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톨러런스 Intorelance>(1916) / 감독: D.W. 그리피스
왜 D.W. 그리피스인가?
우리는 이 시리즈가 왜 미국 영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리피스로부터 시작하는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그의 영화 <국가의 탄생>(1915)은 미국의 지배적 신화를 국가의 탄생에 관한 것으로 만든 작품이다. 이후 서부극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장르 영화들이 이 신화를 재구축해 나갔고, 할리우드가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영화가 미국을 만들어 나갔다는 역설은 그리피스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그리피스는 할리우드가 전세계 영화 시장을 헤게모니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감독이다.
켄터키주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책 외판원으로 인생을 시작해,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 된 그리피스는 월트 휘트먼의 애독자였다. 그는 특히 '역사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된다'는 휘트먼의 시집 <풀잎>의 한 구절을 늘 외우고 다녔다. 그런데 드디어 그 구절을 영화화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에게 엄청난 명예와 부를 안겨다 준 <국가의 탄생>이 그 인종차별적 색채로 말미암아 흑인 인권 운동가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쿠클럭스클랜(KKK)단을 옹호하다가 궁지에 몰리게 된 그리피스는 오히려 흑인들이 자신에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러한 무자비한 불관용이 전 인류사를 통해 반복되었으며 그래서 역사가 그 목적을 잃게 되었다는 자기방어적인 작품을 들고나왔다. 그것이 바로 <인톨러런스(불관용)>(1916)이다.
네 가지의 이야기들이 평행 몽타주로 전개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작품 <인톨러런스>에는 20세기초 미국의 한 젊은 연인들의 고난과 1572년에 일어난 위그노 학살, 예수의 삶에 대한 에피소드, 그리고 페르시아 왕에 의해 함락되는 바빌론이 동시에 등장한다. 즉 시간적으로는 고대의 이교도들과 유대기독교 시기 그리고 르네상스와 현대가 한꺼번에 다루어지고, 공간적으로는 오리엔트에서 시작해 지중해와 서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이동하는 제국들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그 당시 미국 관객들에게 이미 친숙한 여러 영화들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필름 다르'(예술 영화)와 고몽사의 작품들, 이탈리아의 스펙터클 등이 각 에피소드들마다 적절하게 인용된 이 영화는 유럽 영화를 미국식으로 길들이려는 그리피스의 야심에 찬 스펙터클이며, 특히 둥근 기둥에 코끼리들이 늘어선 거대한 바빌론 세트 장면은 이후 "할리우드 바빌론(탐욕과 악의 상징)"이라는 미국 영화산업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이 바빌론에서 그리피스는 바벨탑의 붕괴 이후 잃어버린 보편적 언어의 복권을 열망했고, 그것이 바로 미국 영화의 언어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의 세계 영화 시장은, 그의 그러한 요구에 충분히 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 김소영/영화평론가>
2.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The Cabinet of Dr. Caligari>(1919) / 감독: 로베르트 비네
영화사를 통해서 1920년대 유럽만큼이나 영화매체의 독자성을 밝히기 위한 실험이 활발했던 시기는 없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러시아의 형식주의, 그리고 독일의 표현주의가 그 시기 영화의 대표적인 경향들이다. 그들의 공통분모는 현실을 재현하는 영화매체의 기존의 속성에 도전해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낯설게 바라보도록 영상의 내재적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 것이다.
1919년에 제작된 <칼리가리박사의 밀실>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모태가 된 작품이다. 그 서사와 시각적 특성은 당대의 가장 실험적 양상의 하나로 꼽히며 이후 수년간 지속된 표현주의 영화경향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영화는 주인공이 칼리가리라는 연쇄살인범을 회상하며 얘기해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에 따르면 칼리가리는 몽유병자에게 최면을 걸어 자신의 친구를 죽이고 여자친구를 유괴한다. 그의 추적 끝에 칼리가리는 18세기에 있었던 대리살인을 재현하고자 하는 강박관념에 빠진 정신병원의 원장임이 밝혀진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이제까지 이 이야기를 해준 주인공은 사실 정신병원의 환자이며 칼리가리는 그를 담당한 의사라는 것이 드러난다. 주인공은 병실로 끌려가며 소리치고 의사 칼리가리는 그제야 그의 병증을 이해했다고 한다.
이 마지막은 관객을 당황시킨다. 관객은 이제까지 보고 들은 것이 미친 자가 꾸며낸 망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러면서도 그가 정말 미쳤는지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관객의 의구심을 누르는 것은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이다. 영화의 장면화는 현실감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형태와 색채를 통한 왜곡, 구성의 부조화 등 당대의 표현주의 회화의 특성이 세트 곳곳에 그대로 살아 있다. 평면적으로 그려진 세트에는 원근감이 과장되어 있고 사물의 형태가 각지거나 왜곡되어 있다. 인물 또한 분장이나 의상을 통해 그 세트의 일부처럼 기능한다. 조명은 명암의 대조가 극단적으로 이뤄져 있으며 연기 또한 극히 기교화되어 있다.
이런 극히 양식화된 장면이 창조하는 것은 현실과는 먼 환상세계이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서 공간의 표현이란 곧 정신의 표현이다. 즉, 영화 속 공간에 합리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불안과 과대망상증으로 가득찬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 광인의 이야기가 시각화돼 표현주의 영화의 모태가 된 것은 헤르만 바름 등 세트 디자이너의 역할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도 제작자 에리히 포머의 역할이 컸다. 칼리가리가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미친 악당으로 되어 있는 원래 각본을 뒤집어 주인공을 광인으로 설정한 것도 그였으며, 세계시장을 지배하던 미국영화와 경쟁하기 위해 예술적인 영화를 만들고자 표현주의 회화기법을 영화에 끌어들인 것도 그의 결정이었다.
포머의 그런 결정은 이 영화의 해석에 흥미 있는 변수가 된다. 원래 각본의 의도는 어쩌면 개인의 자유가 폭정적 권력에 의해 남용되는 것을 비판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완성된 영화는 폭정적 권력이 어쩌면 개인들에게 유익할지도 모른다는 시사를 한다. 이는 당시 독일인물의 의식 저편에 있는 불안과 공포심을 암시한 것이며, 칼리가리라는 인물을 통해서 히틀러의 등극을 예시했다는 이 영화의 의미를 명확히 해준다.
<필자: 주진숙/영화평론가>
3. <북극의 나누크 Nanook of the North>(1922) / 감독: 로버트 플래허티
로버트 조지프 플래어티(1884∼1951)의 '기념비적' 다큐멘터리 <북극의 나누크>는 1922년에 만들어졌다. 설원에 사는 에스키모인 나누크와 그의 가족의 생활을 그린 이 영화는 당시 파테영화사에 의해 미국과 캐나다 전국에 배급되어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고 유럽, 러시아, 일본 등 전세계에서 상영되었다.
<북극의 나누크>는 일반극장에 흥행 목적으로 배급된 최초의 장편 기록영화였고 에이젠슈테인을 비롯한 당대의 러시아 영화인들로부터 1960년대의 다큐멘터리 감독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북극의 나누크>가 1920년대 관객들의 관심과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다. 이 영화는 낯선 풍물과 이국적인 삶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대중매체로서의 영화를 발명한 그 순간부터 카메라는 '구경거리'를 찾아 전세계 곳곳을 누볐고, 1920년대까지는 "미개인의 기이한 풍습"류의 짤막한 영화들을 보는 데 관객들이 익숙해져 있었다. 아직 '다큐멘터리'라는 용어와 개념이 나타나기 전이었지만 카메라가 잡은 생생한 현실을 보고 즐기는 관객층은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관객들에게 <북극의 나누크>는 익숙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영화였다. <북극의 나누크> 이전의 기록영화들은 모두 20분 미만의 짧은 길이였고 춤, 제의, 전투 등의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다룬 것들이었다. 1910년대 극영화에서는 이미 장편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촬영, 편집, 극적 구성 등에서 많은 테크닉이 개발돼 일반화되고 있었다.
<북극의 나누크>는 바로 이런 극영화기법을 기록영화에 적용하여 커다란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영화에는 관객들의 관심을 끌고가는 주인공이 있고(순박하고 유능한 에스키모인 나누크), 쉽게 공감할 수 있는주제가 있으며(혹독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투쟁), 유머러스한 장면과 긴장된 장면을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줄거리의 전개가 있다.
측량기사 출신인 플래어티는 광물탐사를 목적으로 캐나다 북부지방을 여행하며 에스키모들의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탐사작업 틈틈이 에스키모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던 것에서 출발해 그는 그들의 삶을 영화로 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플래어티 연구가들에 의하면 그는 처음부터 이 영화를 장편으로 만들어 극장에 배급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점에서 플래어티는 오늘날 독립영화작가들의 원형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북극의 나누크>의 성공은 플래어티에게 그가 바라던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예술가로서 영웅대접을 받았고 그의 명성은 <모아나><아란의 사람들> 등 이후 그가 만든 영화를 통해 확고해졌다.
그의 영화들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대상인 인간에 대한 애정과 장기간의 현지 조사를 통한 사전작업은 다큐멘터리 영화작가들에게 모범을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 체계적인 방법론의 구축보다는 주관적이며 감성적인 문화의 이해에 의존한 점, 살아 있는 문화를 필름에 담기보다는 이미 사라져버린 원형의 복원에 집착한 점은 많은 비판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필자: 김홍준/영화감독>
4. <마지막 웃음 Der Letzte Mann>(1924) / 감독: F.W. 무르나우
독일 표현주의로 불리는 1919∼25년 시기의 영화들은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프리츠 랑의 <숙명>(1921)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신화로 남은 역사의 사건들을 재구성하는 역사물들이다. 둘째는 표현주의 연극의 무대장치와 연출에 의해 영향받은 괴기스럽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영화들로, 이 부류의 대표작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이다. 마지막 세번째 부류는 막스 라인하르트의 연극에서 비롯된 이른바 '실내극 영화'들이다.
실내극 영화들의 특징은 다른 표현주의 영화들과는 달리 특정한 시간·공간 속에서 대개는 사회에서 중간계층 이하인 인물들의 행위와 심리가 단순한 내러티브(이야기)에 의해 전달된다. 실내극 영화의 부류에 포함되는 '거리영화'들을 예로 들면 대부분이 가속화하는 근대화에 편승해 헛된 꿈을 좇는 남자들에 의해 버림받는 비극적인 여자주인공들의 이야기로,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의 종래적인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무르나우의 1924년작 <마지막 웃음>은 폴 레니의 <뒷계단>(1920), 루푸픽의 <파편>(1921)과 함께 실내극 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다른 두 편과 마찬가지로 칼 마이어가 시나리오를 쓴 <마지막 웃음>은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호텔 도어맨(에밀 제닝스 연기)이 나이 들어 화장실 조수로 밀려나자 주위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게 되는데 화장실을 사용한 미국인 백만장자의 뜻하지 않은 유언(화장실에서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을 지켜본 사람에게 유산을 남겼다)에 의해 비참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해피 엔딩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웃음>은 관객들에게 씁쓸한 웃음으로 영화의 마지막을 지켜볼 수밖에 없게 한다. 영화 내내 관객들로 하여금 늙은 도어맨의 좌절과 비참함을 공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도어맨이 유니폼을 벗을 때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사용한 자막을 통해 "그를 불쌍히 여긴다"고 말하고, 이 자막은 부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하락하게 되는 중산층에 대한 감독의 연민을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웃음>이 영화사에서 자리매김되는 이유는 1920년대 독일 사회가 직면하게 된 중산층의 부상을 사회적·정치적 맥락에서 관객들에게 설명함에 있어서 뛰어난 카메라 테크닉과 주인공의 심리묘사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마지막 웃음>은 영화에 대한 가장 일상적인 질문인 영화의 주제와 형식의 일치의 중요성에 대한 하나의 모범답안일 수도 있다.
영화의 시작은 자전거에 장치된 카메라가 호텔의 엘리베이터와 회전문, 그리고 화려하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로비 등을 자유롭게 다니며 도시화, 근대화가 대두하는 당시 사회상을 엿보게 한다. 칼 프룬드가 촬영한 이 도입부분은 도어맨이 처하게 된 피할 수 없는 어두운 운명을 예시하고 있다. 영화사에서 유명한 도어맨이 술에 취한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도어맨의 가슴에 매달려 세트를 비틀거리며 휘젓고 다니는데, 이는 도어맨의 심리적 불안과 함께 당시 중산층 계층의 불안정한 위치를 말해준다.
<마지막 웃음>은 감독 무르나우, 카메라맨 프룬드, 작가 마이어에 의해 고안된 영화적 테크닉에 의한 내러티브의 성공적 재현으로 찬사를 받고 있고, 영화사가들은 이 영화가 그리피스의 카메라 트래킹과 시점 편집을 발전시켜 더 정제된 영화문법으로 정착시키는 데 공헌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필자: 문혜주/영화평론가>
5. <황금광 시대 The Gold Rush>(1925) / 감독: 찰리 채플린
찰리 채플린은 188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977년 88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2살 때 극단의 아역배우를 시작으로 유리공, 이발사, 팬터마임 배우 등을 전전했으며 네번 결혼과 한번 약혼에서 열명의 자녀를 생산했다. 1910년 팬터마임 배우로 미국에 발을 디딘 뒤 40여년간 미국에서 살다가 47년 할리우드의 '빨갱이 사냥'에 걸려 52년 추방당했다. 평생 동안 그는 81편의 작품에 관여했는데 이중 70여편이 자신이 직접 감독과 주연을 겸한 것이었다.
<황금광시대>(1925)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고 지금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화다. <시티라이트>(1931)가 자본주의가 이미 자리를 잡은 도시의 쓸쓸한 풍경이자 돈과 인격에 관한 수채화라면 <황금광시대>는 황금을 쫓아 부나방처럼 헤매는 인간들을 그린 흑백사진이다. <모던 타임스>(1936)가 자본과 권력에 대한 비판의 시작이라면 <황금광시대>는 공격을 위한 몸풀이다. 채플린의 5대 희극 안에는 이 세편 외에 <독재자>와 <무슈 베르두>가 추가된다. 그리고 이 희극 5편은 채플린 최고의 영화들 속에 포함된다. 채플린은 삶과 사회에 대해 지극히 비관적이었던 대신에 그것을 묘사하는 무기로 웃음을 선택한 셈이었다. 물론 그가 웃음을 택했던 것은 불우했던 시절에 대한 회상을 거부했던 심리와 철벽 같은 세상에 대한 전술이었겠지만 이 속에 상업주의적 타협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밝은 화면과 또렷한 사물들, 그리고 사건 위주의 단순한 이야기 구조 등 그의 영화는 당시 할리우드의 모두가 그랬듯 예술보다는 상품에 가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채플린의 영화들, 특히 <황금광시대>가 세상을 향해 내쏘았던 질타는 사회비평적 모범으로서 이후의 영화에 끊임없이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정신적인 부분과 더불어 우리는 어두운 도시를 배경으로 한 많은 현대영화에서 채플린 영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찰리는 지독한 굶주림 때문에 구두를 삶아 먹으며 구두창의 못을 뼈다귀처럼 핥고 찰리의 상대편에 있는 사람은 찰리를 닭으로 착각하고 덤빈다. 금광을 발견한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싸우지만 현실(눈사태)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찰리는 어느 오두막에 들어가 고달픈 육신을 달래지만 이제 그에게는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온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고 현실은 언제나 초라했으며 욕망은 항상 아귀처럼 달려들었다. 그래서 찰리로 나온 채플린은 웃음으로, 엉뚱한 댄스스텝으로, 초라함과 낭만이 가득찬 풍경으로 그것에 대항했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채플린이 금광을 발견한 사람의 동료가 되고 게다가 아름다운 주점 무용수를 품에 안고 행복한 웃음으로 키스를 나누려는 장면으로 끝난다. 원래는 우수와 비애로 가득한 사회비판적 영화였는데 채플린 역시 할리우드 사람답게 할리우드의 고색창연한 행복한 결말의 관습을 이어받았다. 상업주의와 야비하게 타협한 셈이었다.
채플린은 그뒤 <시티라이트>에서 최대의 서정으로 현대를 그린 뒤 <모던 타임스>에 가서 구체적인 비판을 시작한다. 이것은 <독재자>(1940)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짧은 콧수염의 히틀러와 찰리, 찰리는 꽉 죄는 윗도리와 헐렁한 바지, 그리고 군함만한 구두와 대나무 지팡이로 히틀러에 대항했다. 남들은 현재에 안주할 나이, 쉰살 때의 일이었다.
이런 채플린이 두번째 부인 리타 그레이와 몰래 결혼하고 <황금광시대>를 만들 때, 절망한 독일의 영화 예술가들은 <마지막 웃음>(1924)을 만들거나 필름 느와르의 원조격인 <활기없는 거리> 등을 만들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나운규가 <아리랑>(1926)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가 이제 막 근대영화의 진입단계에 다다랐을 때였고 그뒤 각 나라의 영화역사는 나라 사정에 따라 제각기 걸음을 내딛었다. <황금광시대>는 이러한 영화역사의 비극성과 현대의 비극성 모두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필자: 이효인/영화평론가>
6. <전함 포템킨 Bronenosets Potemkin>(1925) / 감독: 세르게이 에이쩬슈테인
장 누아르와 그리피스 그리고 에이젠슈테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서양 영화 초창기의 맥락과 영화이론을 이해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 서양 영화가 동양영화에 끼친 영향을 생각할 때 비록 그 영향이 때로 강압적이었더라도 이 세 감독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거쳐야만 할 과제이다. 특히 에이젠슈테인이 사회주의 영화를 대표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한, 타락한 영화세상에서 사회주의 영화를 통해 어떤 희망적 단서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찾아가곤 했다. 그 대표작이 바로 <전함 포템킨>(1925)이다.
