에는 사람들이 그토록 바랬던 노동자들의 유토피아가 이룩되지 않는다.

  <메이트원>의 촬영은 베테랑이었던 하스켈 웩슬러가 맡고 있다. 탄광촌 마을을 잡아낸 풍경중에 웩슬러가 찍은 화면의 아름다움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잔인한 현실과 아름다운 풍경의 부조화는 영화의 비판적 진술에 묘한 무게를 싣는다. 세일즈는 웩슬러의 촬영술에 힘입어 공동체를 향한 감상적이면서도 이상화된 동경을 담아냈다. 공동체 정서를 곧잘 화면에 담아 냈던 존 포드 감독의 서부영화로부터 세일즈가 많이 배웠음을 알 수 있는데, 포드의 서부영화와 비교해도 쳐지지 않는다.

  세일즈가 메이트원과 인연을 맺은 사연은 오래 전부터다. 세일즈가 웨스트 버지니아 지방을 무전 여행할 적인 60년대에 이  지방 사람들에게 광산전쟁과 메이트원 학살 사건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나중에 좀 더 자료 조사를 한뒤 세일즈는 <노조의 권리>라는 소설을 썼고, 거기에 담지 못한 부분을 영화로 만들었다. 이 영화는 8년동안 준비해서 4백만달러의 예산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결실을 톡톡히 맺었다. 평자에 따라서는 <메이트원>을 80년대 미국 독립영화계의 최고작으로 치기도 한다. 그리고 바다  건너 우리 나라에서도 <메이트원>은 노동운동 현장이나 대학가에서 심심치 않게 비디오로 상영하는 '컬트'가 됐다.

<필자: 김영진/영화평론가·<씨네21> 기자>

 

 

86. <붉은 수수밭 紅高粱>(1988) / 감독: 장 이모우

 

  1985년 천카이거의 <황토지>가 신중국영화의 탄생을 처음으로 외부세계에 알린 이후 장이머우의 1988년 작 <붉은 수수밭>은 전세계가 신중국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기폭제가 됐다. 서구의 관객들은 이국적이면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구성에 매료됐다. 장이머우는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고, <붉은 수수밭>은 그 두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붉은 수수밭>은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손자의 내레이션을 통해 20세기 초에서 일본의 침략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한 벽지마을에 살던 조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도입부분에서부터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준다. 쉰살이 넘은 양조장집 주인 문둥이에게 팔려가는 주얼(공리)의 붉은 가마와 웃옷을 벗어제친 건장한 가마꾼들의 춤과 노래는 시청각적으로 이국적인 느낌을 전달함과 동시에 가련한 여인의 운명, 건장한 남성에 대한 주얼의 은근한 눈길, 중국의 봉건적 폐습 등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프롤로그로 확실한 인상을 남긴다.

  중국적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것, 장이머우 영화의 성공의 핵심이다. 이를테면 술은 흔히 중국인들에게 시적이며 낭만적인 이미지로 비친다. 이 작품에서도 고량주는 조부의 낭만적이고 남성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모티브로 작용하며, 병균을 물리치는 약의 역할과 일본군에 맞서는 폭탄의 역할까지도 한다. 즉, 고량주는 정열과 낭만, 생산, 활력, 단결, 의리의 상징이다. 서구인들은 여기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인간 정신의 재현이나, 바흐친의 '카니발'을 떠올렸을 것이다. 특히 사흘간이나 술독에 빠져 노래를 부르던 조부의 모습에서 낭만과 관습적이고 억압적인 도덕적 굴레로부터의 탈출을 보았을 것이다.

  <붉은 수수밭>은 분명 정치적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일면 30년대 중국의 좌파영화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30년대 중국의 좌파영화가 주로 그랬듯이 이 작품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가부장제로부터의 여성해방, 육체의 해방을 이야기한다. 반일항쟁의 이야기는  다소 도식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주얼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연관지어 보면 달리 읽을 수도 있다. 주얼은 전래의 전통적 여인상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양조장 주인이 살해된 뒤 양조장 운영을 책임지는 반(半)모계사회의 가장이 되며, 일본군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라오한의 복수를 이끄는 지도자이기도 하다. 장이머우는 이런 개척적이고 능동적인 여인상과 함께 건장하며 낭만적인 남성상을 제시한다. 대부분 웃옷을 벗고 등장하는 조부와 양조장 일꾼들의 모습은 도덕적 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하늘과 땅의 도리를 알고, 또 자유롭다. 이들의 모습은 일본군의 제복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이들의 건장한 신체는 오늘날 은밀해지고 심리적 문제로 치부되는 '육체'를 과거의 자유로운 집단의 영역으로 끌어내는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내레이터 조부모의 개인적 경험은 곧 집단의 경험이 되고, 동시에 중국역사의 알레고리가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비정치적이면서도 역사의 흔적이 배어있고, 전통적이면서도 동시에 비전통적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장이머우의 연출능력과 의도 덕분이다. 전통과 새로움의 조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붉은 수수밭>은 더욱 돋보인다.

<필자: 김지석/부산예술학교교수·영화학>

 

 

87. <똑바로 살아라 Do the Right Thing>(1989) / 감독: 스파이크 리

 

  뉴욕의 하워드 비치에서 한 흑인 청년이 살해되었다. 범인은 젊은 백인 청년들. 인종이 다른 것을 문제삼아 살인한 '증오범죄'의 전형적인 경우였다. 이미 <그 여잔 그걸 가져야만 해>라는 영화로 블랙 아메리칸 시네마의 새 장을 열었던 스파이크 리는 <똑바로 살아라>라는 논쟁적 영화로 이 사건에 즉각적으로 개입했다.

  이탈리아계, 푸에르토리코계, 한국계, 유대계들이 모여 사는 브루클린의 베드퍼드 스타이베산트 지역.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이탈리아계 미국인 살이 경영하는 피자가게와 한국계가 주인인 식료품점 주변 동네에 살고 있는 각기 다른 인종적 배경을 가진 주민들이 24시간 동안 벌어지는 인종전쟁에 말려든다.

  영화는 일거리를 찾지 못한 채 무리를 지어 거리를 배회하는 흑인 청년들과 푸에르토리코인들, 역시 하릴없이 술만 마시는 노인들로 어수선한  거리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거기서 인종문제를 제기하는 영화적 형식이 새롭다. 기울어진 카메라 앵글과 도발적 원색 그리고 역동적으로  사용된 랩과 팝송에 일종의 펑크스타일이 부분적으로 가미된다. 다큐멘타리적 스타일과 펑크적인 것이 결합된 이 새로운 형식은 젊은 관객들에게 인종갈등문제를 전달하기위한 효과적인 장치로 보인다.

  피자집 종업원 무크로 출연한 이 영화의 감독 스파이크 리는 일종의 메신저처럼 각기 다른 인종의 입장을 피자를 배달하듯 관객들에게 전한다. 그 전언에 따르면, 증오범죄적 태도로부터 자유로운 인종은 없다. 백인경찰, 흑인계, 이탈리아계, 한국계 모두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고 저주한다.