전함 포템킨의 수병 반란, 그리고 오데사 계단에서의 대학살극이 <전함 포템킨>을 이루고 있는 핵심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화가 무기가 될 수 있으며, 대중교육책이며, 뛰어난 선동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루는 억누르는 전함의 장교와 억눌리는 수병들, 압살하는 백군 기병대와 코사크 군대와 피를 흘리는 인민들, 모든 것이 극단적인 대조를 통하여 표현된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즐겨 그렸고 극장의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던 에이젠슈테인에게 그러한 서술상의 대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정작 에이젠슈테인을 에이젠슈테인으로 만든 것은 그의 화법이었다. 그것은 흔히 몽타주로 알려진 것이다.
그의 선배 프도프킨이 필름의 결합을 통해 서술적 의미의 확대와 강조를 꾀했다면 에이젠슈테인은 두개의 대조적인 쇼트들을 통합해 새로운 개념을 창조했다. 코사크 병사가 내리치는 칼, 깨어져 뒹구는 안경, 피 흘리는 여인 얼굴의 클로즈업…. 이런 편집을 통해 에이젠슈테인은 상황묘사라든가 감정의 고조를 넘어서서 관객들에게 단호한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는 논리로 떨쳐나갔던 것이다. 물론 그는 이 오데사 계단 장면뿐만 아니라 많은 장면에서 여러 대의 카메라를 설치해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크기로 쇼트들을 찍었다. 그는 찍힌 것을 어떻게 편집하느냐가 영화 창작의 처음이자 출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함 포템킨>은 이렇게 포템킨호의 선상 반란에서 시작하여 오데사 계단 그리고 마지막 승리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쇼트도 낭비하지 않으면서 영화를 끌어간다. 서구 무성영화 특유의 지루하고 나른한 느낌은 이곳에서 찾을려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몽타주론에 대한 비판 역시 만만치 않았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1929) 등에 대한 비판은 끝없이 이어졌고 그는 자신의 몽타주론을 완성하기 위해 낮에는 소련영화학교의 강단에서, 밤에는 연구실에서 일했다. 급기야 그는 형식주의자로 매도당했고 어떤 영화는 정부에 의해 제재를 당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위대한 사회주의'를 믿었지만 그것을 온순하게 따르는 멍청한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형식을 연구하는 사람을 형식주의자라고 한다면 매독을 연구하는 사람은 매독주의자다"라고 항변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이후는 불행으로 이어졌다.
결국 <전함 포템킨>은 소련 영화의 명예로 남아 있을 뿐 자신의 조국에서는 이어지지 않았다. 또 그의 독특한 인물 전형화론 등의 이론은 이제 후학들의 과제로만 남아 있다. 역설적으로 그의 몽타주 기법과 사회의식은 1930년대 영국의 사회적 다큐멘터리로 전수되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제 거의 모든 할리우드 영화가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그의 편집 기법을 써먹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몽타주론은 이 타락한 영화세상 만큼 통속화되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흥행작들이 영화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다시 <전함 포템킨>을 읽어야 한다. 고전이라서가 아니라 영화를 통해 세상과 아이들의 미래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뜻에서다.
<필자: 이효인/영화평론가>
7. <어머니 Mat>(1926) / 감독: 프세볼로트 푸도브킨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는 러시아의 혁명문학 중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일 것이다. 프세볼로트 푸도프킨(1893∼1953)의 <어머니>(1926)는 바로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무성영화의 걸작이다. <전함 포템킨>이 시종 망치로 때리는 듯한 충격을 안겨주는 숨가쁜 영화라면 <어머니>는 서정을 통해 격정을 쌓아가는 질긴 밧줄과 같은 영화이다.
푸도프킨과 시나리오작가 자르히는 고리키를 영화로 옮기면서 원작의 이차적인 이야기는 과감히 버리고 등장인물의 수를 줄이는 대신 날카로운 갈등을 중심으로 한 극적구조를 부각시켰다. 그들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한 가난하고 무식한 노동자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어떻게 혁명의 길로 나아갔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고리키의 깊이와 넓이를 희생시키는 것이었지만 무성영화로서 극적 혁명적 효과를 달성하는 데는 최선의 방법이었는지 모른다. 영화는 의식적으로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술집과 집과 공장의 파업을 오가는 도입부의 알레그로와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장례식의 아다지오, 수색·배반·체포·재판·감옥생활을 그리는 알레그로와 해방·시위·폭동·아들과 어머니의 죽음을 그려나가는 격렬한 프레스토의 차례로 영화는 연주된다. 이 계산에 의해 푸도프킨의 <어머니>는 보는 이의 감정곡선을 정확하게 조절하는 뛰어난 운율의 영화이며 성격과 사건과 극을
하나로 엮어나가는 탁월한 비극이기도 하다.
에이젠슈테인, 도브첸코와 더불어 소련 무성영화시대의 3대 거장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푸도프킨은 물리학과 화학을 공부한 과학도였으며 시·회화·연극·연출 등 여러 예술분야를 두루 섭렵한 재기 넘치는 예술가였다. 그는 러시아 몽타주의 아버지 쿨레쇼프의 수제자로 소련 영화의 중심으로 진입했는데, 엑센트릭한 단편 <체스열기>와 과학영화 <뇌의 역학>에 이어 만든 <어머니>는 사실상 그의 첫 장편이었다.
<어머니>에는 그의 이런 예술적 역정들이 창조적으로 담겨 있다. 예컨대 재판장면은 톨스토이의 부활장면의 재창조이며, 감옥에서의 원운동장면은 명백히 반 고흐의 '감옥 안마당'에서 따온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타마리나가 연기한 어머니의 형상에는 드가와 청색시대의 피카소와 콜비츠의 판화가 응축되어 있다. 그 자신 배우이기도 했던 푸도프킨은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사실주의 연기전통을 고스란히 영화에 가져옴으로써 뛰어난 심리적·서정적 효과를 창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를 세계영화사의 걸작으로 만든 기본요인은 탁월한 몽타주에 있다. 서정과 서사, 배우의 연기와 편집, 세부와 전체, 심리와 카메라의 시선, 긴 흐름과 짧은 단절을 적절히 교차·병치·조합하는 그의 몽타주는 에이젠슈테인과 또다른 특징을 갖는 것이다.
흔히 그의 몽타주이론을 연계의 몽타주라고 단순화하나 이는 옳지 않다. <어머니>의 마지막 부분인 시위와 학살과 투쟁의 장면은 '오뎃사 계단' 못지않게 충격적이다. 사실 그와 에이젠슈테인의 본질적 차이는 후자가 몽타주를 영화의 방법론으로 접근했다면 그는 서술의 기술로 간주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듯한 차이는 결과적으로 세계영화사에의 평가를 가르고 말았다. 그의 영화는 30년대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영화의 한 전범으로 평가받았으나 정작 그 자신은 발성영화가 도입된 뒤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다. 이 아이러니는 물론 스탈린주의에 의한 억압 탓이기는 하나 기술적 실험과 타협을 맞바꾸고자 했던 그의 쇠약한 예술혼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필자: 이정하/영화평론가>
8.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1927) / 감독: 프리츠 랑
영화가 역사 바깥에서 만들어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만일 볼셰비키혁명이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을 만들었다면,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는 나치즘을 '예언'하는 것이었다.
브레히트의 친구였으며, 루카치가 증오하는 예술가였고, 벤야민이 찬미했으며, 아도르노가 비난했던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대가 프리츠 랑(1890∼1976)은 건축학과 미술을 공부했으며, 괴테와 말러의 찬미론자였다.
그의 꿈은 원래 화가였으나 1차대전 참전중 부상으로 후송되어 병원에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독일 영화의 거물 프로듀서 에리히 포머를 알게 되었고, <마브세 박사>(1924)를 만들면서 프리드리히 무르나우와 함께 독일 무성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러나 무르나우가 회화적인 표현주의를 추구했다면, 랑은 건축적인 표현주의 양식을 완성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촬영감독 카를 프로인트와 귄터 리타우, 미술감독 오토 훈트와 에리히 케텔후트, 카를 볼프레히트 등 표현주의 영화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독일 최대의 촬영소 우파 스튜디오에서 3백10일에 이르는 대작 <메트로폴리스>의 촬영작업에 들어갔다.
미래도시 메트로폴리스는 두 개의 세계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행복하고 안락한 부르주아들의 지상낙원이고, 또 하나는 온통 기계로 둘러싸인 노동자들의 지하감옥이다. 지상의 가진 자들은 지하의 빼앗긴 자들의 노동의 대가로 천국을 소유한다.
그러던 어느날 지상세계를 움직이는 자본가의 아들 프레더가 우연히 비밀의 문을 통해 그 끔찍한 지하세계로 내려가 천사같은 소녀 마리아를 알게 된다. 그녀는 노동자들의 유일한 성녀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과학자가 음모를 꾸민다.
그는 마리아를 납치해 마리아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지하세계로 내려보낸다. 가짜 마리아는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지하세계의 노동자들은 계급투쟁을 향해 전진한다.
랑이 만들어내는 이 어둡고 음침하면서도 무섭도록 열광적이고 흥분을 자아내는 계급투쟁의 우화는 공상과학영화라는 형식 속에서 무성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압도적인 시각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그는 독일 영화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내기 위해 당대 러시아 영화의 몽타주나 프랑스 영화의 아방가르드 전통을 모두 무시했다. 그 대신 영화 전체를 거대한 건축적인 유기체처럼 설계하고 그 속에서 집단적 움직임과 기하학적 구도, 빛과 그림자의 날카로운 대비와 그 사이로 늘어선 기형적인 세트, 그리고 기계적인 화면과 카메라의 이동으로 표현했다. 아마도 어떤 표현주의 영화도 이보다 더 표현주의 정신을 구현한 작품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랑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메트로폴리스>는 위험한 결론으로 이끌린다. 그는 선동과 집단봉기의 계급투쟁의 결과를 공상과학영화라는 모호한 변명 속에서 이상적이고 낭만적으로 변질시켰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는 자본가와 자본가 아들 사이의 화해로 변질해 노동자계급의 패배로 끝나며, 혁명은 폭동으로 변질하고, 결국 부르주아 휴머니즘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메트로폴리스>는 무시무시한 인플레가 독일 전역을 휩쓸던 1927년 1월10일 베를린에서 개봉되었다. 두 사람이 이 영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 사람은 아돌프 히틀러였고, 또 한 사람은 할리우드 제작자 월터 윈저였다.
13년 뒤 프리츠 랑은 괴벨스의 나치 선전영화 제안을 거절하고 할리우드로 가 필름 누아르 영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아도르노의 말처럼 그는 '실패한' 독일 영화의 바그너였다.
<필자: 정성일/영화평론가>
9. <황금 시대 L'Age d'or>(1930) / 감독: 루이 브뉴엘
루이스 부뉴엘(1900∼1983), 20세기와 함께 스페인에서 태어나 프랑스 미국 멕시코를 거쳐 프랑스에서 긴 영화역정을 마감한 이 거장은 생애의 대부분을 상업영화를 만들며 보냈으면서도, 당대의 주류문화를 거스르는 '스캔들'로서의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낸 특이한 존재이다.
그는 첫 작품 <안달루시아의 개>(1928)에서 마지막 작품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영화에 일관된 세계관은 초현실주의라고 주장하였다. 부뉴엘은 인간이 자신의 본능과 비이성적인 면들을 제도와 문명이라는 틀로써 다스리려는 시도들이 얼마나 부질없고 무의미한 일인가를 끈질기게 보여주려 하였다. 그래서 그의 영화세계에는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종교 - 그의 성장 배경인 카톨릭 교회 - 를 향한 공격, 유럽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야유와 경멸, 그리고 무의식과 본능의 영역으로서의 성에 대한 탐구가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음흉하리 만큼 우회적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부뉴엘 영화의 특징들은 그의 두번째 영화 <황금 시대>(1930)에 가장 잘 압축되어 있다. 상영시간 1시간인 이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전갈의 생태를 묘사하며 시작해서 산적들, 사제, 군인, 관료가 차례로 등장하고, 영화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사랑을 벌인다. 이들의 사랑이 부르주아들에 의해 끊임없이 방해받는다는 것이 이 영화의 기둥 줄거리인 셈인데,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영뚱하게도 사드의 소설 <소돔의 120일>의 후일담으로 넘어간다. 여기 등장하는 4명의 '패륜아' 중의 한명은 예수의 모습을 하고 있고, <황금 시대>의 마지막 이미지는 사막에 버려진 십자가이다. 이러한 이야기 사이사이에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부르주아의 삶의 단편들이 끼어들고, 자막과 대사와 음악(<황금 시대>는 최초의 발성영화 중의 하나이다)은 이 영화의 공격대상이 무엇인지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부뉴엘이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만든 첫 작품 <안달루시아의 개>는, 당시 파리 문화계에 유행하던 예술지상주의적인 전위영화에 대한 공격이라는 만든 이들의 의도와는 달리, '예술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품이라는 오해(?)와 함께 부르주아 문화인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이어 부뉴엘이 <안달루시아의 개>의 성공에 힘입어 만들 수 있었던 다음 영화 <황금 시대>는, 일부 좌파 지식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격렬한 분노와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예수를 사드 소설의 주인공으로 묘사한 '신성모독' 부분이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에 몰려온 극우단체 회원들은 영사막을 찢었고, 찢어진 영사막 위에 영화는 며칠간 계속 상영되었다. 결국 들끓는 여론과 카톨릭 교회의 압력에 따라 파리시 당국은 상영금지 조처를 내리고 프린트를 압수하였다. 1950년에 <잊혀진 사람들>로 유럽영화에 '복귀'하기까지, 부뉴엘에게는 '악명높은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
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고, <황금 시대>의 오리지널 네가는 1993년에야 원래의 형태로 복원되었다. <안달루시아의 개>가 '고전'으로 인정받아가던 세월 동안, <황금 시대>는 여전히 '스캔들'로서 남아 있었던 셈이다.
<필자: 김홍준/영화감독>
10. <장군 The General>(1926) / 감독: 버스터 키튼
버스터 키턴은 1895년에 태어나 보드빌(노래·춤·곡예 따위를 곁들인 소희극)의 연주자이던 부모와 함께 세살 때부터 무대에 섰다. 슬랩스틱 코미디(배우가 치고받고 하면서 연기·동작을 과장하는 희극)가 한창 주가를 올리던 1917년 영화연기를 시작했으며, 1920년대에는 자신의 영화사를 갖고 본격적으로 연출과 연기를 겸하기 시작했다. 1928년 그의 영화사가 MGM으로 넘어가기까지 키턴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열두편의 장편희극영화를 만들었다. <우리의 환대> <셜록 2세> <조종사> <장군> 등이 그 시기에 만든 대표작들이다.
<장군>은 "어수룩한 낙오자가 사내다운 용기를 증명해보여 사랑하는 여자를 얻게 되는" 이야기이다. 흔해빠진 이야기지만 몇번을 보아도 신선하다. 정치성도, 사회에 대한 풍자도 없다. 단지 키턴의 독창적인 희극적 효과가 있을 뿐이다. 백치 같음과 철학적인 것이 엿보이는 키턴 특유의 무표정과 절제된 신체적 움직임, 주인공이 싸워야 할 상대가 한 소대가 타고 있는 기차 혹은 한 부대가 주둔해 있는 적지라는 것, 기관차라는 거대한 기계덩어리로부터 무한한 희극적 효과들을 끌어내는 규모 등은 당대 여느 코미디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동시대 슬랩스틱 코미디와 채플린 영화들이 연기자의 신체적 움직임과 얼굴표정을 중시하고 영화가 단지 그것을 기록한 데 비해 키턴은 특정한 카메라 위치와 시각적 효과, 정확한 타이밍, 편집리듬을 중요하게 여긴다. 주인공 자니가 실연당한 뒤 장면은 그런 요소들의 묘미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자니는 '장군호' 바퀴의 빗장 위에 힘없이 앉아 있다. 잠시 뒤 기차는 천천히 움직이고 자니의 몸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니의 몸은 자니가 지닌 실연과 고뇌의 무거움에 비해 너무나 가볍게 빗장 위에서 원을 그린다. 두바퀴를 돈 뒤, 화면 오른쪽으로 그가 사라지기 직전에야, 그는 상황을 깨닫는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운명의 힘, 그 주변을 따라 도는 자니, 희비극이 공존하는 그 순간은 고정된 카메라, 거리를 둔 카메라 위치, 인물의 미세한 움직임 직후 곧 페이드아웃되는 편집 등이 그 맛을 더욱 풍부하게 한 것이리라.
<장군>이 영화사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 현대적 면모일 것이다. 카메라는 관객으로 하여금 곤경에 빠진 주인공을거리두고 관찰하게 하고 그 곤경을 즐기게 한다. 그래서 관객은 주인공과 감정의 동화를 이루지 못한다. 또한 상황에 대한 불가피한 절망감을 보여주는 키턴 특유의 냉철한 무표정은 그러한 이화작용을 더욱 강화시킨다.