  저중산층 유색인종들이 백인중심주의가 만들어낸 인종차별이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피라미드식으로 재생산하는 셈인데, <똑바로 살아라>에서 흑인과 이탈리아계의 대립은 결국 방화, 구타 그리고 살인으로 치닫는다. 물론 이 사건은 누적된 인종갈등이 폭발한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미지'가 그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살의 피자가게에 붙어있는 사진들이 알 파치노 등 이탈리아계뿐임을 발견한 흑인청년 고객은 살에게 말콤 엑스나 마틴 루터 킹과 같은 흑인 영웅의 사진으로 바꿔  붙이라고 요구한다. 이에 대한 살의 거절이 피자가게에 대한 보이콧과 파괴로 이어진다. 영화의 종반부, 타버린 벽 위에 붙여지는 말콤 엑스와 킹의 사진은 이제 이미지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흑인들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이후 대서사극 <말콤 X>(1992)가 말해주듯 이 영화는 사실 이중적 효과를 노리고 있다. 즉 인종갈등의 현장을 역동적으로 재현함과 동시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도 이제 영화나 사진과 같은 재현양식을 조정하고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갖추어야 한다는 영화감독다운 제안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결국 이미지 재현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짓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싸움이기도 하다.

  실제로 스파이크 리의 작업 이후 존 싱글톤, 마리오 반 피블스, 어네스트 디커슨과 같은 흑인 감독들이 인종들 간의 그리고  흑인들 내부의 갈등을 아프리카계 미국 젊은이들의 하위문화적 코드들을 전유해 강력하게 재현하고 있다. 또 레슬리 해리스, 줄리 대시와  같은 흑인여성 감독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인종문제와 여성문제를 동시에 제기하고  있다. 

<필자: 김소영/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88. <비정성시 悲情城市>(1989) / 감독: 허우 샤오시엔

 

  이제는 1996년, 89년작 대만영화 <비정성시>를 다시 본다.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2천년대 거장의 하나인 허우샤오시엔 감독? 세계 최고의 영화중 하나? 줄거리조차 이해를 못하겠다? 하지만, 지금 이 영화에 쏟아지는 기존의 찬사 혹은 몰이해는 중요하지 않다. 자잘한 분석은 이제 그만, 시간이 없다. <비정성시>가 주는 마음의 칼을 찾아라!

  이 작품은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자막으로 문을 연다. 1948년 중국에서 패한 장개석이 대만에 정부를 설립했다라는 자막으로 문을 닫는다. 그렇다, 이 영화는 역사로 문을 연다. 우리 역사를 연상시키는 대만 현대사가, 제주 4·3항쟁을 연상시키는 2·28항쟁의 추이과정이 배경에 깔려있다. 깔려있다고?

  <비정성시>는 가족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이다. 영화의 문 안에는 인간의, 한 가족의 삶이 도도하게 흘러간다. 드라마의 중심에는 문씨 집안 형제의 3대에 걸친 슬프고도 꿋꿋한 가족사가 서 있다. <비정성시>의 역사성과 생명력은 역사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그리지 않고, 먼저 인간을 묘사하면서 그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이 드러나게 하는 과정에 있다. 감독 특유의 서정적이고도 호흡이 긴 카메라 리듬, 생략적인 심리묘사와 사건 전개, 음향 방식 등은 자신이 체험한 대지의 인간을 온 몸으로 기록하려는 감독의 시선에서 자연스럽게 분출된다. 진정한 인간주의야말로 역사성, 서정성과 만날 수 밖에 없다는 것, <비정성시>의 자궁 속에서 잉태된 감동이요, 가르침이다.

  필자와 <비정성시>의 인연은 깊은 셈이다. 영화를 본 감동 때문에 대만을 여행했고 허우샤오시엔을 인터뷰했고, 급기야 대만영화에 관한 방송 다큐멘터리까지  만들게 되다니... 대만 영화인들중에 허우샤오시엔과 비슷한 "붕어빵"이 많다.

  그 사람들은 틈만 나면 가족을, 사람을, 역사를 말한다. 게다가 그들의 대표작들도 어딘가 허우샤오시엔과 비슷하다. 주제는 물론 긴 호흡에 관조적인 카메라 시선 등 스타일조차 닮았다. 그래서 "장사"가 안된다는 점까지도.  하지만 그들은 허우샤오시엔의 붕어빵이 아니었다. 허우샤오시엔이야말로 대만인들의 삶과 역사 때문에 생겨난 붕어빵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풀지못한 과거의 숙제, 평생을 끌고 가야할 희망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힘이 있다. 서구의 고전적 영화형식과 대등하게 보편적 영화문법의 하나로 자리잡은 <비정성시>의 영화언어로 허우샤오시엔과는 다른 개인들의 삶을 담아냈다. 그들은 <비정성시>를 넘어선 것이다.

  그래, 우리도 이젠 허우샤오시엔을 만날 필요가 없다! <비정성시>라는 성배를 찾아 떠날  이유도 없다. 이 땅 안에, 우리 마음 안에 허우샤오시엔이 있고,  <비정성시>가 있다! <비정성시>는 바로 시선의 에너지요 힘이다. 자기가 선 땅을, 가족을, 자연을, 역사를 어떻게 제대로 응시하느냐의 미학이다. 자기가 살고 보고  느낀 것만큼만, 보고 느끼고 만들 수 있다던가... <비정성시>는 우리에게 절규한다. 두 발로 대지를 굳게 밟고 두 눈을 부릅뜬 채 당신의 삶과 역사를 응시하라고. 안이한 영화 습관,  잘못된 인생관을 잘라버릴 자객의 칼이 없이 영화를 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고.

  비수처럼 박히는 불가의 화두. 마음이 거세된 모든 것은 허상이다. 허우샤오시엔을 만나면 허우샤오시엔을 죽이리라. <비정성시>를 만나면 <비정성시>를 죽이리라, 아니... 영화를 만나면 영화를 죽여라!

<필자: 조재홍/영화평론가>

 

 

89. <십계 Dekalog>(1989> / 감독: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1941년 바르샤바 생, 불우한 어린시절, 신부를 꿈꾸었던 인물, 폴란드 국립 영화학교에서 다큐멘터리를 배우면서 다큐멘터리 작가로서 출발. 키에슬로프스키의 이름이 세계적 주목을 받은 것은 1988년 깐느영화제에서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이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하면서부터이다. 살인자와 애숭이 변호사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에서 키에슬로프스키는 인간의 윤리적 결단이 법적 관습적 판단 기준에 선행하며 또한 높은 차원에 있음을 말한다. 그는 스스로를 영상의 윤리학자로 드러낸 셈인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이 영화는 십부작 연작인 <십계>의 한편이었기 때문이다.

  <십계>는 폴란드 텔레비전과 자유베를린 방송사가 같이 만든 텔레비전용 영화이다. 여섯번째 연작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라는 제목으로 역시 극장용으로  재편집된 바 있다. <십계>에는 영화작가 키에슬로프스키의 특질과 미덕이 원형적으로 녹아있다. 제목만으로 종교적 우화를 연상할지 모르나 전혀 그렇지 않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십계'를 현대 폴란드 사회를 건져올리는 그물로만 사용한다. 그 그물에 올라온 열 장의 실존적 지도, 그것이 영화 <십계>이다.

  한 첼로 주자가 있다. 그녀에게는 중병에 걸린 남편이 있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애인이 있다. 그녀와 남편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임신 중이다. 애인의 아이를 가진 것이다. 이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지워야 하는가. 그녀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노의사를 찾아간다. 그녀는 의사에게 남편이 살 수 있는지를 말해 달라고 한다. 의사는 모른다고 말할 뿐이다. 그녀는 다시 말한다. 남편이 살아난다면 아이는 지워야 한다고. 그러나 만약 아이를 지웠는데 남편마저 죽어버린다면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그렇게 되면 그녀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그러니 살아날 확률을 말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의사는 의학상 죽음의 확률이 높은 경우에 오히려 더 많은 생존자가 발생하고 살 확률이 높았던 경우에 느닷없이 죽어버리는 경우를 숱하게 보아왔다. 생명은 의학의 범주 밖에 놓여 있는 것이다. 여자는  병상의 남자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는 고집스럽게 외면한다. 여자는 다시 찾아온다. 똑같은 질문이다. 의사는 딜레마에 빠진다.

  연작 중 두번째 영화의 도입부이다. <십계> 연작은, 아버지를 사랑한 나머지 차라리 의붓아버지이기를 바라는 소녀의  얘기, 수학적 원리로 세상을 재단하는 대학교수가 날씨를 잘못 예상한 탓에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다 얼음이 녹아 빠져죽는 아들의 얘기, 늘 훔쳐보기를 하던 소년을 잃은 여인이 거꾸로 소년을 사랑하게 된 얘기 등, 실존의 수수께끼와 맞닥뜨려본 사람들을 순식간에 사로잡는 힘을 가진 에피소드들로 채워져 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이 연작에서 인간사의 어떤 근본적 딜레마, 일상 속의 비일상, 고뇌와 결단의 순간 등만을 다룬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러한 순간에 인간 삶의 본질과 존재의 불가해성이 더없이 날카롭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드러낼 뿐 그 이상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열편의 연작은 각기 미완성인 채로 관객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 <십계>에서 키에슬로프스키는 텔레비전 영화라는 한계를 오히려 조건삼아 독자적인 형식미학을 추구

한다. 이 미학의 기초에는 빛과 소리와 음악으로 유기적 전체를 구성하는 견고한 리얼리즘이 놓여있다. 하지만 거기에서 피어난 것은 리얼리즘의 꽃이 아니라 예의 영상의 윤리학이다. 그것은 특히 빛으로 표현된다. 한 화면 안에서 푸른빛과 흰빛과 붉은빛을 변화무쌍하게 나누고  모으고 다시 나누는 빛의 미학은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블루>, <화이트>, <레드>라는 색채 삼부작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

<필자: 이정하/영화평론가>

 

 

90.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 / 감독: 배용균

 

  1989년 로카르노 영화제는 세 사람의 신인감독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해 그랑프리는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은표범상은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동표범상은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에 돌아갔다. 그 뒤 세 감독은 서로의 길을 향해 나아갔다. 아마도 앞으로도 서로의 길이 교차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만들어낸 배용균은 한국영화 속에서 UFO같은 존재다. 그는 인터뷰하지 않으며, 제도권 영화와도 거의 교류가 없으며, 5년에 한번씩 자신의 영화를 갖고 느닷없이 돌아온다. 그는 앙드레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완전작가'다. 언제나 감독과 각본, 촬영, 편집, 기획을 그 혼자서 해낸다. 유머라고는 거의 없으며, 형이상학적인 주제와 관념적인 대사들, 그리고 영화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진지한 믿음은 거의 노이로제처럼 보인다. 바로 이러한 강박관념은 사실은 그의 영화정신이 흔히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신비주의가 아니라 리얼리즘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진심으로 영화가 리얼리즘의 산물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배용균의 영화적 계보는 로베르토 로셀리니(또는 오즈 야스지로의 일상생활의 리얼리즘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시적 리얼리즘)에 닿아 있다.

  배용균은 (필자와의 매우 개인적인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세계를 '일요일의 리얼리즘'이라고 이름 지었다. 모두들 평일의 리얼리즘을 다룬다면 자신은 모든 규칙이 하루동안 쉬는 세상의 일상생활을 다루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것은 자신의 영화 속에서 그 어떤 다른 변형을 가하지 않으려는 자연의 풍경과 한번도 연기경험이 없는 아마추어 연기자들의 표속에서 끌어내려는 마음으로부터 그의 영화가 시작한다는 점에서 정말 그러하다. 그래서 배용균의 영화는 풍경과 표정 사이의 자기성찰로 이루어져 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산사에서 수도생활하는 세 사람의 스님에 대한 영화다. 노스님 혜곡은 스스로 자신이 입적을 앞두고 있음을 알고 있다. 젊은 스님 기봉은 사바세계에 두고 온 눈 먼 어머니가 주는 번민으로 괴로워하면서도 도를 깨치기를 갈망한다. 동자승 해진은 고아로 태어나 산사에서 자라난다.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혜곡 스님이 이 세상을 떠나자 거기서 얻은 작은 깨달음을 안고 두 사람은 서로의 길을 간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은 화두로 남는다. 계속 질문하고,  의심하고, 대답하고, 번민하고, 그리고 다시 질문하는 독백과 방백의 화법이 이어지면서 영화 전체는 선문답의 삼천대천세계로 펼쳐진다.

  배용균은 우주처럼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본다. 그리고 풍경과 표정 사이에서 번뇌의 입구를 본다. 바로 이  순간 리얼리즘의 찰나찰나에 모더니즘의 형식이 끼어들고, 카메라가 담아내는 광경 속으로 영화의 수사학이 펼쳐진다. 천변만화하는 세상의 표정은 수도자들의 번뇌가 된다. 이것은 세상을 표상하는 것과 자기 성찰 사이의 싸움으로 밀고 나아간다. 그래서 이 한편의 영화는 보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의 경계의 긴장으로 가득차 있다. 수많은 선화로부터 영향받은 것이 분명한 화면들은 그런 의미에서 번뇌이며, 그가 넘어서려고 하는 차안과 다가서려고 하는 피안의 경계를 타고 물어보는 공과 색의 넘나듦이다.

  지나치게 중생으로부터 멀리 있다고? 그러나 잠깐. 여기서 배용균이 대답하지 않지만 그의 질문이 끝난 것은 아니다. 두번째 영화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95년)은 화두에 이은 그의 사바세계의 밤으로의 산책이다. 그는 우리의 세계 속으로 비행하고 있으며, 한국영화는 배용균을 통해서 또 하나의 리얼리즘의 계보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세번째 영화까지 다시 5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일이다.

<필자: 정성일/영화평론가·월간 <키노> 편집장>

 

 

91. <안개 속의 풍경 Topio stin Omichli>(1989) /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

 

  지난해 <율리시즈의 시선>이 칸 영화제의 강력한 대상후보로 언급되기 전까지 앙겔로풀로스는 우리에게 낯선 감독이었다. 백두대간의 예술영화관 개막 프로그램으로 <안개 속의 풍경>이 한 회 상영된 것이 이제까지 유일한 공식적 소개다.

  앙겔로풀로스는 프랑스 영화학교 이덱에서 수업했고 시네마 베리테의 선구자인 장 루쉬의 조수로 일했다. 64년 그리스로 돌아와 좌익신문의 영화평을 쓰기도 했으며 그의 첫 영화작업은 시네마 베리테 양식의 기록영화였다.

  이후 결코 다작을 내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그의 작품들은 비평적 찬사를 받아왔으며 그리스의 대표적인 감독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해왔다. 특히 <1936년의 나날들>(72년), <유랑극단>(75년), <알렉산더 대왕>(80년), <키테라섬으로의 여행>(84년) 등을 통해 그는 격랑의 그리스 근대사와 사회상을 시적이며 우화적으로 그려왔다.