또하나 영화의 현대적 맛은 빅토리아 시대의 전통적 신사도를 물려받아 여성을 영화에서 곱게 다루던 시기에 여성을 세상 안으로 끌어낸 점이다. 자루에 넣어 화물칸에 던지고 그 자루를 나중엔 발로 무자비하게 밟고, 몸이 쓸려버릴 듯한 펌프물 세례를 주고, 목숨을 건 탈주에 어리석게 행동하는 여자의 목을 조르다 할수없어 입맞춤을 하긴 하지만. 당대로서는 진지한 소재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남북전쟁 때의 로맨스는 이러한 현대적 면모들로 패러디가 되고 그의 영화에서 감상은 모두 씻겨나가 버린다.
30년대 메이저 스튜디오 아래서 재능을 잠식당한 키턴은 다시는 <장군>과 같은 독창적 코미디를 만들지 못했다.
키턴은 채플린에 버금가는 유일한 희극영화인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채플린과는 아주 다른 현대적 감성으로 죽은 뒤 더욱 유명해진 인물이다. 특히 부조리극이 성행하고 브레히트가 영화에 수용되던 시기의 그의 죽음은 수십년 전 그의 영화가 보여준 현대적 감성을 되씹게 했는지도 모른다.
<필자: 주진숙/중앙대 교수·영화학>
11. <잔다르크의 수난 La Passion de Jeanne D'Arc>(1928) / 감독: 칼 데어도어 드레이어
"잔 다르크의 투명한 눈물 한방울을 상자 속에 간직하고 싶다."
루이 브뉘엘이 이 영화에 대해 한 말이다. 하지만 에릭 로드 같은 영화사가는 감독 카를 테오도르 드라이어에 대해 고통에 빠진 여성들(이 영화와 <분노의 날>(1943), <오데트>(1955), <게르트루드>(1964) 등의 작품)을 가학적으로 재현해내는 남성우월주의자라고 생각했다.
반면 질 들뢰즈의 견해는 달랐다. 그는 드라이어야말로 관객에게 최고의 정서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만든다고 평했다. 또 혹자는 "절규하는 소리가 나는 무성영화"라고 이 영화를 정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떠한 관점에서 보건 부정할 수 없는 점은 그가 매우 특이한 형식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카메라 움직임과 미니멀리즘으로 관객들의 정서를 이끌어내는 드라이어는 사실 세계영화사에서 일본의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나 프랑스의 브레송과 더불어 독특한 전통을 차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느낌표나 의문부호보다는 말줄임표를 즐겨 사용하며, 오히려 데스마스크에서 가장 강렬한 삶의 표현을 포착해 낸다.
1920년대 후반 르네 클레르와 페르낭 레제 그리고 루이 브뉘엘이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영화에 관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을 때, 덴마크에서 프랑스로 옮겨온 드라이어는 프랑스 영화사로부터 작품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는 역사상 흥미로운 세 명의 여성들, 즉 카트린 드 메디치와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잔 다르크 중 한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생각하다가, 드디어 마지막 인물로 낙점한 뒤 중세의 일상을 재현하기 위한 꼼꼼한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잔 다르크 역을 맡을 배우로는 순박한 시골처녀 같으면서도 순교자의 열정과 고통을 간직한 지방 연극 배우 마리아 팔코네티가 선정되었다.
모든 사람들을 놀라운 시각 경험에 빠지게 한 섬세한 클로즈업 중심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다양한 톤에 반응하는 팬크로매틱 흑백필름을 사용했고,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서술구조에 적합한 짧은 길이의 '숏'들로 이루어진 평행편집이 채택되었다.
전체적으로는 잔 다르크를 마녀로 몰기 위한 재판 과정과 화형 장면으로 나뉘어 있으며,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들(주교, 영국인, 판사 그리고 군중)이 각기 다른 종교적 신념과 분노를 가지고 이 전쟁터에 뛰어든다.
'숏'과 거기에 대응하는 '뒤집힌 숏'의 관습적인 사용을 피해 가면서 흐르듯 이어지는 클로즈업을 채택한 이 영화의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것은 잔 다르크의 고통에 찬 얼굴과 그 뒤 하얀색의 텅빈 실내공간이다. 말하자면 원근법에 따른 공간적 깊이가 부재하는 것인데, 이때 이것을 대체하는 것이 바로 정신적 깊이이며, 잔 다르크 역의 팔코네티의 얼굴은 마치 중세의 종교적 도상화처럼 정신적 형상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중세와는 달리 이 영화의 후반부는 종교적 구원의 영원성보다는 잔 다르크의 삶에 대한 열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삭발당한 채 화형대에 올라 "오늘밤 나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독백을 할 때, 그리고 바람에 날려가는 머리카락과 하늘을 나는 비둘기들, 어머니의 품에 편안히 안긴 아기의 이미지들이 보여질 때, 천상의 세계는 멀어 보이고 지상은 그보다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이런 문제제기는 정말 이제 고전적(진부함)으로 보이고, 이 영화가 영화 100년사에서 갖는 의미는 그래서 형식미의 탁월함 정도에 머무를 것 같다.
그러나 들뢰즈의 의견은 또 다르다. 이 영화는 오히려 세상이 저질영화처럼 보이는 20세기에 태어난 서정적 영화이며 바로 그 정서적 효과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것을 복원할 꿈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복원한단 말인가?
<필자: 김소영/영화평론가>
12. <대지 Zemlya>(1930) / 감독: 알렉산드르 도브첸코
알렉산드르 도브첸코(18941956)의 <대지>는 소련영화의 발달사에서 다민족국가 영화의 출현을 의미한다. 볼세비키 혁명 후 소련영화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발달했으나 곧 이어 그 동력은 각 민족국가로 확산되었다. 그루지아와 우크라이나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러나 <대지>의 영화사적 가치는 그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혁명의 선전선동과는 궤를 달리하여 인간과 대지의 하나됨이라는 영원성의 테마를 추구한 것이었으며 형식상으로는 당대 소련영화의 거대한 흐름이었던 몽타주영화와는 달리 명백히 시적 영상으로 형상화된 작품이었다.
도브첸코는 우크라이나의 체르니코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혁명의 와중에서 그는 교사, 공산당 지하요원, 외교관 등의 다양한 경력을 쌓게 되는데 사실 그를 매료한 것은 예술이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시절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고 귀국해서는 풍자화가로 나섰다가 1926년에 영화에 몸을 던졌다. 영화에서 도브첸코의 첫 작업은 엑센트릭한 코미디 장르에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그다지 주목을 못 끈 실험작들이었다. 영화감독으로서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해준 것은 네번째 영화인 <즈베니고라>(1928)였다. 여기서부터 그의 영화는 고향 우크라이나의 자연과 삶과 빈곤과 혁명을 담아내기 시작하였다. 앞의 영화와 <무기고>(1929), <대지>, 발성영화 <이반>(1932)은 이 계열의 4부작이라 해도 좋은 영화일 것이다.
<대지>는 우크라이나의 한 농촌마을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사회적 변동을, 새 것과 낡은 것, 콜호스 농민과 지주, 사람에 대한 신뢰와 신에 대한 신앙 사이에서 생기는 비극적 충돌을 통해 응시하고 있다.
도브첸코는 '나는 <대지>를 농촌에서 새 생활의 새벽을 예고하는 작품으로서 기획했다'라고 말했으나 결과는 그 이상이었다. 왜냐하면 완성된 영화는 농촌사회의 계급투쟁을 담고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 땅을 경작하는 농민들의 영원한 세계인 노동과 대지의 친화, 자연의 순환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인간생명의 순환, 그리고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지방의 토속적 서정으로 가득찬 영상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지>는 인간의 노동으로 기름진 자연에 대한 찬가에서 시작한다. 휘늘어지게 열매를 맺은 사과나무 아래서 한 노인이 사과를 씹으며 죽어간다. 그의 곁에는 노인의 생명을 이어가기라도 하듯 한 어린애가 역시 사과를 먹고 있다. 느리고 시적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농업의 집단화를 둘러싼 지주와 빈농의 갈등으로 긴장을 더해가다 바실리가 이 마을의 첫 트랙터를 들여와 수세기 동안 이어져온 낡은 소유의 상징인 밭두렁을 허무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마지막 장면은 지주에게 살해된 콜호스 농민지도자 바실리의 장례식이다.
친구가 든 그의 미소짓는 초상이 사과나무 가지를 스친다. 이어 바실리의 어머니가 또 하나의 생명을 낳고 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는 시적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도브첸코는 이 영화에서 서술을 위해서든 충돌을 위해서든 장면 내에서 당대 소련영화의 화려한 몽타주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미지와 이미지, 장면과 장면의 연결과 병치와 상승작용을 더 중요시하였다.
그의 쇼트들은 대체로 느릿하고 길며 종종 극도의 광각으로 촬영된다. 그것은 대지의 광대함과 자연의 영원성을 드러내는데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요소 때문에 단세포적인 혁명론자들에게 공격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그것은 영화사가 <대지>를 도브첸코의 오랜 화가의 꿈이 스크린에서 성취된 걸작으로 기록하게 한 요소였다.
<필자: 이정하/영화평론가>
13. <M>(1931) / 감독: 프리츠 랑
영화사에 길이 남는 걸작 가운데는 대중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거나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경우가 많지만 그와 더불어 다음 세대의 영화에 끼친 영향력이 더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프리츠 랑의 <M>도 그러한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작품이다. 30∼40년대 필름 누아르 감독들에게 <M>은 교과서와 같은 텍스트였고, 20년대말 유성영화가 갓 태어난 뒤 사운드를 영화 속에 어떻게 삽입할 것인가에 대해 우왕좌왕하고 있던 영화인들에게 <M>은 역시 모범적인 교본이었다.
20년대와 30년대의 독일사회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권위주의를 지향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작품이 바로 <M>이다.
뒤셀도르프의 어린이 살해사건을 모델로 한 이 작품은 어린이 살해범 베케르트를 쫓는 경찰과 지하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랑은 이러한 이야기를 통하여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주제를 제시한다.
근대적 의미의 공동체는 자손을 통해 영속되며 법과 같은 권위적 관리체제에 의해 유지되는데, 그러한 권위는 개인의 권리를 제한함으로써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끝없는 자유를 원하는 개인의 본능은 공동체와 권위에 대한 심대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살인범 베케르트는 바로 그러한 위협의 상징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인물이다. 이러한 베케르트의 정체성 혼란, 즉 또다른 자아를 구현한 랑의 기법들은 필름 누아르의 시각적 스타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베케르트의 또다른 자아는 그림자나 거울 또는 유리창에 반영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림자나 거울은 필름 누아르의 가장 지배적인 시각적 모티브 가운데 하나다.
또한 랑은 베케르트의 개인적 혼란과 더불어 사회적 혼란도 이야기한다. 즉 베케르트를 추적하는 사회적 세력이 경찰과 지하세계로 이원화되어 있는 것이다. 랑은 이러한 두 집단의 장면들을 완벽한 대칭구조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두 집단의 베케르트 추적을 위한 회의 장면은 교차편집의 전형으로 꼽힌다.
사운드기법은 오늘날에도 그 탁월함이 빛을 잃지 않고 있다. 랑은 사운드를 단순히 영상에 종속적인 것이 아닌, 대위법적인 관계로 파악했다.
특히 경찰과 지하세계의 장면들은 그 유사한 구도에 반해 사운드를 통해 대립적 관계를 부각시키고 있다. 즉 두 집단이 살인범을 쫓는 과정에서 경찰은 시각적인 것(지도, 필적 등)에 치중하는 반면, 지하세계는 소리를 통해 베케르트를 붙잡는다. 맹인거지가 기억해낸 베케르트의 '페르귄트 조곡'의 휘파람소리는 청각적인 모티브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러나 랑의 가장 탁월한 사운드기법은 은유적 기법이다.
소녀 엘시가 납치되었음을 알리는 장면은 어머니가 엘시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다음 장면인 텅빈 계단에서 울려퍼지며, 이어 엘시의 공이 공터로 굴러가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처럼 랑은 사운드를 영상과 결합시켰을 때 그것이 만들어내는 은유적 효과에 대해 누구보다도 앞선 생각을 가진 감독이었다.
이 작품이 지닌 또하나의 가치는 표현주의의 그림자를 안고 심리적 사실주의의 문을 열었다는 점이다. <M>을 영화사의 전환기에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필자: 김지석/부산예술학교 교수>
14. <모던 타임스 Modern Times>(1936) / 감독: 찰리 채플린
헐렁헐렁한 바지에 꽉 끼는 윗도리, 작은 중산모에 크고 낡아빠진 구두, 짧은 콧수염에 특유의 마당발 걸음, 그리고 옆구리엔 지팡이를 지닌 구시대의 신사. 서울의 수많은 레스토랑 간판에 새겨져 있어 이제는 그 분장이 갖고 있는 고유한 의미도 다 바래버린 형상.
이 형상은 찰리 채플린이 지금으로부터 80년전 처음 영화에 출연하면서 창조한 방랑자의 모습이다. 시대를 거슬러 가는 이 방랑자의 분장은 채플린의 무성영화 모두에서 산업화를 향해 치닫는 미국사회의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대항하는 존재의 상징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도와 자부심으로 전통을 고수하며 현대사회를 비판하고 도전하는 인물을 표상한 것이었다.
1936년도 영화 <모던 타임스>(현대)는 채플린이 이 방랑자의 분장으로 등장한 마지막 영화이며 또한 그의 마지막 무성영화이다. 방랑자는 기계만능의 현대를 풍자하는 데 발레와 같은 슬랩스틱 제스추어를 이용하며 감상적 로맨스와 함께 그 사회를 떠나버림으로써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 채플린에게서 말하는 방랑자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이 마지막 무성영화에서 방랑자로 하여금 무국적의 묘한 언어로 노래하게 함으로써 무성과 유성의 경계를 넘어버린다.
<모던 타임스>에서 채플린이 그리는 현대는 냉혹하다. 노동자들은 축사로 끌려가는 양떼처럼 공장으로 몰려 들어가고, 자본가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노동자들을 감시한다. 최소의 시간에 최대의 생산을 위해서 노동자들은 숨쉴 틈도 없으며 화장실 가는 시간도 체크당한다. 화장실에서 담배라도 한 대 피우려 하면 한쪽 벽의 대형 스크린에서는 자본가가 불호령을 내린다. 점심시간도 아까워 자본가는 작업 중에 급식할 수 있는 자동급식기계를 설치한다. 자동화되는 일터는 실직자를 대량 생산해내고 그들은 거리에서 시위를 벌인다.
굶주림 때문에 빵 하나를 훔치는 사람도 있고, 시위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 이도 있다. 그러한 이들로 인해 거리에는 경찰관들이 가득하다.
주인공 방랑자는 현대의 노동자이다. 그는 무엇을 생산해내는지 알 수 없는 작업대에서 볼트를 조인다. 그의 손이 반의 반초만 늦어도 일관작업체제는 엉망이 되고 쉴새없이 볼트를 조이는 그의 두 손은 작업대를 떠나도 자동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여자의 엉덩이에 달린 단추도 조이려 달려든다. 그는 자동급식기계를 시험하는 대상으로 뽑히지만, 고장이 나 광포해진 기계는 그에게 음식물을 내치고 그를 폭행하고 미치게 하고 거대한 기계의 흐름으로 먹혀들어가게 만든다.
거리에서 그는 트럭의 꼬리에서 떨어진 붉은 깃발을 들고 뛰다가 시위대열에 앞장서기도 하며, 고아 소녀를 만나 가정을 꿈꾸고 직업을 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방랑자는 현대의 작업에 적응하기 힘들다. 결국은 소녀와 지평선을 향해 떠난다.
대중사회에서 소멸되어가는 인간성에 대한 고발과 물질문명이 가져오는 비인간성에 대한 비판을 담은 <모던 타임스>는 공산주의적 경향을 지녔다는 이유로 물의를 일으켰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으며, 오스트리아에서는 붉은 깃발을 들고 뛰는 장면이 검열에서 잘렸다 한다. 그리고 이 영화와 뒷날 만들어진 <위대한 독재자> <베르두씨>에서 보여준 비판적이며 좌파적 색채는 훗날 매카시 선풍이 할리우드를 뒤흔들 때 채플린이 미국으로부터 추방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담긴 비판의 소리는 아직도 또 앞으로도 유효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필자: 주진숙/영화평론가·중앙대 교수>
15. <올림피아 Olympia>(1938) / 감독: 레니 뤼펜쉬탈
레니 뤼펜쉬탈이 파시스트의 어용작가라는 치욕적인 오명을 얻게 된 것은 1934년 나치의 전당대회를 기록한 <의지의 승리>로부터 출발한다.
히틀러를 천상에서 내려온 구세주로 표현하면서 지루한 정치적 이벤트를 웅대한 드라마로 탈바꿈시킴으로써, 그는 베니스 영화제의 그랑프리를 거머쥠과 동시에 대표적인 관변작가의 대열에 올라섰다.