  그는 고향에선 버림받았으나 그래도 고향을 향한 길 위에 선 이들의 모습을 드라마의 중심에 둔다. <안개 속의 풍경>도 그 여정이란 소재의 연장이다. 그가 선호하던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상황보다 여기서는 공허하고 스산한 현대의 그리스를, 절망적이고 고통스런 나이어린 오누이의 여정을 통해 보여준다.

  긴 호흡으로 찍어낸 현대 그리스의 풍경은 비어있고 비가 내리며 어둡고 삭막하다. 거기서 오누이는 아버지를 찾아 길 위에 선다.  아버지가 돈벌러 갔다는 독일을 향해 북으로 나서는 것이다. 그들은 사생아이며 독일에 있다는 아버지도 모두 바람난 어머니가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 초반에 드러나지만 영화는 그래도 그 막막한 여정에 매달린다.

  그들은 아버지에 대해 알게 된다면 돌아오겠다고 상상 속의 아버지에게 말한다.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고 두렵기는 해도 길을  떠난 것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닥친 삶의 여러 양태는 결코 닿지 못할 곳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을 안겨주고, 그들을 무너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이 그저 빛과 어두움 뿐인 곳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깨달음은 그들 자신의 경험과 함께 감독이 그들의 여정에 개입시킨 다양하고도 모순된 삽화들을 통해서 일어난다. 모든 것을 중단하고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군상, 결혼이란 축제 전경에서 죽어 넘어지는 말, 공연장조차도 얻지 못하고 헤매는 유랑극단(<유랑극단>의 재등장), 사소한 질투와 순간적인 욕정으로 소녀를 범하는 트럭 운전사, 헬리콥터가 물 속에서 끌어내 달고 가는 거대한 손 등은 삶의 무력함과 절망만을 그들에게 알려준다.

  그들은 아버지를, 아니 아버지의 대리인을 만난다. 유쾌함과 다정함과 따스함, 그리고 소녀에게 첫사랑을 주는 청년이 그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 만남은 순간일 뿐 하나의 가족을 구성할 수는 없다. 그는 입대를 며칠 앞두고 불안 속에 삶의 의미를 의심하는 청년이다. 또한 은밀히 보여주듯 동성애자다.

  통과의례를 다룬 영화, 아버지라는 사회질서로 편입하기 위한 고통스런 행로의 영화, 그러면서도 현대 그리스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인 <안개 속의 풍경>은 시적이고 아름다우며 또한 잔인하다. 그것은 미조구치 겐지의 극적인 경제성보다는 안토니오니의 공간을 향한, 투시에 가까운 길고도 긴 촬영이 주는 사색에 기인한다.

  청년은 소녀에게 아무것도 찍히지 않은 텅빈 필름 조각을 보여준다. 그는 거기서 안개 속에 멀리 서있는 나무를 본다. 대상에 대한 카메라의 냉정한 움직임과 죽은 듯한 공간에 대한 앙겔로풀로스의 오랜 응시, 그것은 아마도 그 텅빈 필름인지도 모른다. 그 안개 속의 풍경을 우리도 보게 하려는 오랜 응시일지도.

<필자: 주진숙/영화평론가·중앙대 교수>

 

 

92. <바톤 핑크 Barton Fink>(1991) / 감독: 조엘 코엔

 

  브로드웨이의 젊은 극작가 바톤 핑크는 할리우드의 초청을 받아 로스앤젤레스에 온다. 바톤은 도착하면서부터 이해할 수 없는 정황들과 연속적으로 마주친다. 지옥으로 가는 관문 같은 기괴한 분위기의 호텔, 할리우드 사람들의 미치광이 같은 생활양식, 그곳에서 폐인이 돼버린 대작가 등. 이런 상황에서 하룻밤 같이 잔 여자는 자신의 침대에서 피투성이로 죽어 있고, 친구로 여겼던 뚱뚱한 남자가 여자를 죽인 미치광이 살인광임이 밝혀진다.

  <바톤 핑크>는 얼핏 예술가를 질식시키는 할리우드, 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작가의 허위의식, 현실의 불가해함에 관한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형 조엘이 감독, 동생 에단이 제작을 맡는 코엔형제는 그런 주제를 정교한 농담처럼 만들어 놓았다. 이들은 영화를 퀴즈처럼 만드는데 명수다.

  바톤을 초청한 캐피탈(돈) 영화사 사장은 야심에 불타는 바톤을 어린애 대하듯이 다룬다. 그는 속사포 같은 언변으로 바톤에게 게임의 규칙을 강조한다. 영화는 연애담이 아니면 액션, 혹은 성공담을 재빨리 조합시켜 내놓는 인스턴트 식품과도 같다. 그의 단순명쾌한 사업가적 기질 앞에서 바톤은 얼이 빠져 듣고만 있다.

  바톤은 불쌍하면서도 어리석은 예술가다. 그는 할리우드 사람들 앞에서는 꼼짝 못하지만 보통사람들 앞에서는 귀담아 듣는 대신 일방적으로 말하려 든다. 바톤이 어린애 같은 오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멍청이임을 암시하는 대목은 옆방의 투숙객 찰리와의 만남을 통해 두드러진다. 찰리는 눈을 빛내며 자신의 진실을 말하려 한다. 그러나 바톤은 자아도취의 상태에서 숨가쁘게 자기 말만 이어나간다. 말하고 싶었으나 저지당한 찰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곧 영화의 절정부다. 찰리는  미치광이 살인광 문트인 것이다. 바톤이 묵고 있는 얼(Earle) 호텔은 이름에서 암시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소리를 흡수하는 공간처럼 존재한다. 바톤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 누른 차임벨 소리의 한없는 이어짐, 호텔 복도의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 외부의 소음이 막힘없이 전달되는 바톤의 방. 바톤은 그 소리들을 유념하기보다는 불평한다. 창작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큰코 다친다.

  얼 호텔은 또한 묵시록적 현실의 상징적 축도이기도 하다. 급사는 지하에서 올라오고 엘리베이터를 관리하는 늙은 종업원은 해골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방의 책상에는 엄청난 먼지가 쌓여 있고 벽지는 내부의 부패로 인한 열로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사람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는데 복도에는 빈 구두가 놓여 있다. 내부로부터 무너져가는 이 호텔의 아리송한 면면은 곧 지옥의 변방에 다가서 있는 현실 이미지다. 그것의 논리적 귀결은 불로써 정죄당하는 묵시록적 현실이다. 호텔로 되돌아온 찰리는 호텔 곳곳에 불을 지르고 나타나 도망치는 형사를 쫓아 달려오며 소리지른다. "이 세상의 참모습을 보여주마."  찰리의 행동에서 영감을 얻은 바톤은 스스로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 시나리오를 쓰지만 영화사 사장에게 질책만 듣는다. 풀이 죽은 채 바톤은 해변가로 간다. 거기서 바톤은 호텔 방에서 본 액자 속의 여자가 걸어와 액자 속에서와 똑같은 자세로 해안을 응시하는 것을 본다. 바톤은 영원히 자신의 말이 통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 그에게 이 정경은 기묘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말로써 옮길 수 없는 실제의 아름다움을 목격하는 순간이다.

  바톤은 재현의 대상이 놓여 있는 현실의 복잡성과 그 복잡성을 도식화할 것을 요구하는 또 다른 현실과 창작자로서의 겸손을 배웠다. 그러나 코엔 형제의  다음 작품 <허드서커 대리인>은 재기에 비해 알맹이가 없었다. 정작 코엔 형제 당사자들은 바톤 핑크의 재난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필자: 김영진/영화평론가·씨네21 기자>

 

 

93.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Zendegi Edame Darad>(1992) / 감독: 압바스 키아슬로타미

 

  1987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잘못 가져온 친구의 숙제장을 돌려주기 위해 친구집을 찾아 헤매다 하루해를 다 보내는 꼬마의 이야기를 다룬 <내친구의 집은 어디에?>를 발표 해 세계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 작품의 촬영지는 이란 북부의 가난한 마을이었고 대부분의 출연자도 마을 주민들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90년 이란 북부 지역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당시 뮌헨을 방문중이던 키아로스타미는 <내 친구…>에 출연했던 꼬마들의 생사가 염려돼 곧바로 귀국해 카메라를 들고 그 마을을 찾아 나섰다. 그 과정을 다룬 작품이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다.

  이 작품은 분명 극영화다. 줄거리는 지진으로 폐허가 된 곳을 어렵게 헤쳐나가며 두 꼬마를 찾는 과정이 전부이며, 여기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구분은 더 이상 무의미해진다. 이는 고다르처럼 이데올로기적이지도 않으며 요즘 범람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장르해체라는 시대조류와도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런 장르해체보다 더 파격적인 것은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극영화건 다큐멘터리건 그 속에 담기는 이야기는 대부분 굴곡이 있게 마련이고 또 다층의 플롯을 지니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그런데, 한  부자가 톨게이트를 지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해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누군가를 찾는 과정만을 91분 동안 담아낸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눈길을 꼭 붙잡아 놓을수 있는지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힘들다.

  경이로운 것은 이런 영화를 만들겠다는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관이다. 그의 파격은 조용한 작품 성격에 반비례해 너무나 충격적이다. 영화사에  있어 파격에 관한 한 첫손 꼽히는 고다르의 경우 영화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에서 그 출현의 개연성이 수긍되는 반면 키아로스타미의 출현은 돌연변이라는 표현으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그의 영화는 그 어느 누구의 영화 

와도 닮지 않았으며 영화사의 발전과정과도 무관하다. 단지, 이란영화가 전통적으로 다큐멘터리분야에서 강세를 보여왔다는 점 정도를 그의 영화의 출현 배경으로 언급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돌연변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담겨있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은 세계 어디서나 공감할 만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듯이 어린이의 세계에 대한 따뜻한 시각,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한 경이가 담뿍 담겨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인간의 삶을 힘든 고갯길을 넘어서는 것에 비유한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마지막 장면을 보자. 주인공 부자가 탄 차가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가다 힘에 부쳐 다시 내려온다. 이때 조금 전에 태워달라는 요청을 무시당했던, 짐을 진 한 청년이 차를 밀어 내려가는 것을 도와준다. 청년은 다시 짐을 지고 고개길을 올라가고 내려갔던 차가 잠시후 다시 올라와 마침내 고개를 넘어 그 청년을 태우고 떠난다. 비록 꼬마들을 찾지는 못했지만 삶에 대한 희망은 여전하다는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그리고 삶은…>이라는 제목에도 딱 맞아 떨어지는 라스트씬이다.

  영화의 장르구분, 리얼리즘의 개념, 내러티브의 개념, 시나리오론, 그리고 영화사, 이제는 이 모두가  다시 쓰여져야 할지 모른다. 그것은 순전히 변방의 영화로만 인식돼 왔던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구중심의 이른바 '주류영화'의 흐름을 통째로 뒤엎을 만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키아로스타미로 인해 새로운 영화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필자: 김지석/부산예술전문대 교수·영화학>

 

 

94. <올란도 Orlando>(1992) / 감독: 샐리 포터

 

  <올란도>는 '빅토리아조의 치마를 두른 게릴라 전사'라는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다. 울프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사람은 영국의 페미니스트 감독 샐리 포터. 여성 소설의 대모와 80년대 이후 실험적인 페미니즘 영화를 만들어 오고 있는 여성 감독과의 만남은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낳았다. 포터는 장난스러울 만큼 기지넘치는 울프의 아방가르드 소설을 브레히트적 기법과 만나게 해 그 실험성을 스크린 위에 성공적으로 전환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의 후반부에 20세기를 덧붙여 19세기에서 끝나는 소설을 동시대화했다. 그것은 모터사이클을 타고 런던 시내를 달리는 올란도와 그의 딸의 당당한 모습을 여성운동의 현지점을 알리는 유쾌한 지표로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올란도>는 4백년을 산 그/녀의 이야기로 양성성의 문제를 알레고리적 형식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제목 'Orlando' 자체가 영화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암시하고 있는데 '혹은, Or' 또는 '그리고, and'를 섞어 붙인 주인공의 이름은 남성 혹은 여성, 또는 남성 그리고 여성인 주인공의 이름으로서는 매우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복장 전환과 성적 전도를 통한 양성적 실험을 하면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예시적으로 보여주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은 가장무도회에 초대받은 것 같은 즐거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 무도회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기존의 여성성/남성성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이다.

  4세기에 걸친 수명을 누리게 되는 올란도는 귀족의 자제로 태어난다. 때는 16세기, 성을 정확하게 구별하기 어려운 복장을 한 미소년 올란도는 러시아인 사샤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가 돌연 러시아로 떠나버리자, 일주일 동안 죽음과 같은 잠에 빠져든다. 그후 시를 쓰려는 노력을 하지만 시인으로서는 3류임을 깨닫게 되자 터키의 대사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폭동이 일어나는 사이, 올란도는 또 깊은 수면에 빠지고 마침내 여성으로 전환된다.

  이제 그는 발걸음조차 떼기 힘든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18세기의 영국으로 돌아와 여성으로서 억압적인 제도들과 싸우게 된다. 법적으로 남성 올란도가 사망했기 때문에 여성으로서 재산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재판이 벌어지고 그는 귀족으로서 누렸던 모든 특권을 상실하게 된다.

  19세기 빅토리아조의 어둠 속에서 그의 양성적 실험은 중단되고 끝내 결혼을 하게 되는데 역설적이게도 모험적인 혁명가와의 결혼은  오히려 그에게 상대적인 자유를 허용하게 된다. 소설과는 달리 여자아이를 잉태한 올란도는 남성이었을 때는 실패했던 글쓰기에 성공하게 되고 딸은 20세기의 소녀답게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세상을 관찰한다.

  <올란도>에 나타나는 양성성을 남성성/여성성의 유토피아적 통합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이질적인 것이 중첩된 알레고리적 주체성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전자의 경우엔 버지니아 울프를 소박한 낭만주의자로, 후자의 경우엔 그를 급진적 페미니스트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샐리 포터의 영화적 해석은 사실은 다소 애매모호하다. 하지만 다양한 가면들을 보여 주며 여성이 주체로 설 수 있는 공간을 탐색하는 영화 <올란도>는 60년대 이후 지속되는 페미니즘 영화의 귀중한 성과물이다.

<필자: 김소영/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95. <패왕별희 覇王別姬>(1993) / 감독: 첸 카이게

 

  경극 <패왕별희>가 처음 창작된 것은 1918년께이다. 경극은 중국의 대표적인 전통연극으로 베이징을 중심으로 발달해, 일본의 가부키나 노처럼 동양 연극의  값진 자산이 되었다.