그러나 그의 다음 작품 <올림피아>는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나치당의 공식선전영화라고 하기에는 힘든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인간육체의 미적 가치에 매혹당한 뤼펜쉬탈은 국제올림픽위원회와의 직접 교섭을 통해 촬영허가를 받아내는 데 몇개월을 소진해야 했고, 자신과 애증관계에 있었던 선전상 괴벨스의 방해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만천하에 알리고 파시즘의 도도한 흐름을 전파할 절호의 기회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의지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나치당에게 그리 매력적인 매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도 '느린' 매체였으며, 선전의 효율성에서 보자면 영화보다는 라디오가 확실한 투자 대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오락적 기능에 초점을 맞춘 우민화의 도구로 정의되었다. 기념비적인 행사에 걸맞는 예술작품을 후세에 남기고 싶어하던 히틀러의 독단이 없었다면, 뤼펜쉬탈은 엄청난 제작비를 끌어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개회식 장면을 성대하게 묘사하기 위해 비행선에까지 카메라가 장치되고, 다이빙 장면을 연속적으로 찍기 위해 촬영기사들은 몇개월 동안 수중촬영 훈련에 몰두해야 했다. 그런 치밀한 사전준비 결과 2주간의 운동경기는 2백25분의 서사시로 새롭게 탄생했다. 바그너풍의 음악을 배경으로 안개에 싸인 고대 그리스에서 채화된 성화가 독일로 전해지고, 히틀러는 천상의 신전에서 이를 내려다본다. 프로파간다의 기조가 깔려 있지만, 이것만은 아니다. 나레이션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인간육체와 음악을 절묘하게 조화시킴으로써 뤼펜쉬탈은 전혀 새로운 예술적 성과를 창조해냈다.
게다가 가장 역동적인 시각적 이미지가 넘쳐흐르는 육상경기들을 미국의 흑인선수들이 휩쓸어버리는 바람에 영화는 애당초 선전의 목표를 달성하기 힘들어졌고, 이러한 장면을 삭제하라는 나치관료들의 요구를 뤼펜쉬탈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정치적 구호의 거세도 프로파간다로부터의 탈출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인간의 육체가 시종일관 찬양되고, 준군사적이며 독특한 양식으로 패턴화된 시각적 모티브들이 반복해서 등장함으로써 파시스트의 미학과 시각적 상상력의 정수가 드러난다. 그 점에서, 히틀러에게는 매력을 느꼈지만 나치의 이데올로기에는 반대했다는 뤼펜쉬탈의 항변은 별다른 힘을 지니지 못하며, 파시즘의 매혹적인 시대정신을 그는 무의식적으로 담아내버린 셈이다. <올림피아>가 이후 대중세뇌의 주요수단으로 등장한 텔레비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장르의 원초적 형태로 남아있다는 것은 그러한 역사적 평가를 뒷받침하는 또다른 근거이다.
객관성을 가장한 물신주의는 언제라도 파시즘과 만나게 되기 마련이다. <올림피아>가 남긴 교훈은 하나의 이벤트를 객관적으로 기록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당대 현실의 왜곡과 동치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국가의 정책적 개입에 의한 것이건, 아니면 개인의 작가적 소신에 의한 것이건, 어떤 '기록'도 역사적 책임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필자: 김명준/영화평론가>
16. <커다란 환상 La Grande Illusion>(1937) / 감독: 장 르누아르
만일 영화가 리얼리즘과 형식주의 사이에 놓여 있다면, 그건 미장센과 몽타주의 역사로 다시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미장센은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크다는 변증법적인 몽타주와 반대로 시간과 공간의 현실적 반영 위에 놓여진 전체로서의 시스템이 부분의 합보다 크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리얼리즘은 카메라가 현실을 기계복제할 때 어떻게 모순을 보존하고 반영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믿어 왔다.
장 르누아르(1894∼1979)는 미장센이라는 영화 수사학과 리얼리즘이라는 미학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구현해낸 감독이다.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는 회화보다는 모차르트의 오페라와 보마르셰의 연극, 그리고 좌파 인민전선의 활동에 더 많은 정열을 바쳤다. 르누아르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인 적은 없었으나, 한번도 노동자들과 인민의 편에서 벗어난 적도 없었다. 그러한 세계관이 때로는 모순되고 때로는 모호한 상태로 머물면서도 그의 영화 속에서 사해 동포주의적 휴머니즘을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르누아르의 믿음이 담긴 영화가 <커다란 환상>이다.
영화의 무대는 1차 세계대전 말, 프랑스 공군 마레샬(장 가방)과 장교 보엘디외는 비행기가 추락하여 그만 독일군 포로가 된다. 이 포로수용소에는 여러 나라의 군인들이 잡혀 있었고, 수용소장은 귀족 출신인 폰 라우펜쉬타인(<그리이드>의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 감독)이다. 그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신사적으로 포로를 대하지만, 포로들은 탈출을 계획한다.
그리고 프랑스 장교 보엘디외의 희생 덕분에 마레샬과 유대인 로장탈은 탈출에 성공한다. 두 사람은 천신만고 끝에 영구 중립국인 스위스 국경을 넘는다.
장 르누아르는 이 영화를 '전쟁장면이 하나도 없는 전쟁영화'라는 전무후무한 원칙을 갖고 연출한다. 그것은 평화에 대한 그의 희망이고, 신념이다. 하지만 포로수용소에 모인 수많은 인간들 사이의 모순에 찬 세상만사의 만화경은 그러한 꿈을 또다른 전쟁으로 이끈다. 거기에는 귀족과 노동자 또는 자본가 사이의 계급모순, 유럽 속의 유대인의 민족 모순, 국가간의 모순, 종교 모순이 서로 충돌하고, 편견에 차서 증오를 드러내고, 미워하고 맞선다. 그것을 르누아르는 어느 편에 서는 대신 장시간 이동 카메라와 편집 없는 롱 테이크, 그리고 딥 포커스를 이용한 공간적 깊이를 통해 고전적인 현실모순의 리얼리즘으로 담아낸다. 르누아르는 전쟁 아래서의 자유, 전쟁 속에서의 평등, 전쟁과 박애를 준엄하게 묻는 것이며, 그의 질문은 주제와 형식의 일치를 통해서 보기 드문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사상 유명한 마지막 장면. 인터내셔널한 단결을 꿈꾸는 노동자 출신의 마레샬은 말한다. "이제 곧 전쟁이 끝나겠지, 그러면 다시는 전쟁이 없을거야." 그러자 유대인 은행가 로장탈은 대답한다. "그건 자네의 커다란 환상일세." 그리고 두 사람은 눈 덮인 스위스 국경을 넘는다. 이 영화는 37년 6월4일 개봉되었고, 그로부터 2년 뒤 예언대로(!) 2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커다란 환상>을 '영화의 적 1위'라고 부르며 모든 프린트를 소각시키라고 지시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전후 이 영화의 프린트가 발견된 곳은 46년 뮌헨이었다. 그뒤 수많은 시네마데크의 노력으로 72년에야 비로소 우리가 볼 수 있는 '완전판'이 복원되었다.
<필자: 정성일/영화평론가>
17. <게임의 규칙 La R gie du jeu>(1939) / 감독: 장 르누아르
1956년, 파리의 시네클럽을 운영하던 장 가보리와 자크 마르샬이 창고 속에 처박혀 있던 <게임의 규칙>의 필름을 발견해 냈다. 이 필름은 그뒤 3년이 지난 1959년에 1939년의 원판에 거의 가까운 상태로 복원되어 다시 공개됐다. 이 작품의 전면적인 재분석에 들어간 영화평론가, 학자들은 영화사상 가장 복잡한 등장인물간의 관계와 풍부하고도 상징적인 영상기법에 놀랐다.
후작 로베르의 성에서 열리는 사냥파티에 참가한 상류계급 사람들간의 갈등과 하인계급 사람들간의 갈등, 그리고 이들 두 부류 사이의 얽히고 설킨 갈등이 마지막에 가서 만나는 플롯을 통해 장 르누아르는 '사회의 각 계층'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상류·하류계급의 등장인물의 관계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여러번 이 작품을 보지 않고서는 그 관계를 이해하기 힘들다.
상류계급의 경우 후작부인 크리스틴은 젊은 비행사 앙드레, 앙드레의 친구이자 아버지의 친구였던 옥타브, 생오뱅과 미묘한 관계에 빠지고 로베르는 주느비에브와 연인관계이다.
로베르와 주느비에브의 관계는 옥타브가 알고 있으며 크리스틴도 알게 된다. 하녀 리제르는 남편 슈마허와 새로운 하인 마르소와 삼각관계에 빠지며 이들의 관계가 엉뚱하게 앙드레의 죽음을 불러 일으킨다.
르누아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모든 게임이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규칙을 깨뜨리는 이는 게임에서 지는 것이다." 여기서 게임의 규칙은 상류사회의 결혼과 간통, 사냥 등이며 하인계급의 유희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게임은 궁극적으로는 성의 게임이며 또 서로 얽히고 깨어지지만 상류사회의 그것이 보다 '위선'적이다. 앙드레는 이러한 규칙을 깨뜨리기 때문에 죽음을 당한다.
르누아르는 그 자신이 직접 옥타브로 출연하여 이들의 성적 게임의 매개자이자 또 참여자가 된다. 그래서 유려한 카메라워크는 옥타브를 중심축으로 이동해 나간다. 카메라는 그를 따라다니며 귀족계급과 하인계급의 사회를 자연스럽게 대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1941)의 딥 포커스 촬영이 이미 여기서 확고한 미학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영화적 공간개념을 확장시킨 것이다. 전심초점 공간의 표현으로 깊이감을 강조하였을 뿐 아니라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프레임의 경계를 계속 드나들게 함으로써 훗날 영화학자 노엘 비루시가 체계적으로 분석한 외화면공간(오프스크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르누아르의 탁월한 연출기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클로즈업이 거의 배제된 풀숏화면의 배경이 되는 세팅과 의상코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남성성/여성성, 우아함/천박함, 전통/현대, 도시/시골, 상류/하류계층 등).
이처럼 이 작품에서 르누아르가 20세기초 프랑스 사회의 모든 계층을 들여다보는 영화적 형식은 독창적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의 방대한 문화적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 18세기 프랑스 코미디 야외극의 전통과 뮤세, 보마르세, 마리보의 영향에서 낭만주의 회화의 전통에 이르기까지 <게임의 규칙>에 세세하게 스며있는 문화적 전통은 왜 르누아르의 영화가 프랑스인들로부터 그토록 사랑을 받았는지를 짐작케 해 준다.
<필자: 김지석/영화평론가·부산예술학교 교수>
18. <판타지아 Fantasia>(1940) / 제작: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월트 디즈니는 1937년 겨울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를 개봉했고 이 작품의 엄청난 성공은 디즈니에게 해마다 장편 만화영화 한 편씩을 공개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그는 곧 <피노키오>와 <밤비> <판타지아> 등 세 편의 장편 만화영화를 동시에 제작한다는 계획에 착수했다.
해를 넘기면서도 승승장구하는 <백설공주…>에서 얻은 세계적인 명성과 결벽증에 가까운 완성도를 이어가고자 디즈니는 늘 그래왔듯이 <피노키오>의 줄거리를 완전히 개작하는 한편,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였던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교류하며 <판타지아>의 명장면들을 구상해 갔다.
<판타지아>는 1940년에 처음 발표되었지만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장면들은 1990년에 영화 발표 50주년을 맞아 현대적인 영상기술과 과학에 힘입어 원작보다 세련되게 복원한 작품이다.
이 장편 만화영화는 당대의 유명 예술가들(디즈니 프로덕션의 화가들을 포함한)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애써 강조하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화면 중심에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뒷모습이 실루엣으로 우뚝 서고, 간혹 반사된 그림자로 처리되는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들려주는 클래식 명곡이 도입부를 장식한다. 그 첫 삽입곡은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라단조>. 이때의 화면은 디즈니 작품 스타일로서는 의외라고 여겨지는 실험적 영상들로 꾸며져 있다.
음악과 어우러지는 선과 면의 움직임, 속도감과 중첩의 이미지, 인류가 이루어 온 음악의 성과와 새로운 영상인 애니메이션의 조화는 제목 그대로 관객들을 판타지아의 세계로 끌어간다. 독일의 표현주의 전위미술가 오스카 휘싱거의 추상 애니메이션이 이를 뒷받침한다.
다음 곡은 디즈니의 전형으로 굳어진 금빛가루 뿌리는 요정 팅커벨이 유도하는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인형조곡>이다. 이 부분을 구성하는 음악과 춤의 장면들이 사실은 <미녀와 야수>의 황홀한 댄스 장면 등 이후에 제작된 거의 모든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화면 구성에 정형적인 모범으로 재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디즈니의 미키마우스에 대한 집착은 이어지는 삽입곡을 담은 세번째 장면에서 드러난다. <마법사의 도제>(폴 듀카스 작곡)라는 표제음악이 선행하는 이 부분에서 디즈니는 무언의 미키의 행동을 첫 곡인 바흐의 삽입곡에서와 일치하도록 꾸며 자신이 공들여 창조한 만화영화의 주인공에게 인간의 예술을 향유하도록 한다.
인류의 클래식 예술을 향한 디즈니의 허영은 이어지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장면에서는 우주의 창조와 지구의 탄생을 연대기적으로 구성하면서 진가가 드러난다.
완전 수공으로 제작되었을 당시의 작업 환경에서 이러한 교만에 가까운 작품을 지휘할 수 있었던 디즈니의 집착은 그의 감추어졌던 생의 진면목이 일부분 드러나면서 이해를 구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 작품의 예술적 방황은 베토벤 6번 교향곡 <전원>을 삽입곡으로 하는 부분에서 그리스 신화와 만화영화의 접맥을 시도하면서 나른한 로맨스를 표현하더니, 이윽고 발레 오페라인 <시간의 춤> 장면에서 코끼리, 악어, 하마 등이 벌이는 잡탕적 무희로 이어져 한숨을 돌리게 한다.
그러나 영화는 러시아 작곡가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 삽입곡이 이어지면서 이 모든 것을 일거에 거부하는 듯 흉칙한 악마의 죽음을 부르는 몸짓으로 비틀린다.
움추린 악마의 몸뚱아리가 교교하게 험한 산봉우리에 몸을 숨기면 카메라는 서서히 빠져나와 어느덧 신을 경배하는 길고 긴 촛불행렬로 이어지며, 슈베르트 곡 <아베마리아>의 선율만 남기며 '역사상 등장했던 더없이 기묘하고 아름다운 작품 하나'가 끝이 난다.
<필자: 이용배/만화영화 감독>
19. <시민 케인 Citizen Kane>(1941) / 감독: 오손 웰즈
영화의 역사는 1941년 5월1일 개봉한 <시민 케인>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어떤 영화도 이제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영화의 모든 사고에 새로운 배치가 이루어졌다. 역사는 갑자기 인식론적 단절을 경험하고, 고전주의 영화의 시대는 그 막을 내렸다. 그리고 <시민 케인>은 모더니즘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오손 웰즈(1916∼1985)는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며, 체홉과 입센에 정통한 연극연출자였다. 그는 22살에 머큐리 극단을 결성하여 실험극을 시도했지만 후원자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하여(!) 라디오 드라마 연출을 맡기도 하였다. 그리고 38년 10월30일 CBS 라디오에서 "임시 뉴스를 알려 드립니다"로 시작하는 가상 화성인 침입 드라마 <우주전쟁>으로 라디오 역사상 유례없는 소동을 일으켰다.
오손 웰즈는 그 해의 인물이 되었으며, RKO 영화사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그에게 영화 연출을 제안하였다.
오손 웰즈는 머큐리 극단을 이끌고 할리우드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그는 영화에 관한 전권을 갖는다는 조건으로 허만 맨키비츠와 공동으로 쓴 시나리오로 '비밀리에' 촬영에 들어갔다.
영화는 거대한 성 제나두에서 신문왕 찰스 포스터 케인이 "장미꽃 봉오리"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죽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관한 기록영화가 만들어지는데 아무래도 그 한마디가 걸린다. 그래서 기자 톰슨은 살아 생전 친했던 네 사람을 만나 그에 관한 이야기를 취재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비밀을 알지 못한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어린 시절 썰매에 쓰인 이름인 줄은.
오손 웰즈는 단 한번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기자를 따라가며 네 사람을 만나 플래시 백 구조로 케인의 주변에 있던 다섯 사람의 눈으로 케인을 본다. 잘 짜여진 19세기 소설의 기승전결 이야기 구조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그 속에서 같은 사건과 같은 인물은 서로 상이한 진술에 의해 반복과 차이를 경험한다. 그것은 영화에서 이중화법을 통하여 영화적 시간으로 이야기를 다시 배열하고 거기서 생겨나는 모순을 드러내, 질서정연하다고 믿었던 고전적 세계를 비판적으로 다시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손 웰즈는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만남을 담으면서 촬영감독 그레그 톨란드의 '혁명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는 초점거리가 깊은 딥 포커스와 정지할 줄 모르는 이동 카메라, 그리고 장시간 촬영과 경사 구도로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공간과 소련 몽타주 기법에서 끌어낸 화면과 사운드의 충돌, 그리고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의 미장센을 할리우드의 거대한 기술적 토대 위에서 전적으로 새롭게 배치할 수 있었다. 이것은 영화의 백과사전이며, 전례가 없는 대규모의 실험영화였다.