  경극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사랑받는 <패왕별희>는 홍콩에 살고 있는 소설가 릴리언 리(본명 이백화)에 의해 소설로 쓰여졌다. 이 소설을 릴리언 리와 루 웨이가 각색하고 <황토지>로 중국 현대영화의 새 장을 연 첸 카이거가 영상으로 옮긴 것이 바로 영화 <패왕별희>다.

  릴리언 리는 <패왕별희>의 두 스타 살로와 데이의 동성애적인 우정,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주산과의 사랑을 중국 현대사의 격변기 속에서 훑어가며 예술과 인간 그리고 중국의 역사를 살펴본다. 1924년의 군벌시대부터 문화혁명을 거쳐 1977년까지.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치부를 드러낸 이 소설이나 영화는 중국에서는 금지되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중화민국시대, 항일 전쟁시대, 중국 내전시대, 중화인민공화국시대, 토지개혁운동, 반우파운동, 문화혁명운동, 그리고 개혁개방운동의 시대를 거친다. 어린 시절, 매타작을 당하며 혹독한 훈련을 거친 뒤 중국의 민중 연극으로서 경극의 명성을 잇는 두 남자의 우정을 현란한 영상 속에 수놓고 있다. 굴곡 많은 중국사 속에서 남녀양성의 사랑을 간직하는 주인공이 끝내 경극과 우정의 순수함을 지키려 자살하는 끝 마무리는 비장하다.

  <패왕별희>가 중국 민중에게 사랑받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중국 옛역사의 초패왕과 그에게 죽음으로 사랑을 받던 우희의 절개가 무엇보다 크게 작용한다. 우리나라의 <춘향전>이나 일본의 <츄신구라>처럼 절개와 지조 그리고 충절이 무엇보다 동양인에게 으뜸되는 미덕으로 꼽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대목이다.

  특히 이런 충절과 애정을 주축으로 한 패왕과 우희의 옛 사랑의 패턴을 실생활에 있어 살로와  데이, 두 스타의 우정 혹은 동성애적인 관계 속에 현대적으로 옮겨 허구로 만든 것은 원작자 릴리언 리의 탁월한 상상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첸 카이거는 원작을 요령있게 요약하면서 그 재미와 경극의 절묘함을 영상에서 보여주는 데 성공한 것이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는 평범한 진리로 세계적인 평가를 얻은 것이다.

  <패왕별희>가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던 해에 우리의 <서편제>가 칸 국제영화제에 출품되었으나 아깝게도 예선에서 탈락하였다. 우리의 민족적인 판소리의 한이 세계성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커다란 교훈을 준다.

  그 교훈은 세계 영화제에서 어깨를 겨누려는, 또는 세계 영화시장에 뛰어들려는 한국 영화인 모두가 한번쯤 숙고해 보아야 할 점이다. <패왕별희>가 영화적 형식과 소재 양쪽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갖춘 작품이었던 데 반해 <서편제>는 그 둘을 다 결여하고 있었다면, 이제 우리 영화인들이 해야 할 일은 자명해진다.

<필자: 안병섭/영화평론가·서울예전교수>

 

 

96. <서편제>(1993) / 감독: 임권택

 

  열광 뒤의 외면, 외면 끝의 반성. 임권택의 <서편제>에 대한 우리 동네의 풍경이었다. 여하튼, 좌우지간에, 이 영화가 90년대 한국영화의 그물에 걸려든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물은 대체로 지겹도록 상투적이며 비린내가 풀풀 나는 것이지만 때로는 가장 중요하며 정확한 측정이다. 그래서 그물코 사이의 숭숭 뚫린 구멍을 빠져나간 영화들을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는다). <서편제>는 그 교직하는 그물에 포착된 것이고, 그 교직하는 품새를 우리는 비평적 틀이라고 부른다. 이 틀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이고 역사적이며 때론 폭력적이라서 투쟁이라는 한 마디로 압축하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앞질러 말한다면, <서편제>는 결코 임권택의 <만다라>를 뛰어넘지 않는다. 그러나 전자가 후자보다 앞서 보였던 것은 탄생의 시공간적 차이와 헐거운 비평작업 탓도 있겠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훨씬 투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투쟁은 참으로 정당한 부분도 있었지만 부당한 측면 또한 없지 않았다. 정당한 부분이란 '도대체 한국영화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응했다는 점이며, 부당한 측면이란 '오도된 민족주의 프로젝트'와 조응했다는 점이다. 물론 어떤 부분도 감독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이 영화는 패러디, 정형적인 내러티브의 파괴, 카메라 시점과 음향의 독특한 사용 등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당연히 현대영화라든가 현대영화의 탈을 뒤집어쓴 키치영화와는 더욱 더 거리가 있다. 사실이 그랬다. 현대영화처럼 외면당하지도 않았고, 키치같은 '대중적 돌파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감독이 <장군의 아들> 연작이라는 짧은 방황 끝에 유봉, 송화, 동호라는 소리꾼 일가를 통해 '소리'와 '우리'에 대해 말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를 두고 행한 발언의 정당성은 차치하고, 그 얘기가 왜 그다지도 위력적이었는가를 먼저 묻는다면 우리는 우선 한국의 영화역사와 역사를 떠올려야 한다. 60년대 초반에 잠깐 해보았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70, 8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는 잊어버렸다. 90년대에 들어와서야 이제 다시 그 질문(투쟁)을 하게 된 것이다. 얄밉게도 여기에 '오도된 민족주의 프로젝트'도 끼어 들었지만.

  그 질문은 쇼트와 쇼트들의 겹쳐짐 그리고 전체의 기(氣)를 통해 답해진다. 소리꾼의 내력, 실명의 내력, 후일담으로 이루어진 내러티브만으로는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다. 송화가 묻는다. 해가 졌냐고, 유봉은 해가 졌다고 말한다. 그 쇼트에 걸려든 것은 붉은 노을이다.  이것을 우리는 '내러티브가 뚝뚝 떨어지는 쇼트'의 한 예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내려오는 긴 화면 쇼트 하나(반영)와 마지막 송화와 봉수의 대결 몽타주 장면(묘사), 이것들은 독립적이라기보다는 연속됨으로써 빛을 발한다.  이도흠의 '화쟁 기호학'에 의하면 모방상과 굴절상의 행복한 만남이다. 마지막, 영화 전체의 기. 유봉과 송화의 삶은 '우리'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이며 다원주의적 가치관에 대해 '내'가 택할 수 있는 가치는 어떤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임권택은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의 출발에 초조하지 말고 벗어나려고 애쓰기보다는 가라앉아서 찾자고 말한다. 그것은 말로 형용하기

도 눈으로 찾기도 쉽지 않다. 아는 만큼 보일 뿐이다(?).

  물론 예술적 수사와 현실의 대응은 다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당시의 사회적 질문에 충분히 토론하지 않았다. 아니 벌써, '새로운 것'을 칭송하고 있다.  <서편제>는 그렇기 때문에 투쟁적이며 외로울 뿐이다. 우리는 정말 '공멸'을 원하는 것일까?

<필자: 이효인/영화평론가>

 

 

97. <피아노 The Piano>(1994) / 감독: 제인 캠피온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화감독 제인 캠피온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을 <피아노>의 위력을 빼놓은 채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는  이 영화로 칸영화제와 미국 아카데미영화제를 통해 세계적인 감독으로 부상했고, 그 여파로 한국의 극장들은 <내 책상위의 천사>나 <스위티> 같은 이전 영화들을 속속 불러들였다.