그러나 당시 언론 재벌이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자신의 스캔들을 소재로 삼았다는 이유에서 이 영화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장하였다. 영화는 흥행에서 참패하였으며, 오손 웰즈는 평생 그 빚 속에서 헐떡거리며 저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마침내 복권한 <시민 케인>이 모든 영화평론가들의 열광이며 모든 영화감독들의 절망이 되기는 했지만, 오손 웰즈 자신에게는 지옥이었다.
<필자: 정성일/영화평론가>
20. <폭군 이반 Ivan the Terrible>(1944/1946) / 감독: 세르게이 에이쩬슈테인
이반 4세(1530∼1584)는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통일 러시아를 건설한 최초의 차르이니, 그는 뒤에 폭군 이반으로 불린다. 이 인물의 성격과 비극과 역사적 역할은 이후 러시아 예술의 주요한 테마로 등장하였다. 에이젠슈테인이 제정 러시아에 대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테마로 한 <파업>으로 그의 영화활동을 시작하여 제정 러시아의 기초를 놓은 폭군 이반에 관한 영화로 이를 마감하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공포와 피로 얼룩진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국가 지도자들의 의외성과 비밀, 조폭성과 공포, 모스크바 공국을 위한 이반의 활동과 투쟁을 전면적으로 그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모든 전체주의 국가에서 그러하듯 역사영화는 고도의 정치적 은유를 띠게 마련이다. 여기서의 이반이 곧 스탈린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마지막 영화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에 앞서 수백쪽에 이르는 등장인물의 영화적 전기를 만들고 모든 인물성격과 무대의 장면과 쇼트를 그림으로 그렸다. 그의 작업 방법은 이전과는 달리 극히 독선적이고 광적인 것이었다.
1944년 3부작 중 1부가 완성되었다. 영화는 찢어진 러시아를 통일하는 이반의 투쟁을 그린 것으로서 기본적으로 낙관적 정서로 차 있었다. 당은 이를 환영했지만 그의 진짜 의도는 46년 2부가 완성되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3부가 거의 편집되던 시점인 46년 8월부터 당국은 <폭군 이반> 2부를 신랄하게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진보적 군대였던 이반의 오프리치니키(친위대)를 미국의 KKK단을 연상케 하는 타락한 무리로 그렸으며, 강력한 의지와 성격의 소유자 이반을 나약하고 의지가 여린 햄릿과 같은 성격으로 그린" "무가치한 영화"라는 당 중앙위원회의 비난은 2부를 58년까지 상영금지로 묶어 놓았고 3부의 네가와 편집필름 모두를 불살랐으며 결국 에이젠슈테인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결과를 빚었다.
미완성 영화 <폭군 이반>은 이상한 아름다움과 전율로 가득차 있다. 그것은 <전함 포템킨>과 영화적 방법은 다를지라도 영화사상은 참된 인간주의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극적으로 증명하는 작품임과 동시에 색채와 음악, 화면구성과 몽타주 등 모든 영화적 요소의 유기체적 통일을 지향한 그에게 제2의 정점을 의미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역사와 관련하여 이 영화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 있는가는 동료감독이었던 미하일 롬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1부와 2부를 확연히 구별하는 것은 제작기술의 관현악적 완벽성도, 각 에피소드의 놀라운 완성도도, 액션의 압도적인 표현력도, 편집도, 열광적인 리듬도, 영상과 소리의 대위법도 아니다. 이 모든 면에서 2부가 1부에 비해 더욱 완벽하긴 했지만, 두 영화의 차이점은 내적 주제에 있다. 스탈린 개인숭배의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 에이젠슈테인은 2부에서 감히 그 개인숭배에 반대하여 손을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공공연한 역사적 등가물들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으나 영화의 전체구조가 그것을 시사하며, 실제로 모든 장면의 문맥(컨텍스트)을 형성하고 있다. 거의 피부에 닿을 듯이 영화의 표현력은 풍부하였다. 그래서 살인, 처형, 혼란, 고뇌, 잔혹, 의심, 책략, 배신 등의 분위기는 이 영화의 첫 관객들에게 광기에 가까운 불쾌감을 가득 채워 주었고, 그들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감히 입 밖에 내려고 하지 않았다."
<필자: 이정하/영화평론가>
21. <말타의 매 The Maltese Falcon>(1941) / 감독: 존 휴스톤
필름 누아르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던 41년 존 휴스턴 감독의 <말타의 매>와 함께 태어났다.
프랑스의 범죄소설을 지칭하는 세리 누아르에서 가져온 이 말은 하드보일드풍의 펄프 픽션 이야기 구조와 사립탐정, 어두운 세트 공간의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속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그려내면서 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에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분명했던 기승전결은 범죄의 욕망 속에서 헝크러지기 시작했고, 얌전했던 여주인공들은 요부로 변신하였으며, 남자 주인공은 사방이 악으로 둘러싸인 함정 속에서 배신당하며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필름 누아르는 할리우드의 모든 장르 중에서 가장 음울하고 비관적인 기분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지키는 파수병이었다. 그리고 <말타의 매>에는 그 모든 것이 거의 완전한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다.
존 휴스턴(1906∼1987)은 윌리엄 와일러와 하워드 혹스 밑에서 연출 수업을 받았으며, 그 스스로 고백하듯 평생 제임스 조이스의 열렬한 독자였다. 그는 여러 장르의 영화를 찍었으나 자신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필름 누아르로의 복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말해왔다.
그는 빔 벤더스와 존 밀리어스, 로만 폴란스키, 오우삼 그리고 퀜틴 타란티노의 우상이었으며 또한 프랑스 카이에 뒤 시네마 비평가들에 의해 이류 감독(!)으로 낙인 찍힌 연출자이기도 했다.
<말타의 매>는 하드보일드 소설가 새뮤얼 대시엘 해밋 원작의 세번째 영화화이다. 사립탐정 샘 스페이드(험프리 보가트)는 브리지드라는 미스테리한 여성의 방문과 함께 동료를 살해당한다. 그는 사건을 뒤쫓으면서 사방에서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음험한 사내 카이로(페터 로레)와 그 뒤에 있는 '뚱보' 굿맨은 그에게 '말타의 매'라는 조각을 요구한다. 그 속에는 보석이 들어 있다는 단서와 함께.
음모와 허무로 가득 찬 하드보일드 소설을 어둠과 욕망의 영화로 옮겨놓은 것은 전적으로 존 휴스턴의 뛰어난 각색과 연출이다. 그는 영화 전편을 세트에서 촬영하면서 실내 공간을 밀폐공포증의 노이로제와도 같은 상황으로 만들어 놓았다. 등장인물들은 예외없이 운명의 덫에 빠져든 것처럼 꼼짝 못하고, 영화는 이야기가 한단계 진전될 때마다 매번 같은 공간으로 돌아와 이야기 구조 속에서 플롯을 발전시킨다. 그것은 반복이면서 또한 차이의 효과를 만들어내면서 프레임과 사운드의 관계를 새롭게 발전시켰다. 그 관계는 끝이 없을 것 같은 쇼트와 상대 쇼트의 반복 속에서 두 사람만이 있는 미디엄 쇼트(프랑스어에서 '아메리칸 쇼트'라고 번역하는!)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으며, 거기서 할리우드는 고전적인 프레임의 공간을 완성하였다.
웨스턴의 올 쇼트, 뮤지컬의 풀 쇼트, 갱스터 영화의 편집, 멜로드라마의 클로즈업에 이어 필름 누아르는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새로운 신화적 공간을 만들어냈으며, <말타의 매>는 바로 그 입구이다.
<필자: 정성일/영화평론가>
22. <인생유전 Les Enfants du Paradis>(1945) / 감독: 마르셀 까르네
2차대전이 발발하자 30년대 프랑스의 시적 사실주의를 주도하던 중요한 작가들은 프랑스를 떠났다. 장 르누아르와 줄리앙 뒤비비에는 미국으로 건너갔고 자크 페데는 스위스로 피난갔다. 그들이 프랑스를 비운 사이 이미 <안개 낀 부두>로 명성을 떨치던 마르셀 카르네만이 파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 평론가는 "비시 정권이 패배한다면 그것은 <안개 낀 부두>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그 염세적이며 패배감에 찬 성향이 문제라는 것이다.
카르네는 1840년대 루이 필립 치하의 파리 극장가 블르바르 뒤탕플을 무대로 인간극을 연출했다. 극장과 나이트 클럽이 줄지어 서 있던 환락가이자 범죄의 거리인 이곳에서 팬터마임 연기자 바티스트 뒤브로아주는 스테이지에서 나체춤을 추는 가랑스와의 애정을 축으로 장장 3시간35분의 인간 드라마를 만들어낸 것이다. 가랑스를 둘러싼 뒤브로, 극작가 피에르 라스네르, 연극배우 프레데리크 르메트르 등은 실존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낭만적인 사랑은 가상적인 것이었다.
우리들에겐 샹송 <고엽>의 작사자로 더 알려진 시인 자크 프레베르가 시나리오와 대사를 담당했다. 나치 점령하의 파리에서 3년3개월간의 제작 끝에 이뤄진 작품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서민들의 기질과 사랑의 끈질긴 근성을 보여줌으로써 나치에 대한 저항으로 평가되었던 <인생유전>에는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갈채를 보냈다. 카르네는 프랑스가 해방되고 다시 이 영화를 상영했을 때 의상제작자 제리코 역의 로베르 비강이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피에르 르누아르로 교체시켰다.
모두 2부로 구성된 이 작품은 1부 <범죄의 거리> 2부 <하얀 남자>이다.
장 루이 바로의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사랑과 팬터마임 연기. 당대의 명배우 피에르 브라쇠르, 마르셀 에랑, 마리아 카르레스와 무엇보다 여주인공인 아를레티 등의 불꽃튀는 열연으로 발자크의 인간극장을 연상케 한다.
<세계 영화전사>를 쓴 프랑스의 영화사가 조루주 사들은 이 작품을 카르네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뒤브로의 사랑. 팬터마임. 발자크적인 여인 아를레티와 정숙한 아내 마리아 카자레스와의 대비, 보헤미안적인 배우 브라쇠르, 무정부주의적인 암살자 에를랑. 그리고 대중연극과 범죄의 거리의 풍속도 등은 예술과 현실 사이를 넘나드는 걸작이다. 멜로드라마, 비극, 팬터마임 등의 묘미가 섞여 있다.
이 작품이 나치 치하의 파리에서 상영되기 시작했을 때 연합군은 이미 이탈리아 제노아에 막 상륙했다. 또한 프랑스 정부는 한편에 2천7백50미터 이상의 필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모든 제작사에 명령했지만 이 작품은 5천미터나 되는 필름을 사용했다.
원제목을 직역하면 <천국의 아이들>이지만 'paradis'라는 뜻은 극장 3층의 가장 값이 싼 자리를 일컫기도 하나, 프레베르는 서민과 연극배우를 통틀어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인생유전>은 나치에 저항하는 프랑스 서민들의 예술기질과 사랑의 대서사시이다. 즉 프랑스 서민과 민중을 대변하는 민족적인 영화인 것이다.
<필자: 안병섭/영화평론가·단국대 교수>
23. <무방비 도시 Roma, Citt Aperta>(1945) /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
사회현실과 역사를 충실히 기록함으로써 관객의 의식을 변화시키려는 영화의 시작은 아마도 네오리얼리즘일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고, 열린 결말을 추구하는 모더니즘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도 네오리얼리즘 영화였다. <무방비도시>는 네오리얼리즘의 서장을 장식한 영화이며 그 방법론과 실제를 구체화한 로셀리니의 전쟁 3부작 중 하나다.
2차대전중 독일 점령하에서 비밀리에 기획된 이 영화는 연합군이 상륙한 직후 촬영이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기록영화에만 제작허가를 내주었으나 로셀리니는 이를 장편극영화로 만들어 종전 직후 완성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동시녹음을 위한 필름과 기자재는 엄두도 못낼 만큼 비쌌고 촬영할 스튜디오도 구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무방비도시>는 각기 다른 종류의 자투리 필름으로 찍혀 화면은 다양한 질감을 갖게 되었고 로케이션 촬영이 돋보이는 기록영화적 분위기를 한껏 자아냈다. 게다가 느슨한 플롯과 열린 결말의 이야기에 가미된 감상적 멜로드라마는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독일군에게 살해된 한 신부의 실화를 근거로 만든 <무방비도시>는 이야기의 전개가 매우 완만하다. 영화를 시종 이끄는 인물은 레지스탕스 요원 맨프레디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그가 피신하는 행로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있다. 먼저 그의 동료의 약혼녀 피나가 있다. 이미 아들이 하나 있는 그는 독일군들이 약혼자를 붙잡아가는 것을 뒤따르다 결혼식날 무참하게 총살당한다. 피나의 결혼을 주례할 돈 피에트로 신부는 레지스탕스의 자금을 운반해주고 맨프레디와 동료를 수도원에 숨기려다 체포된다.
맨프레디의 옛 정부는 그를 하룻밤 피신시켜주나 그로부터 경멸을 받는다. 그리고는 마약과 사치품, 변태적인 애정행위에 팔려 그를 독일군에게 밀고한다. 맨프레디는 모진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고 영웅적인 죽음을 맞으며, 같이 체포된 신부도 결국 총살당한다.
그밖에도 전쟁이 싫어 탈주했으나 체포돼 감방에서 목매는 오스트리아 군인이, 또 게슈타포지만 나치이념에 냉소적이고 결국은 그 이념이 실패하리라 확신하는 술취한 장교가 이야기에 양념을 얹어준다.
로셀리니는 이들을 공평하게 자유롭게 그러나 아주 강렬하게 그린다. 주인공은 하나가 아니며 중심이 되는 사건도 없다. 억압적인 나치·파시즘 아래서 모든 인물들이 겪는 사건들은 그 자체로 강렬하다. 로셀리니는 이들을 통해 독일 점령하의 이탈리아에서, 로마의 골목길에서 벌어졌을 일들,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는 레지스탕스 정신 혹은 그에 반하는 타락의 모습을 훑어줄 뿐이다. 그 모습들은 하나하나가 멜로드라마다. 그래서 영화는 여러 겹의 멜로드라마가 된다.
이 감상적인 비극에 희극적 요소들을 삽입하는 로셀리니는 관조적이고 희망적이다. 맨프레디를 쫓던 독일군들은 여자들의 치마밑 풍경을 보느라 그를 놓치는가 하면, 동네아이들은 어디엔가 폭약을 설치하고 늦게 집으로 와 부모에게 야단맞으며 끌려들어간다. 그리고 신부는 병자성사를 위장하기 위해 멀쩡한 노인을 프라이팬으로 때려 눕힌다. 로셀리니는 그 신부가 총살당하는 마지막 장면에 아이들로 하여금 레지스탕스의 휘파람을 불게 함으로써 희망을 준다.
전후 이탈리아인들의 도덕성과 심리적 분위기를 즉각적으로 표출한 이 영화는 당시 이탈리아 영화가 지향할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현실도피적 환상을 부추겨온 전쟁전 부르주아 영화를 벗어나, 세계를 왜곡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가 곧 그것이었다. 로셀리니를 세계적 감독으로 만든 이 영화는 영화의 사회변혁기능을 실천한 많은 영화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필자: 주진숙/영화평론가>
24. <품행 제로 Zero de Conduite>(1933) / 감독: 장 비고
최초의 사운드 영화라는 <재즈 싱어>가 1929년 프랑스에서 개봉되면서 아벨 강스와 마르셀 레르비에가 이끌던 20년대 프랑스 무성영화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할리우드와 경쟁할 만한 음향기술 시스템도 미처 갖추지 못한 프랑스 영화계가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동안 <재즈 싱어>는 그 당시 50만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즉시 미국과 독일의 음향기술이 프랑스 영화계에 도입되었고 제작비는 3배로 치솟았다. 경쟁은 치열해졌고, 아벨 강스는 자신의 성공작 <나폴레옹>을 음향을 입혀 다시 제작했다가 실패한다. 이제 무성영화의 대감독들은 연이어 몇 편의 실패작들을 남긴 채 황혼의 전사로 사라져갔다.
1930년 초 프랑스 영화계는 <파리의 지붕 밑>(1930년)이라는 영화를 만든 르네 클레르와 함께 <품행 제로>의 감독 장 비고의 시대였다. 장 비고는 전기작가들이 군침을 흘리며 달려들 만한 모든 요소들을 갖춘 예술가였다. 우선 아버지는 당대의 이름난 무정부주의자여서 감옥을 빈번하게 드나들었고, 자신의 이름마저도 '똥이나 먹어라'식으로 개명할 만큼 파격적인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 비고는 12살의 병약하고 조숙한 소년이었고 이미 반카톨릭적인 자유주의자였다. '반역자'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이 소년은 학교 기숙사에서 영화 <품행 제로>에 실명 그대로 등장하는 문제아들을 만나 그야말로 성적표의 품행란에 영점을 기록하며 십대를 보낸다.
결핵을 앓기도 하던 20대, 그는 마침내 전설적인 소련 다큐멘터리스트 지가 베르토프의 아우인 보리스 카프만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도시 다큐멘터리 <니스에 관하여>라는 걸작이다.
1932년과 33년 사이에 만든 <품행 제로>는 여름방학을 집에서 지낸 두명의 소년 코사와 브루엘이 학교 기숙사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시작한다.
담배연기와 증기기차의 수증기가 어우러진 기차 안은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아이들은 악몽으로 끌려들어가듯 학교로 돌아간다. 곧 그들은 '마른 방귀'라는 별명을 가진 기숙사 사감에게 처벌당하는데,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은 이 영화에서 작은 폭군들인 양 희화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위게라는 젊은 교사는 찰리 채플린의 흉내를 내고 만화를 그려주기도 하면서 학생들의 숨통을 터준다. 이 선량한 선생님과 아이들이 마을로 소풍나가 떼지어 한 숙녀를 따라가는 장면과 그것과 교차되는 난쟁이 교장의 음모 장면은 슬랩스틱 코미디와 다큐멘터리를 혼합한 것 같은 이 영화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
교장과 교사들의 규율과 처벌에 맞서 코사 일행은 일대 소동을 일으키는데 바로 이때 베개와 침대보에서 터져나온 하얀 오리털이 폭설처럼 방안을 가득 채우는 세계 영화사의 환상적인 명장면 하나가 탄생한다. 느린 속도로 촬영된 이 부분은 사실 미적이면서 가치전복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이다.
마침내 마지막 시퀀스의 학교 축제를 맞아 국가, 종교, 군대를 대변하는 세명의 손님이 도착하자, 코사 일당은 지붕 위에서 책과 돌, 신발 등을 던지며 이들을 마음껏 조롱한다. 그리고 학생들은 마침내 프랑스 국기를 내려버리고 자신들의 혁명기를 올린다. 그리고 지붕 위를 걸어가며 하늘을 향해 노래한다.
<품행 제로>는 종교와 교육제도에 대한 신랄한 조롱 때문에 "사회질서를 교란시킨다"는 이유로 그 당시엔 상영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들과 풍자 코미디 그리고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보이는 이 실험성 높은 영화는 오히려 미래를 위해 만들어진 듯 보인다.
프랑스 누벨 바그의 악동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나 영국 프리 시네마의 기수인 린지 앤더슨의 <만약에> 등과 같은 제도교육의 모순을 다룬 영화들은 사실 모두 이 영화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 김소영/영화평론가>
25. <파이자 Paisa>(1946) /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
이탈리아는 2차대전에서 패배한 나라다. 그러나 영화로 세계를 제패했다. 낡은 카메라와 자투리 필름을 모아 영화를 만들어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비롯하여 비토리오 데 시카, 알베르토 라투아다, 주세페 데 산티스, 루이지 잠파 등 수많은 영화인들이 내놓은 작품들은 분명히 새로웠다.
평론가 피아트란젤리는 그것을 '새로운 사실주의'라는 뜻의 '네오 레알리즈모'라고 명명했다. 카메라를 현실 속에 놓고 상황과 작가 사이에서 새로운 리얼리티를 찾아낸 것이다.
샤를 스파크나 앙리 장송 그리고 자크 프레베르, 더들리 니콜스, 로널드 리스킨 등 극적 구성의 시나리오가 중심이 되어 인간을 극의 틀 속에서 파악하던 30년대의 가공된 미학에서 벗어나 현실 속에서 인간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낸 것이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는 <무방비도시>로 그 선두주자가 되었다.
그의 두번째 작품 <파이자>는 놀랄 만한 충격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로셀리니를 비롯하여 나중에 대가가 되는 페데리코 펠리니, 그리고 세르지오 아미데이 등 6명이 시나리오를 썼다. 이는 2차대전 때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이 시칠리아로부터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여 북상하며 해방시킬 때까지의 6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제1화는 1943년 7월10일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한 때의 이야기다. 조라는 미군 병사는 카르멜라라는 이탈리아 소녀를 알게 되지만 둘은 차례로 총살된다.
제2화는 10월1일의 나폴리다. 흑인 미군과 그의 군화를 훔친 이탈리아 소년의 이야기다. 미군은 소년을 집으로 데리고 가지만, 그에겐 집도 부모도 없다. 부모는 전쟁중 폭격으로 사망한 것이다. 소년의 유머러스한 모습이 재치있다.
세번째 에피소드는 로마다. 한 미군 병사가 거리의 여자를 따라가지만 몇달 전에 사귄 프란체스카를 잊지 못한다. 여자는 주소를 가르쳐 주고 문 앞에서 기다린다.
제4화는 피렌체다. 레지스탕스의 영웅 루포를 찾아 나서는 여자와 남자 이야기다. 시가전의 틈을 타 그들은 거리를 가로질러 가지만 남자는 살해된다.
다섯번째 에피소드는 전쟁중에 휴식을 취하는 듯한 삽화다. 어느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찾은 미군 선교군목 세 사람과 수도승과의 하룻밤이다. 수도승은 군목 중 유대교인이 한 명 있다고 놀란다. 군목들은 비참과 가난의 전쟁터에서 모처럼의 안정과 평화를 찾는다.
여섯번째 에피소드는 미국의 OSS(CIA의 전신)와 영국군, 그리고 빨치산이 펼친 포 강에서의 저항이다. 결국 이들은 모두 독일군에게 잡혀 배에서 강물 속으로 차례차례 밀려 떨어진다. 충격적이다. 세 가지 에피소드가 레지스탕스와 관련이 있다.
앙드레 바쟁은 이 작품이 미국 소설가 사로얀을 비롯하여 도스 패소스, 포크너, 헤밍웨이 등의 중편소설들과 같은 구성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섯 가지 에피소드는 각각 분리되어 있지만 미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한 뒤 있음직했던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파이자'는 이탈리아계 미군이 이탈리아 사람을 일컫는 말로 영어로는 '파이잔'이다. 일본에서는 이 작품을 <전화의 건너편>이라고 번역했다.
<필자: 안병섭/영화평론가·단국대 교수>
26. <흔들리는 대지 La Terra Trema>(1947) /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
인간의 정신적 심리적 갈등은 항상 사회적 경제적 갈등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마르크시스트 신념을 영화로 구체화시키기 위해 1947년 루키노 비스콘티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자금지원을 받아 시칠리아로 갔다. 전후 시칠리아의 경제적 문제들을 짧은 기록영화에 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가 기획한 것은 중간상인들에게 착취당하는 어부들, 폐광으로 일자리를 잃은 광부들, 마피아라는 준봉건적 제도에 대항하는 농부들에 대한 3부작이었다. 비스콘티가 구상했던 마지막은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들리며 수백명의 농부들이 지평선 위로 나타나며, 그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대지는 진동하고 그들은 붉은 기장과 삼색기를 휘날리며 경작할 대지를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스콘티가 대면한 시칠리아 노동자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착취와 억압에 대항해 혁명을 일으킬 의지도 없었고 그 혁명적인 '진동하는 대지'의 마지막을 그릴 만한 상황도 되지 않았다. 그 결과 이 마지막에서 제목을 딴 <흔들리는 대지>는 바다를 삶의 원천으로 삼고 있는 어부들을 그린 한 편의 허구영화가 되었다.
<흔들리는 대지>는 네오리얼리즘 미학의 정수를 가장 잘 뽑아낸 작품으로 꼽힌다. 영화는 아치트레차라는 어촌을 배경으로 그 마을 주민들을 연기자로 등장시키고 있으며, 대다수의 이탈리아 사람도 알아듣기 어려운 그들만의 사투리를 그대로 대사로 이용하며, 소수의 밤 장면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연조명을 이용하고 있다.
또한 대지와 바다를 이어주는 긴 카메라의 움직임, 실내와 외부를 연결하는 심도 깊은 공간표현 등은 이 영화의 사실성을 한껏 높여주는 기능을 한다.
비스콘티가 이 사실주의적 영상 속에 그려낸 이야기는 무척 비극적이고 강렬하다.
어부들의 고된 노동의 가치는 중간상인들의 손에서 나날이 떨어진다. 주인공 토니는 바다에서 죽은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 남동생과 함께 어머니, 세 여동생과 남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이다. 토니는 중간상인들의 횡포에 대항해 어부들끼리 힘을 합치자고 주장하지만 동조하는 어부들은 없다. 직접 생선을 팔기 위해 그는 집을 담보삼아 배를 산다.
한동안은 생활이 나아지나 엄청난 폭풍 속에 배를 잃고 겨우 목숨만 건지게 된다. 남동생은 미지의 이방인에 이끌려 집을 떠나며 할아버지는 죽는다. 집마저 잃은 토니의 가족에겐 빈곤과 굶주림만 남아 있다. 토니는 애인으로부터 버림받고 토니의 여동생은 목걸이 등의 물건에 팔려 유혹에 넘어간다. 도매상인들은 번성하고 어촌의 경제는 그들에게 장악된다.
마지막에 누더기차림의 토니는 남동생들을 이끌고 다시 중간상인에게 일을 구걸하고 바다로 나간다. 사람들이 마침내는 "서로 사랑하고 힘을 합치는 것"을 배우게 될 좋은 세상이 오길 희망하면서.
<흔들리는 대지>가 처음 상영되었을 때 중류계층 관객들은 휘파람을 불고 야유를 했다. 귀족 출신의 감독이 자신의 계층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한편 좌익 비평가들은 "누더기의 형식주의"라고 비난했다. 혁명적 기록영화로 시작한 작업이 비관적인 결말을 담은 과장된 멜로드라마가 그들에게는 역겨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흔들리는 대지>의 화면은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나 <파이자>의 거친 화면에 비해 너무나 우아하고 장중한 엄숙미를 주며, 데 시카가 절망적인 상황 속의 인물들을 열린 태도로 관조하게 하는 데 비해 비스콘티는 인물들을 운명론적으로 그려준다. 풍부한 문예교육을 받고 자란 귀족, 2차대전중엔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마르크스시스트인 비스콘티의 미학적 모순 혹은 갈등의 흔적은 이 영화 전편에 남아 있다.
<필자: 주진숙/영화평론가·중앙대 교수>
27. <자전거 도둑 Ladri di Biciclette>(1948) / 감독: 비토리오 데 시카
네오 레알리즘 영화중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만큼 널리 성공한 작품도 드물다. 영화사의 10대 걸작을 꼽을 때면 으례 하나로 뽑히곤 한다. 루이지 바르톨리니의 원작을 네오 레알리즘의 이론적 기수인 체자레 자바티니가 시나리오를 썼다.
데 시카가 없는 자바티니는 생각할 수 있지만 자바티니가 없는 데 시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데 시카는 자바티니에게서 많은 것을 얻어 왔다. 이 둘은 네오 레알리즘의 환상의 명콤비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된 로마에서 오랜동안 실직상태이던 안토니오 리치는 어느날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포스터를 붙이는 일이다. 그 일에는 자전거가 필요하다. 아내 마리아에게 말해 헌 옷가지를 전당포에 맡기고 자전거를 구한다. 어린 아들 브루노도 따라 나선다. 그러나 어느 모퉁이에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누가 자전거를 훔쳐 타고 달아난다. 안토니오는 쫓아가나 허사다. 경찰에 신고하지만 경찰은 하찮은 일이라는 듯 반응이 없다. 허탈해진 안토니오는 자전거포를 뒤지다 어느 젊은이가 자기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것을 본다. 쫓아가지만 또 허사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그 젊은이 집을 찾는다. 안토니오는 빈민가의 그 집을 보고 절망에 빠진다. 자기처럼 가난한 데다 젊은이는 간질을 일으키며 길가에 쓰러진다. 경찰이 오나 증거도 없다. 그러던 중 아들과 다투고 아들이 없어진다. 안토니오는 강가에서 어린애가 빠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들을 찾아 나선다. 아들은 계단 위에 나타난다.
경기장에서는 축구시합이 한참이다. 밖에는 자전거들이 즐비하다. 안토니오는 아들에게 먼저 집에 가 있으라고 하고 자전거 한대를 훔쳐 달아나다 곧 주인에게 붙잡힌다. 경찰이 온다. 그는 자전거 주인의 선처로 풀려난다. 석양의 거리를 아들은 뒤따르고 안토니오는 허탈한 모습으로 걸어간다.
자전거를 도둑맞은 노동자가 결국 자전거도둑이 된다는 전후 로마의 이야기는 참으로 역설적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프롤레타리아 영화이다.
데 시카는 1955년 3월4일 프랑스신문 <르몽드>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작품을 영화화하려고 몇달째 제작자를 찾았으나 구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한 미국제작자가 나섰다. 단 주인공으로 케리 그랜트를 써달라는 조건이었다. 나는 거절했다." 여기에 바로 이 작품의 성공의 열쇠가 숨겨져 있다. 그는 미남인 케리 그랜트 대신 어느 공장의 무명의 노동자 람베르토 마지오라니를 대담하게 주인공으로 기용했다. 아들 브루노에는 거리를 쏘다니던 부랑아 엔조 스타이올라, 그리고 아내에는 기자 리아델라 카렐을 기용하는 등 모두 비직업적인 무명배우를 썼다.
<자전거 도둑>은 스튜디오 촬영이 없다. 모두가 거리에서 촬영한, 현실에 가까운 가장 사실적인 작품이다. 앙드레 바쟁은 말했다. "이는 순수영화의 첫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배우도 없고 이야기도 없고 연출도 없다. 이것은 영화가 이제 더 이상 완벽한 미학적 환상 속에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에 앞서 그는 "확실히 (지난) 10년 동안 제작된 공산주의적 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가치있는 공산주의적 영화이다.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그 사회적 의미를 추상화시키더라도 그 뜻을 간직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고 비평했다.
<필자: 안병섭/영화평론가·단국대 교수>
28. <제3의 사나이 The Third Man>(1949) / 감독: 캐롤 리드
캐럴 리드 감독의 <제3의 사나이>(1949)는 참으로 '이상한' 영화이다. 아마도 이처럼 세련된 상업영화 스타일과 다양한 예술영화의 전통이 함께 행복하게(!) 만난 예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올드 팬들에게는 향수가 되었고, 시네마데크가 오랫동안 사랑해온 리스트이며, 젊은 영화광들의 고전이면서, 영화이론의 논쟁적 장소를 마련하였다.
무대는 종전 직후 연합군 공동관리체제 아래 놓인 빈. 여기에 미국인 소설가 홀리 마틴스(조지프 코튼)가 친구 해리 라임(오손 웰스)을 찾아온다. 그러나 친구는 이미 교통사고로 죽은 다음이다. 홀리는 친구의 애인 안나(아리다 발리)를 만나본 다음 이곳을 떠나려 한다. 영국군 소령 캘로웨이(트레버 하워드)는 홀리에게 친구 해리가 가짜 페니실린을 유통시킨 혐의로 연합군의 추적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게다가 해리는 죽은 것이 아니었으며, 홀연히 해리 앞에 나타나 전망차 앞에서 명대사를 한다. "칠백년 평화로운 스위스에서는 뻐꾸기 시계 하나를 만들었지만, 전쟁이 이어지던 이탈리아에서는 미켈란젤로와 다빈치가 있었지." 그러나 홀리는 가짜 페니실린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고 해리를 고발하기로 결심한다. 함정에 빠진 해리는 홀리의 손에 죽고, 안나는 그의 곁을 떠난다.
낙엽지는 초겨울에 빈에서 촬영한 <제3의 사나이>는 원작자 그레이엄 그린 자신이 각색한 시나리오로 만들었다. 캐럴 리드는 '결코' 위대한 영화감독은 아니지만, 그는 단 한편의 걸작을 남기는 데 성공하였다. 처음부터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선 영화의 백과사전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우선 무엇보다도 종전 직후의 황폐한 빈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보인다. 로버트 크래스커의 흑백촬영은 존 그리어슨으로 시작하는 영국 기록영화의 전통에 서 있으며, 한편으로는 거리에서 미학을 완성시킨 이탈리안 네오 레알리즘과도 정신적 연대를 함께 하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대부분의 장면이 밤에 촬영되면서 동원된 조명과 미술, 세트는 전후 빈을 마치 독일 표현주의 영화와도 유사한 빛과 그림자의 세계로 바꿔놓는다. 의도적으로 경사 구도의 카메라 앵글로 화면을 만들었으며, 인물들은 그 사이를 떠도는 유령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리얼리즘과 표현주의 영화의 전통이 서로 뒤섞여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의 자본이다. 그는 기꺼이 이 유럽영화에 투자했으며, <제3의 사나이>가 유럽에서 만든 필름 누아르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원한 것을 손에 넣었다.
<제3의 사나이>는 49년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으며, 국제적인 흥행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영화적 깊이나 미학적 실험은 없지만, 마치 홀린 듯이 안톤 카라스가 연주하는 민속악기 지타의 선율을 따라 빈에서 펼쳐지는 이 영화는 수많은 명장면과 전율할 만한 이미지의 황홀감을 안겨준다. 특히 가을 낙엽이 지는 빈의 가로수 저편에서 걸어와 기다리는 홀리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지나가는 안나와의 기나긴 이별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장면의 하나이다. 영화는 때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명장면의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다. <제3의 사나이>는 추억과 감상주의 사이에 선 아슬아슬한 기억이다.
<필자: 정성일/영화평론가>
29. <라쇼몬 羅生門>(1950) / 감독: 구로자와 아끼라
일본영화가 국제무대에서 처음으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몬>(50년 8월 개봉)이 195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고나서부터였다.