  그는 이제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영화산업의 지역적 변방성에 여성이라는 성적 변방성이 지운 이중의 한계를 극복한 대표적인 여성감독이 됐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엄청난 국가적 재정지원에 힘입은 오스트레일리아영화의 국제적 부상과 그 안에서 나날이 이루어지는 여성영화인구의 증가라는 빼놓을 수 없는 원인이 있었다.

  <스위티>에서 시나리오, 촬영, 편집을 여성들과 함께 한 그는 <피아노> 역시 여성제작자인 잔 채프만과 결합해 만들었다. 여성들로 일단 전선을 구축한 다음 여성을 주인공으로 해 여성의 삶과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그의 작업스타일인 셈이다.

  얼핏 보기에 진부한 삼각관계 이야기인 듯 싶은 <피아노>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식민지였던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시대와 공간이 여성에게 주는 억압, 특히 성적인 억압을 보여준다. 주인공 아다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새 남편과 아버지의 교환수단이 된다. 그리고 자기의 표현수단인 피아노는 자신의 허락도 없이 남편과 낯선 남자 사이에 거래된다.

  여기서 아다는 벙어리이다. 이 여성의 침묵과 피아노라는 표현수단의 설정은 억압적인 가부장제 언어체계 안에서 침묵이 저항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의 목소리는 그의 입술을 통하지 않고 그의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열정적인 피아노 소리로, 딸에게 보내는 신호로, 종이 위에 연필로 쓰는 글로, 연인의 몸을 쓰다듬는 손길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의 자기 표현이 남편에게 충분히 위협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은 남편이 그의 손가락을 잘라버리는 데서 확실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제인 캠피온은 아다의 성적, 정서적 각성을 왜 빅토리아 시대라는 이미 지나간 시대 속에 구조화시켰을까? 우선 빅토리아 시대는 여성성욕의 억압과 동의어인 시대다. 또한 남성지배적인 역사에서 여성의 경험은 거의 완전히 감추어져 왔고 여성들의 상상력을 해방시키고 현재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과거는 가장 흔한 공격대상이 된다. <피아노>가 한 여성의 과거에 대한 단순한 여성영화가 아닌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이 영화는 또한 남성들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어떤 것이 여성들의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지를 묻는다. 구획을 짓기에 익숙한 자본주의적 인물이자 도끼로 상징되는 스튜어트라는 남편을 버리고 원주민과 친한 베인즈를 아다가 선택하는 것은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될 만하다.

  할리우드적 관습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이용한 이 영화의 접근법은 분명 아직도 낭만적인  사랑의 각본을 믿고 싶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친근하게 다가가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필자: 변재란/영화평론가>

 

 

98. <용서받지 못한 자 Unforgiven>(1993) /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1960년대를 뒤흔든 미국의 사회운동은 보수적인 할리우드를 변화시켰다. 1967년, 아서 펜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할리우드 영화의 틀이 돼 온 장르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장르영화 가운데 가장 먼저 틀을 갖추었고 가장 오랫동안 만들어진 서부영화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1930년대와 40년대를 거치면서 탄탄하게 구축됐던 '고전 웨스턴'의 틀을 벗어버리고, '수정주의 웨스턴'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의 세르지오 레오네는 1964년부터 '달라 3부작'(<황야의 무법자> <속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을 차례로 만들었고, 서부영화의 변종격인 마카로니 웨스턴이 탄생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마카로니 웨스턴의 상업적 성공과 함께 스타가 됐다. 바로 그가 환갑을 바로 지난 1992년에 <용서받지 못한자>를 만들었다.

  이스트우드가 연기하는 윌리엄 머니는 과거에는 살아있는 것을 모두 죽인 무법자였지만, 지금은 두 아이와 함께 돼지를 기르며 살아가는 평범한 노인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1천달러의 현상금 소식을 들은 머니가 다시 총을 잡고 보안관 일당을 모두 처치하는 것이 전부다. 본격적인 이스트우드의 관심은 두가지다. 자신의 스타 이미지와 장르로서의 서부영화를 노인의 눈으로 성찰해보려는 것이다.

  윌리엄 머니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과거의 모습은 이스트우드가 마카로니 웨스턴에서 구축했던 무법자의 이미지다. 누더기 망토를 걸치고 시가를  질겅질겅 씹으며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자랑하던 그는 지금 말에서 떨어지고 총알은 번번이 빗나간다. 그는 젊은 카우보이에게 말을 타고 신나게 총을 쏜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무법자와 살인에 관한 대화가 지루할 정도로 계속된 다음, 마지막 총격전 장면이 시작된다. 머니는 보안관과 그의 부하 네 사람을 순식간에 해치운다. 서부영화다운 멋진 총격전에서 관객들이 통쾌함을 느끼지 못하고 거듭 성찰하게 되는 이유는 뇌리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은 대화들 때문이다. 비가 내리는 밤에 초라하고 쓸쓸하게 떠나가는 머니의 모습은 정의를 구현하는 당당한 서부영화의 영웅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의 다른 장치들은 이분법으로 구축된 서부영화의 틀을 뒤집는다. 정의를 구현하는 보안관은 법을 이용해 잔인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인물이고, 명사수로 명성이 자자하던 잉글리시 밥은 허풍이 심한 비겁자로 밝혀진다. 불의에 분노하는 장본인은 매춘부들이다.

  1960년대의 젊은이들에게 '서부'는 때묻지 않은 순수의 상징이며, 이상향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제 그런 서부는 죽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무덤을 파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살인강도 머니를 그토록 사랑해 주었던 여자 클라우디아는 이미 죽어 있다. 따라서 그의 진짜 관심은 존 포드의 <추적자들>이나 세르지오 레오네의 <옛날 옛적 서부에서>처럼 서부 영화 장르를 성찰하고 해체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비춰지는 오염된 세상으로 현실을 은유하는 것이다. 그는 옛날의 완벽한 세상, '퍼펙트 월드'를 꿈꾸는 순수한 보수주의자인 셈이다.

<필자: 김경욱/영화평론가>

 

 

99. <스모크 Smoke>(1995) / 감독: 웨인 왕

 

  세계 영화사를 빛내는 100편의 영화. 왜 <스모크>가 끼어들었을까? 중국계 미국인 감독의 영화라서가 아니라 색다른 미국영화, 그것도 무척이나 따뜻하고  눈물겨워서 웨인 왕이 나눈 다섯개의 분절 속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비유를 동일성쯤으로 다루는 허술함을 내비치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바로 <성난 황소>와 맞바꿀 수 있다. 아니, 좀더 무리를 하자면, 어두운 삶의 황량함을 그린 <대부>와 살아가는 방법과 답이라곤 도대체 모르겠다고 구시렁거리는 <비열한 거리>(마틴 스코시즈)를 돌아서 나와 굽이굽이 뻗어 있는 <파리 텍사스>(빔 벤더스)의 쓸쓸함으로 침몰하거나 또는 <인생>(장이모)이 내비친 중국인 특유의 역사성 새옹지마를 뉴욕에서 원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영화적 맥락은 정당하지 않다. 영화 한 편은 자기만의 고유한 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의의 영화적 맥락은 한 작품이 지닌 체계와도 교통한다.