이후 일본영화는 미조구치 겐지,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등이 잇따라 세계영화제를 석권하면서 패전으로 실의에 빠져있던 일본인들에게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완성 당시만 해도 일본 안에선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채 지나쳤던 <라쇼몬>이 서구인들에게 높이 평가받은 이유는 색다른 동양문화였기 때문이 아니라, 보편적 주제의식과 영화적 미학의 뛰어남 때문이었음은 지난 82년 베니스영화제 역대 대상(황금사자상) 수상작중 최고 작품으로 선정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현재까지도 이 작품은 주제의식의 강렬함, 뛰어난 형식미로 인해 영화학도들에게 교과서적인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라쇼몬>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라쇼몬>(15년)과 <숲 속에서>(21년) 두 편을 묶어 각색한 영화다. 작품의 배경은 내전으로 인해 피폐한 12세기 헤이안조 시대다.
숲 속에서 한 무사가 살해되고 그의 아내가 산적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절반쯤 쓰러져가는 라쇼몬에서 승려와 나무꾼, 행인이 그 살인사건을 회상한다. 법정에서 무사의 아내, 살인 강간 혐의로 잡혀온 산적(미후네 도시로), 무당을 통해 증언하는 죽은 무사의 혼령, 목격자 나무꾼이 증언하는데, 그들은 그 사건을 서로 다르게 이야기한다. 모두가 자기 말이 진실인듯 말하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끝까지 알 수 없다.
영화는 '살인범은 누구인가?'라는 미스테리 모티브로 시작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사건은 분명 하나인데 사람에 따라 자기 중심적 입장에서 달리 증언한다. 거기서 핵심 주제인 인간의 이기주의와 진실의 상대성을 읽을 수 있다. 구로자와는 각색과정에서 원작에 나타난 허무주의적이고 인간에 대해 냉소적인 관점을 휴머니즘으로 변화시키고자 후반부에 (원작에 없는) 어린아이를 등장시켜 인간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제시한다. 휴머니즘, 인간에 대한 탐구와 따뜻한 애정은 구로자와 영화 전반에 나타나는 주제의식이다. 그는 카메라로 해를 직접 찍는 것을 금하던 당시의 틀을 깨고 숲 사이로 비친 해를 과감히 찍음으로서 조명의 새로운 미학적 효과를 창출했을 뿐 아니라 몽타주의 적절한 사용, 정교한 카메라 움직임, 고전적인 일본연극의 인물배치에서 착안한 화면구도, 서양음악을 재해석한 음악과 음향효과의 적절한 사용 등으로 영화미학을 진일보시키는 데 공헌했다.
<라쇼몬>은 당대 일본영화의 대가들인 오즈나 미조구치의 영화들과 비교해 서구적 스타일의 영화로 자주 언급된다. 물론 카메라 움직임이나 복합적인 스토리 구성, 음악 등에서 서구적 영향이 많이 나타나긴 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숨어있는 일본적인 구도나 이미지를 간과해선 안된다. 특히 재판관을 생략한 채 증언자들만 보여주면서 그들을 양식화된 화면구도로 잡아내는 법정 장면이나 일부 정적인 분위기들은 순전히 일본적이다. 구로자와에게는 서구적 기법을 자신의 일본적 이미지 속에 융화시키는 재주가 있다. 그는 또 '단순화는 현대예술의 중요한 미학적 테크닉의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최소한의 등장인물(엑스트라 포함 9명)과 단 몇군데의 공간(라쇼몬, 법정, 숲속, 강가)만으로 경제적인 화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필자: 이정국/영화감독>
30. <사랑은 비를 타고 Singin' in the rain>(1952) / 감독: 진 켈리·스탠리 도넌
뮤지컬은 지나치게 할리우드적인 영화 장르다. 서부영화가 미국의 건국신화라면 공상과학영화는 미국의 미래 국가전략을 영상으로 실험하는 일종의 전략적 도상게임이라 할 수 있다.
미국-할리우드만이 만들 수 있는 이 세 가지 장르 영화 중에서도 뮤지컬 영화는 그 화려함과 환상적 성격으로 할리우드적인 영화의 전형적 모습으로 꼽힌다.
할리우드에서도 뮤지컬 영화의 명문은 포효하는 사자의 로고로 유명한 미국 MGM사였다. 그리고 그 '꿈의 공장'의 좌우명은 사자 위에 라틴어로 쓰여 있다. 'ARTS GRATIA ARTIS'. 이 말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 일이다. 이것은 무슨 심각하고 고상한 예술영화를 만들겠다는 다짐이 아니다. 현실의 복잡함과 고통 대신 영상의 환상세계를 관객에게 선사하겠다는 할리우드 영화 프로페셔널리즘의 '탈현실 선언'이다.
1952년 사자는 다시 으르렁거리고 멋진 쇼가 시작되었다. 노란 비옷에 검은 우산을 쓴 세 사람, 즉 진 켈리, 데비 레이놀즈, 도널드 오코너가 등을 보이며 서 있다. 그리고는 뒤돌아서며 주제곡을 부르기 시작한다.
"빗 속에 노래하면… 얼마나 빛나는 순간인가요. 나는 다시 행복을 찾았어요… 태양은 내 가슴에 사랑을 준비하고 있어요."
이 노래로부터 켈리와 레이놀즈가 사랑의 언약을 맹세하는 마지막 장면까지의 1백3분은 영화적 재미의 모범답안이며 뮤지컬 영화의 최정점을 보여주는 시간이다.
장르 영화를 재평가하고 있는 요즘 영화 100년 역사의 10대 걸작영화의 하나로 꼽히는 <사랑은 비를 타고>는 우선 경이로운 영화다. 볼 때마다 춤과 노래, 세트 그리고 강렬한 색채에 매혹당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산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일깨워준다.
'그들을 웃겨라'라는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오코너의 모습에서 인생은 제목 그대로 웃음이다. 그것도 정신 차릴 수 없는 폭소연발이다. 그리고 사랑의 발견 뒤에 정말 비를 흠뻑 맞으며 주제곡을 부르는 켈리에게서 가슴 충만한 사랑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게다가 켈리가 뇌쇄적인 여배우 시드 채리스와 함께 '브로드웨이 리듬' 발레를 추는 장면은 황홀한 인생의 절정을 보여준다.
개념으로 세상을 보게 마련인 '불행한' 영화비평가들은 뮤지컬 영화를 영화의 현실 도피적 성격이 극대화한 영화 장르로 설명한다. 즉 뮤지컬 영화는 영상의 환상 속에서 사랑-증오, 성공-실패, 부유함-빈곤함, 그리고 남자-여자와 같은 현실의 대립항들을 거세시키면서 관객들을 유토피아의 축제로 초대한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다. 또 이런 주장들은 역사적 증거까지 제시한다. 그러나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면서 이런 주장을 편다면 그건 멋대가리 없는 똑똑함이다. 걸작영화에는 몇 가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함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비를 타고>는 뮤지컬 영화의 대표작 그 이상이다. 이 작품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발전하는 시대를 드라마의 배경으로 설정하면서 영화의 역사에 대한 영화로 발전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생과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한 세기를 살아 온 대중적 낙관주의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필자: 강한섭/영화평론가·서울예전 교수>
31. <오하루의 일생 西鶴一代女>(1952) / 감독: 미조구찌 겐지
구로사와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라쇼몬>으로 대상을 받았을 때 가장 자극받은 사람은 당시 일본에서 최고로 대접받던 미조구치 겐지였다. 자존심 강한 그는 한참 후배인 구로사와가 먼저 국제적인 평가를 받자 그 자신도 국제무대를 향해 포문을 열기 시작했는데, 그 첫 작품이 <오하루의 일생>이었다.
미조구치는 그 작품과 이후 연작 형식으로 만든 <우게쓰 이야기>(53년)와 <산쇼다이후>(54년)로 특유의 탐미적 리얼리즘과 롱테이크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어 서구 평론가들의 극찬 속에 3년 연속 베니스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특히 앙드레 바쟁을 비롯한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들은 미조구치가 사용한 '원 신 원 쇼트'에 의한 롱 테이크 카메라 스타일을 진정한 리얼리즘 미학의 모범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미조구치의 작품 대부분이 그렇듯이 <오하루의 일생>도 남성본위 사회의 여성의 비참함과 자기 희생을 신비적일 만큼 아름다운 영상으로 그리고 있다.
사이가쿠 이하라 원작을 항상 각본 작업에서 콤비를 이뤄온 요다 요시카다와 공동각색한 작품의 배경은 17세기 봉건시대의 일본이다.
이야기는 '오하루'라는 한 늙은 창녀의 회상에서 시작된다. 교토의 사무라이 집안의 딸로 태어난 그는 신분이 낮은 하인과 사랑에 빠졌다가 들켜 영주에게 쫓겨나고, 그의 애인은 처형당한다. 그뒤 그는 다른 영주의 씨받이로 팔려가 아들을 낳아주고 쫓겨나 고급기생으로 팔린다.
거기서 다시 부유한 상인에게 팔리고 마침내는 떠돌다가 하류 사창가에서 창녀가 되어 늙어간다. 자기가 낳은 아들이 영주가 됐지만 신분이 달라 직접 만나지도 못하고 멀리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결국 불교에 귀의해 비구니가 되어 자신에게 닥쳐왔던 불행을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일본판 '여자의 일생'이라 할 수 있는 <오하루의 일생>은 봉건제 아래서 남자들에 의해 인생유전하던 한 창녀가 점차 성녀처럼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 종교적인 숙연함까지 느끼게 한다.
어린 시절 기생인 누나의 손에 자란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여성에 대한 시각과 관심의 일면이 작품에 매우 잘 표현되어 있다.
<오하루의 일생>을 비롯한 미조구치 영화 대부분이 남성보다는 여성의 강인함과 끈질긴 생명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묘사는 매우 이중적이다. 즉 여성들의 인생역정은 매우 비극적이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형식은 지극히 탐미적이다.
그는 여성들의 역경과 비참함을 사회의 제도적 모순 비판의 시각에서 그리는 듯하면서도 그들의 자기 희생을 관조하는 미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는 강렬한 비극성으로 인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시대 고증과 미장센에 관한 철저함으로 진정한 리얼리스트 미조구치는 구로사와에게도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의 영화 형식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몽타주를 거부한 일관된 카메라 스타일이다. 그는 클로즈 업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주로 롱 쇼트, 롱 테이크, 그리고 느리게 움직이는 카메라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제시하여 주인공 오하루의 인생을 관조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러한 미학은 서구의 젊은 영화인, 특히 50년대 말에 등장한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자크 리베트같은 감독은 자신의 작품 <수녀>(65년)를 <오하루의 일생>의 의도적인 모방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을 정도다.
<필자: 이정국/영화감독>
32. <도쿄 이야기 東京物語>(1953) / 감독: 오즈 야스지로
오늘날 서구의 영화학자와 평론가들에게 뒤늦게 진가를 인정받으며, 마치 아시아 영화의 정신적 지주인 듯한 이미지로 신화화하고 있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과연 얼마나 동양적인가? 우리가 이러한 신화화에 무작정 동참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그의 대표작 <도쿄 이야기>에는 우리와 비슷한 정서적 측면과 오즈 나름의 독특한 영화적 스타일(물론 그것이 반드시 동양적이라고 못박기는 어렵다)이 농축되어 있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남부 일본의 오노미치에 사는 한 노부부가 도쿄에 사는 아들과 딸 내외를 만나러 가지만 그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를 온천관광지인 아타미로 보내는 등 소홀히 대한다. 전쟁 통에 남편을 잃어버린 며느리 노리코만이 그들을 정성껏 모신다. 오노미치로 돌아온 뒤 어머니는 병을 얻어 숨을 거둔다. 아들과 딸 내외는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도쿄로 돌아가 버리고 노리코가 남아 시아버지를 위로하고 떠난다.
'드라마게임'에서 흔히 보았음직한 이 '가정 드라마'에서 오즈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또 명료하다. 그에 따르면 "부모와 성장한 자식들을 통해 일본의 가족제도의 붕괴를 그리려 했다"는 것이다. 사실 가족간의 갈등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재이다. 단지 오즈는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과 이별, 부부간의 갈등 등을 일관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며 절제된 형식적 미학의 완성이 <도쿄 이야기>에 있다. 즉, 연기자와 카메라의 움직임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마치 고요히 강이 흐르듯 노부부의 감정의 미묘한 변화를 차분히 그려나간다. 감정의 절제를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일본인의 정서와 미학관이 절정을 이룬다. 아마도 서구의 영화학자와 평론가들은 이러한 절제의 미학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쿄 이야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확실히 <도쿄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우리의 영화를 돌이켜 보게 한다.
<도쿄 이야기>는 정서적 측면이 얼핏 보면 우리와 유사한 부분이 많은 듯하면서도 다른 점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내가 죽고난 새벽, 슈치키 노인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아, 아름다운 새벽이구나"라고 읊조린다. 그리고 가족들은 눈물만 찔끔찔끔 흘릴 뿐이다. 우리는 다정다감한 대화를 생각할 때 마주 앉은 술좌석을 떠올린다.
반면 <도쿄 이야기>에서 그런 대화는 서로 마주 보지 않고 한쪽 방향을 바라보면서 이루어진다. 마치 낚시터에서 낚시찌를 바라보고 있는 두 낚시꾼을 보는 듯한 이 장면은 빔 벤더스가 흠모해 마지않았던 것과 달리 우리에게는 낯설게 보인다.
다다미와 온돌방이 좌석문화라는 점에서는 유사한데 왜 우리에게는 다다미 쇼트와 같은 독특한 구도가 생겨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러한 질문을 떠올리면 평범한 소시민의 생활 속에서 따뜻한 인정을 발견한다는 <도쿄 이야기>도 실은 극도로 양식화한 일본문화의 전형(예를 들면 템포를 중요하게 여기는 오즈가 자신의 영화에서 연기자들에게 걸음의 숫자마저도 꼼꼼하게 지시할 만큼 형식미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이지, 그것이 곧 동양문화의 전형은 아닌 것이다. 아시아의 영화감독들이 오즈에게 경도된 것은 아마도 형식미보다는 그의 영화 속에 녹아 있는 인간애일 것이다.
<필자: 김지석/영화평론가>
33. <7인의 사무라이 七人の侍>(1954) / 감독: 구로자와 아끼라
현대 일본영화사는 60년대 이전의 막강한 거장인 구로사와, 오즈, 미조구치 등을 극복하려고 발버둥치다 실패한 역사와 같다. 살아있는 유일한 거장이라는 구로사와 아키라조차도 50년대 전성기의 자신을 극복하려다 실패했다. 그는 이미 50년대에 <라쇼몬> <산다> <7인의 사무라이> 등으로 절정기를 보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작이 54년에 만든 <7인의 사무라이>다. 그 작품은 현재까지도 일본뿐 아니라 세계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구로사와의 작품 대부분이 그렇듯이 <7인의 사무라이>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절묘하게 배합하는 데 성공한 영화다. 그의 영상언어는 일본이라는 경계를 뛰어넘어 서구까지 미칠 정도로 세계성, 보편성을 담고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구로사와가 누구보다도 서구영화, 특히 미국영화의 영상미학을 긍정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7인의 사무라이>는 16세기 중반 내전으로 혼란스런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산적들의 빈번한 침입에 시달리는 한 마을의 농부들이 자신들을 지켜줄 의로운 사무라이를 찾아 나선다. 간베이라는 한 중년 사무라이는 농부들의 요청을 받고, 칼솜씨가 뛰어나고 개성이 뚜렷한 사무라이들을 하나씩 모아 일곱명이 되자 그 마을에 들어가 산적들과 싸운다.
농부들에게 고용된 사무라이들은 오히려 보호자 입장이 되어 농부들을 훈련시키고 지도하여 그들을 괴롭히는 산적들을 모두 해치운다. 살아남은 사무라이들은 평화로워진 마을을 뒤로 하고 정처없이 길을 떠난다.
<7인의 사무라이>는 농민, 사무라이, 산적, 이 세 집단간의 미묘한 갈등과 싸움을 다루고 있지만 구로사와가 최종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집단은 결국 사무라이들이다. 그는 정의로운 사무라이들을 통해 자신의 휴머니즘을 실현하고자 한다. 스토리 구성과 인물설정의 기본 모티브는 중국의 고전 <수호지>에서 따왔지만, 한 영웅이 혼란스럽고 무정부적인 마을에 들어가 악을 물리치고 정의를 실현한 뒤 떠난다는 신화적인 구조 설정은 미국 서부영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사무라이에 대한 짙은 향수'라는 일본적인 의식을 주제로 삼되 그것을 풀어나가는 미학적인 틀은 서부영화의 거장 존 포드 감독의 <황야의 결투>(46년)에서 차용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카메라를 다루는 기법이나 일부 에피소드가 눈에 띄게 유사하다.
그러나 구로사와는 단순한 모방으로 끝내지 않고 오히려 한단계 발전시키는 창조적인 모방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그런 재능으로 인해 그는 미국영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으면서도 나중에 오히려 미국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감독으로 기록된다. 코폴라, 스필버그, 루커스 같은 현대 미국영화 거장들이 각각 <대부> <대추적> <스타워스> 등에서 구로사와의 영향을 숨기지 않는 걸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7인의 사무라이>에선 존 포드적인 역동적인 카메라와 프랭크 캐프라적인 유머, 미조구치 겐지적인 리얼리즘과 오즈 야스히로적인 양식화된 구도가 잘 어우러져 있다. 특히 각 집단이나 주요 인물마다 테마음악을 설정하여 사용한 사운드, 당시엔 별로 사용되지 않던 망원렌즈의 대담하고 효과적인 사용과 극대 클로즈업, 극적인 슬로 모션과 함축적이고 빠른 편집, 원형 모티브를 이용한 화면구성 등, 형식과 내용의 조화로 인한 총체적인 미학의 완성도는 베토벤의 교향곡 <합창>을 연상시킨다.