  그렇다. 오기는 좀도둑 소년의 지갑을 돌려주러 갔다가 카메라를 훔쳐 나오고 그 덕택에 작가인 폴은 비명횡사한 아내의 사진을 보게 되고, 흑인 소년 라시드 덕택에 교통 사고를 면한 폴은 라시드가 저지른 일로 봉변을 당하고, 또 라시드는 오기의 담배 가게에서 사고를 치게 되지만 라시드가 내놓은 돈으로 오기는 과거  애인과 황폐해진 딸에게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된다. 뉴욕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여기에서 인종의 경계는 무너진다. 하지만 그 무너짐은 상투적인 화해가 아니며 상대에 대한 인정과 관용에서 비롯한다. 라시드는 흑백 구역으로 나눠진 그곳을 다른 은하계라고 표현하면서 '그것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폴에게 경고하지만, 바로 그 장면에서 폴의 심정은 셔츠를 촉촉하게 적시는 여름에 하염없이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 같다. 후경에 자리잡고 돌아가는 선풍기는 이미 등장했던 피사체다.

  그것은 선풍기로 나타나지 않고 라시드가 시침을 뚝 떼고 12년 전에 헤어진 아버지의 자동차 수리점 앞에서 앉아 있을 때, 차고 앞으로 삐죽 나와 있는 적당히 낡은 흰 차 밑에 포진하고 있는 그림자로 나타났다. 그 어둠은 부자의 비밀과 은밀한 삶의 쓸쓸함을 모두 감싸고 있다. 쨍쨍 내리쬐는 햇빛 속에 드러난 아버지 사이러스의 황량하고 황당해하는 표정을 뒤로 하고 라시드는 그 풍경을 그린 흑백 그림을 차고 안에 집어넣고 나온다. 그 흑백 스케치에 의해 풍경은 살아난다. 이후 사이러스는 라시드가 아들인 것을 알고는 그 큰 주먹으로 친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마지막 분절 '5. 오기' 부분은 성탄절을 앞두고 폴이 이야기를 요청하는 장면이다. 폴은 담배를 줄이고 이제 둘만 남았다. "세명은 성가시지만" 참 쓸쓸하다. 오기는 카메라에 얽힌 비밀을 털어놓고 창피해한다. 카메라는 고정 상태에서 오기를 대상으로 근접 이동한다. 웨인 왕은 이 영화에서 3번째 쓰고 있다. 눈이 촉촉해진 폴은 친구니까 괜찮다, 그것이 인생의 가치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에필로그. 16개의 쇼트로 구성된 흑백 장면과 속을 뒤집어 놓는 음악. 대부분이 풀 쇼트이거나 그보다 크다. 임대주택 단지의 겨울 나무들을 훑는 롱 쇼트 한 개를 빼고는. 서로가 속는 체하며 위로를 주고받는 흑인 할머니와 오기. 마지막, 오기가 카메라를 들고 문을  나설 때 고리를 여는 소리와 문 여닫는 소리는 살아난다. 질문에서 주장으로, 운문에서 산문으로 이동한다. 여균동에게서 인용하자면, 인간의 시선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변할 것이고 살 만하다. 바로 그 얘기다.

<필자: 이효인/영화평론가>

 

 

100. <언더그라운드 Underground>(1995) / 감독: 에밀 쿠스트리차

 

  D.W 그리피스에서 시작된 영화기행이 에미르 쿠스투리차에서 끝난다. 지난 1백년간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그리고 영화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연히도 <언더그라운드>의 탄생은 영화탄생 1백년과 겹친다. 또한 95년은 성공적이라는 디지털 영화 <토이 스토리>가 제작된 해로 그것이 예시하고 있는 미래의 영화는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래프가 지향했던 사실주의나 멜리에스의 바이오스코프식 판타지라는 관행적 이분법을 분명 무색케 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제작된 <언더그라운드>도 영화 속의 인물 마르코가 티토를 만나는 컴퓨터 합성장면을 삽입해, 말하자면 아날로그와 디지탈의 접합에서 새로운 영화적 현실감을 구성하고 있다. 상당수의 사람들을 감동케도 하고 격분시키기도 했던 <언더그라운드>에서 가장 오해(혹은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바로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현실을 뒤섞어 이제는 사라진 유고의 과거와 현재에 개입하는 방식인 듯하다.

  영화는 시간과 장소를 명시하고 시작한다. 1941년 독일에게 점령당한 유고의 베오그라드. 무기밀매를 하던 블래키와 마르코는 지하실에 무기생산고를 만든다. 이로부터 3년후, 마르코는 블래키를 독일군으로부터 구출해 지하실로 숨게 한다. 하지만 유고가 해방된 후에도 마르코는  지하실 사람들을 속여 계속 무기를 만들게 하는 한편 블래키가 사랑하는 여자 나탈리아를 빼앗고, 티토의 측근이 되어 부와 명예를 누린다. 블래키의 아들 요반의 결혼식날 언더그라운드는 사고로 파괴되고 아직도 전쟁이 진행중인 것으로 믿고있는 블래키는 자신의 영웅담을 영화화하고 있는 촬영현장에 도착해 진짜 총을 발사한다. 1992년 다시 전쟁에 휩싸인 베오그라드. 마르코와 나탈리아는 블래키의 지하군에 의해 살해된다. 마지막, 블래키의 죽음에 의해 잉태된 꿈의 장면, 모든 죽은 사람들이 햇살 밝은 곳에서 축제를 벌이는데 그들이 딛고 있는 땅이 육지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이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표현물질들 즉 신파조의 연극, 영화 속에서 제작되고 있는 영웅주의적 가짜 영화, 실제 뉴스릴  속에 삽입된 가상상황과 인물들은 1941년에서 1992년이라는 명시된 역사적 시간과 베오그라드라는 구체적 공간과 땅위 현실 세계로부터 망각된 언더그라운드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또한 <언더그라운드>는 균질적인 리얼리즘의 언어 대신 불경스럽게 보이는 이질언어들을 동원해―한 비평자는 니체적 욕망, 디오니소스주의의 언어로 파악하며 쿠스투리차 자신은 집시의 문화, 이교도적 문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현실과 몽상, 창조와 파괴, 역사와 종말, 진실과 거짓 그리고 인간성과 야수성이라는 범주들의 경계를 와해시키고 있으며(하지만 결코 성차의 문제는 탈경계화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 붕괴의 와중에서 잉태되는 절망과 희망 또 그 이후를 그려내고 있다.

  영화가 뤼미에르식으로 발전, 진화해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쿠스투리차의 영화는 분명 이단이다. 또 현실의 자명성과 역사의 텔로스를 믿는 이들에게 쿠스투리차의 뫼비우스 띠는 필경 재앙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바로 그러한 이단과 재앙이 일으키는 혼돈 속에서 생성되는 질서를, 즉 종말과 유토피아가 맞닿아있음을 에필로그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더그라운드>를 세기말에 대한 그리고 이제 1세기를 막 넘긴 영화라는 매체가 직면한 위기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어도 과잉독해는 아닐 것이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건국과정을 인종차별주의를 전혀 숨기지않은 채 과시했던 그리피스의 <국가의 창생>으로부터, 인종분쟁으로 분화된 옛 유고를 애탄하는 <언더그라운드>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얼마나 멀고도 가까운 길을 걸어왔는가. 20세기 그 1백년간 영화는 역사와 문화를 재구성해 왔고, 스크린은 컴퓨터의 윈도 체계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세상과 관객을 잇는 인터페이스로 기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창이며 거울이라는 것은 은유 이상이다.

<필자: 김소영/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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