<라쇼몬> <요진보>가 그랬듯이 <7인의 사무라이>도 미국판으로 번안되어 만들어졌는데 존 스타제스의 <황야의 7인>(60년)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 작품 역시 <라쇼몬>의 번안작 <폭행>처럼, 흥행에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미학적 퇴보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필자: 이정국/영화감독>
34. <길 La Strada>(1954) /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
페데리코 펠리니(1920∼1993)는 네오레알리슴에서 출발해서 자기 환상에 대한 탐닉으로 영화 인생을 끝마친 인물이다. 그는 영화가 곧 삶이고 삶이 곧 영화인 그런 삶을 살았는데 이 점에서 그의 영화는 내적 경험을 중요시하는 주관주의의 범주로 틀지워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비평적 입장이라 하더라도 그 격정성과 인간내면에 대한 관심이 뿜는 그의 영화의 매력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길>은 펠리니의 명성을 국제적인 것으로 만든 초기 대표작의 하나다. 이 영화는 명백히 네오레알리슴의 틀 안에 있던 자신의 영화를 시적이고 주관적인 세계로 열어놓는 전환점이며 동시에 이탈리아 영화가 네오레알리슴의 외적 현실에서 인간관계의 내적 현실로 초점을 이동하는 과도기의 징후적 작품이기도 하다. 펠리니는 네오레알리슴의 대표자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45년), <전화의 저편>(46년) 등의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 이력을 시작하여 1952년 <백인 우두머리>로 감독이 되었다. 이 영화는 다음 작품 <이비텔로니>와 더불어 네오레알리슴 계열로 분류되지만 <길>에서 돌이켜보자면 주관성 또는 내적 접근의 특성은 이미 여기에 드러나 있었다고들 말한다.
펠리니는 떠돌이 서커스단과 대중적인 뮤직홀의 배우였고 열렬한 칭송자였다. <길>에는 펠리니 영화의 주요한 모티브인 서커스와 사랑을 통한 구원이라는 두가지 주제가 얽혀 있다. <길>은 떠돌이 광대 잠파노와 백치 소녀 젤소미나, 줄광대 일 마토 사이의 단순한 이야기를 통해 바로 사랑을 통한 구원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한다. 주제는 길에 놓여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제목대로 세 떠돌이의 삶의 여행의 한 기록이다. 잠파노(앤소니 퀸)는 삼륜차를 몰고 마을을 떠돌며 쇠사슬을 끊는 재주를 선보이는 광대이다.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는 잠파노의 조수였던 언니가 길에서 죽은 뒤 그 자리를 대신 채우려 팔려온 백치 소녀이다. 그는 북을 치고 트럼펫을 불며 잠파노 묘기의 조수 역할을 하는데 사실은 우악스런 잠파노가 성욕을 배설하는 소유물이다. 그러나 그의 천진성과 헌신성은 서커스단에서 줄광대 일 마토(리처드 제이스하트)를 만나면서 인간적 가치를 드러낸다. 그는 잠파노와 젤소미나 사이의 촉매자가 되려 하나 야수성과 천진성이라는 운명적 비극의 관계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들의 길은 서로 결정적으로 어긋난다. 잠파노는 일 마토를 죽이고 젤소미나는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잠파노는 젤소미나를 버린다. 5년 뒤 잠파노는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잠파노는 그의 부재를 통해서 스스로의 고
독을 깨닫는다.
<길>은 하층계급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가난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내부와 운명과 시간 간의 비극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길>의 예술성의 바닥에는 리얼리즘과 환상과 정신적 가치에 대한 추구가 한꺼번에 고여 있다. 동시에 이 영화에는 뜨내기로 추락한 미녀와 야수의 패러디가 있으며 예수의 이미지로서의 '바보' 줄광대와 성녀 이미지로서의 '백치' 소녀라는 종교적 알레고리가 숨어 있다. 오텔로 마르텔리의 카메라와 니노 로타의 음악은 이 영화가 고전이 되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만약 앤터니 퀸과 줄리에타 마시나의 역을 제작자의 고집대로 실바나 망가노와 버트 랭커스터가 했더라면 결과는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펠리니가 이 영화를 그의 '영감의 원천'인 아내 마시나를 위해 만들었다는 말은 기억할 만하다. 동시에 펠리니가 말하는 사랑을 통한 구원이 사실은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주관
주의와 리얼리즘을 잇는 통로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 이정하/영화평론가>
35. <바람에 쓰다 Written on the Wind>(1956) / 감독: 더글라스 서크
더글러스 서크의 <바람에 쓰다>가 '영화 100년, 영화 100편'에 선정되었다는 것은 좀 뜻밖의 사실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미국 영화사를 뒤적여 보아도 서크의 존재는 미미하다.
실제로 더글러스 서크는 영화사에서 재발견된 사람이다. 60년대 후반부터 멜로드라마 장르에 관심을 가진 영국의 문화이론가들이 서크의 영화에 주목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정열적으로 할리우드와 브레히트적 영화의 행복한 결혼을 꿈꾸던 파스빈더가 서크의 <하늘이 허용하는 모든 것>(1955년)을 전범으로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만들고, 서크의 단편영화 <버번스트리트 블루스>(1978년)에 배우로 출연하자 사람들은 그의 영화들을 꼼꼼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대안적 영화를 생각하고 만들고자 하는 영화이론가들과 필름메이커들의 텍스트가 되었고 영화사의 중요한 한 장이 그에게 헌정된다. 덴마크에서 태어나 독일로 건너가 좌파 지식인으로 연극·영화 연출가가 된 더글러스 서크는 파시즘의 등극과 함께 할리우드로 망명했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그에게 싸구려 스릴러나 멜로드라마 시나리오를 던져주며 돈은 많이 못 주지만 잘해보자고 당부했고, 그래서 만든 작품이 <히틀러의 미치광이>(1943년), <수수께끼 잠수함>(1950년) 등과 같은 저예산 장르영화들이었다. 브레히트의 할리우드에 관한 시 "아침마다 밥벌이하러 거짓을 사주는 시장으로 가지/희망에 부풀어 올라 나는 장사꾼들 틈에 끼지"는 서크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편의 시나리오를 팔고 할리우드를 따나야 했던 브레히트와는 달리 서크는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생존했고, 장르영화의 컨벤션을 전복하여 아이젠하워 시대의 소비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능력있는 감독으로 성장했다.
1956년에 만든 <바람에 쓰다> 역시 시나리오 상으로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다. 석유재벌인 해들리가의 장손인 방탕한 카일(로버트 스택)은 여비서 루시(로렌 바콜)와 충동적으로 결혼한다. 친구 미치(록 허드슨)와 아버지는 이들의 결혼을 축복하지만 동생 메리리는 루시를 증오한다. 결국 메리리는 루시와 미치가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오빠에게 거짓말을 하고,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카일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며 아내를 구타한다. 점차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 카일은 미치와 결투 끝에 권총사고로 죽게 되고, 영화는 미치와 루시가 새로운 삶을 찾아 집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재벌의 아들과 그의 가난한 친구 그리고 여비서의 삼각관계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주모티브인 이 영화를 의미있는 텍스트로 전환시킨 것은 전적으로 서크의 몫이었다. 사람들이 멜로드라마에서 기대하는 것이 감정의 분출이라는 점을 서크는 잘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비극적 주인공을 설정하고, 바로 그 주인공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 자아성취라는 강력한 미국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드러낸다.
50년대 미국사회의 비극은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을 채우지 못해 모순덩어리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는 것이 서크가 멜로드라마 장르를 우회해 건넨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그는 신경질적인 노란색을 부각시켰으며, 로버트 스택에게는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 같은 발성법을 훈련시켜 관객들에게 청각적으로 고통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나 서크는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관객을 만나기 위해 독일로 돌아가 10여년 남짓 기다려야 했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어두운 노래를 불렀던 그의 영화들은 이제 그 어두운 시대의 지혜로운 기념비로 영화사에 서 있다.
<필자: 김소영/영화평론가>
36. <추적자 The Searchers>(1956) / 감독: 존 포드
가장 미국적인 영화감독을 꼽으라면 아마도 존 포드가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그는 미국영화의 역사와 함께 성장했고 미국인의 이상과 정서를 가장 잘 그린 감독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주로 이민, 카톨릭, 공화주의, 개척사에 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관객들은 '존 포드'하면 서부극을 먼저 떠올린다. 사실 그가 만든 1백12편의 작품 가운데 서부극은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지만 일반적으로 존 포드의 작품은 서부극만이 기억된다.
그의 서부극은 무엇보다도 미국적 신화와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추적자>는 그 정점에 서 있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낭만적 서부극의 마지막 고별 작품이기도 하다. 남북전쟁이 끝난 몇년 뒤 형의 집을 찾아온 이던 에드워즈는 얼마 뒤 형의 가족이 인디언에게 몰살당하고 막내 조카딸 데비가 추장 스카에게 납치되자 5년에 걸친 추적 끝에 그를 찾아 돌아온다. 존 포드의 서부극이 흔히 그렇듯이 이 작품의 낭만적 성격은 미국인의 가슴에 언제나 전설처럼 남아있는 '고독한 서부의 사나이'인 이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과거 행적은 전혀 드러나지 않으며 그가 그토록 애타게 데비를 찾아다니는 동기를 제공한 형수 마타에 대한 애틋한 사랑, 그리고 데비를 귀환시킨 뒤 다시 어디론가 떠나는 모습의 이던은 서부극의 낭만적 인물유형의 전형인 셈이다. 이러한 고독한 인물유형은 서부의 개척과 더불어 역사 속에서 전설처럼 점차 사라져가며 존 포드는 그 특유의 롱 쇼트를 통해
이러한 전설을 서정적으로 담아낸다. 광야를 배경으로 끝없이 데비와 추장 스카를 찾아 헤매는 이던 일행의 롱 쇼트는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구도지만 사라져가는 서부의 낭만적 시대에 대한 아쉬움과 추억을 담아내는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낭만적 성격 이상의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인종, 결혼, 혈족, 종족 등과 같은 인류학적 이슈는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문제들을 안고 있다.
데비는 프롬의 신화분석학의 관점에서 보면 영웅과 악한의 싸움을 유도하는 중개인의 역할을 하는데, 포드에 있어 선과 악의 구분은 명확하고 또 단순하다. 백인문명은 선이고 인디언문명은 악이라는 것이다. 이던이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인 마틴을 싫어한다거나, 어렵게 찾아낸 데비가 이미 코만치 여자로 성장한 것을 보고 죽이려 하는 데서도 그러한 시각은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마사나 큰 조카딸 토리의 시체는 보여주지 않는 반면 마틴을 따라다니는 인디언 여자 루크의 시체는 전혀 주저함 없이 드러내 보이는 사소한 연출기법도 이러한 존 포드의 문명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작품이 만들어진 1956년의 미국은 흑백갈등이 심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작품이 의도적이었건 아니건 간에 당시의 흑백갈등의 문제를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또다른 인종갈등의 문제로 대체하거나 무마하는 역할을 하였으리라는 짐작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추적자>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그 서정성과 잘 짜여진 내러티브 구조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많은 영화감독들에게 숭배받는 '감독들의 컬트영화'로 남아있다.
<필자: 김지석/영화평론가·부산예술전문대 교수>
37. <파테르 판챨리 Pather Panchali>(1956) / 감독: 쇼티아지트 레이
인도의 영화작가 쇼티아지트 레이는 50년대에 일본의 구로자와 아키라와 더불어 아시아 영화를 세계정상으로 끌어올린 동양의 거장이다. 레이는 비부티 바네르지의 베스트셀러 소설 <파테르 판챨리>를 영화로 옮겨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레이는 프랑스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작가 장 르누아르가 1949년 첫 색채영화 <강>을 인도에서 촬영할 때 그와 만났다. 훗날 레이는 비토리오 데 시카와 장 르누아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좋은 집안의 후손으로 선조로부터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레이는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가끔 집에 드나들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레이의 첫번째 작품인 <파테르 판챨리>는 1956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인간 다큐멘트상을 수상했다. 뒤이어 2부 <아파르지토(정복되지 않은 사람)>도 베니스 국제영화제의 최우수 작품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올라섰다. 1952년부터 제작이 시작된 <파테르 판챨리>는 나중에 제작자금이 딸려 인도 정부의 지원금을 얻어 서부 벵골영화개발공사에서 제작을 끝냈다.
아푸라는 소년의 성장과정을 그린 이 '아푸 3부작'(3부는 <아푸의 세계>)의 1부인 <파테르 판챨리>는 벵골 지방 농촌에서 아푸 소년이 부모와 누나 두르가, 그리고 친척 아주머니 인디르와 함께 살며 겪는 이야기다. 무능력한 성직자인 아버지는 일찍이 집을 떠났고 보통여자인 어머니는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웠다. 계절풍 몬순이 몰아치는 벵골 지방의 찢어지게 가난한 삶에서 즐거움이라면 인디르 아주머니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어느날 남매는 동구 밖에 나갔다가 검은 연기를 뿜고 달려가는 기차를 보고 풍요로운 도시에 대한 동경과 설렘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아푸는 숲에서 인디르 아주머니의 죽음을 목격하고 이어 누나 두르가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죽는 비운을 겪는다. 두 사건으로 아푸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집을 나갔던 아버지는 참담한 실패 끝에 돌아와 가족을 갠지스강가의 도시 바라나시로 데려가기로 한다. 세 식구는 소달구지에 실려 마을을 빠져나간다.
레이는 시도 썼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화가이며 시인이었던 할아버지로부터 재능을 이어 받아 포스터나 책표지, 만화그리기 등 미술에도 소질을 보였다. <파테르 판챨리>의 음악은 인도가 자랑하는 시타르 연주자 라비 샹카르가 담당했다. 한국에도 연주차 다녀간 샹카르와는 여러 작품에서 함께 작업했다.
영화는 인도 농촌의 빈곤, 그 속에서 자라나는 꿈많은 소년 아푸가 도시로 나와 결국은 소설가가 되어 겪는 장중한 인간 다큐멘트 3부작. 1부는 <자전거도둑>처럼 직업배우를 쓰지 않았다. 느린 템포의 음영짙은 흑백촬영과 음악 그리고 레이의 시적 상상력은 빈곤이 배경인 사실적인 이 작품에서 세계인들에게 새로운 영화적 체험을 느끼게 했다. <파테르 판챨리>는 '길의 노래'라는 뜻의 인도말이다. 또한 이제까지 사티아지트 레이로 알려진 그의 이름의 정확한 벵골 발음은 쇼티아지트 레이이다.
<필자: 안병섭/영화평론가·단국대 교수>
38. <제7의 봉인 Det Sjunde Inseglet>(1957) / 감독: 잉마르 베리만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이 만들어진 것은 1957년의 일이었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은 쇠퇴기를 이미 지나고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한무리의 청년 비평가들이 누벨바그의 전조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영국에서는 프리시네마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무도 더이상 신을 말하지 않았고 유럽인은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대중문화의 중심은 고통의 세대에서 전후세대로 옮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물결처럼 보였다. 그때 베리만은 전혀 뜻밖에도 신의 존재와 부재에 대해서 질문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제7의 봉인>의 시대배경이 중세인 것 만큼이나 중세적인 질문으로 보였다.
<제7의 봉인>은 14세기 중엽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온 기사 안토니우스 블록의 귀향기이다. 그는 청년시절을 무의미한 전쟁에 흘려보내고 스웨덴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의 귀향길은 '삶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공포'에 짓눌려 있다. 영화의 서막을 여는 바닷가 장면에서 체스판을 뒤로 한 채 비스듬히 상체를 일으키고 있는 블록의 표정은 이미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그에게 사신이 찾아온다. 그는 체스게임을 제안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삶의 마지막 의미를 찾기 위한 시간을 유예받기 위해서이다. 마을은 페스트와 함께 마녀사냥의 집단적 광기가 휩쓸고 있다. 도처에 삶의 공포가 만연해있으나 신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에게 있어 유예받은 삶의 마지막 목표는 신을 감각하는 것이다. 그는 고해성사에서, 감각으로 신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신은 왜 불완전한 약속 뒤로 숨어버렸는지를 격하게 묻는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신은 침묵을 지킨다'는 것일 뿐이다. 마을에서 벌인 두번째 체스판에서도 그는 이긴다. 그러나 그가 절망 속에서 찾는 신은 끝내 현전하지 않는다. 집으로 향하기 전 한무리의 마을 사람들과 숲을 지나면서 그는 다시 사신과 마지막 체스게임을 벌이나 그것은 그가 유예된 시간을 반납할 결심을 굳힌 후의 일이었다. 신은 아예 부재하든가 아니면 부재와 다름없는 침묵에 빠져있는 것이다.
잉마르 베리만이 이 절망적인 귀향기에 요한계시록의 이야기를 따서 '제7의 봉인'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아다시피 그것은 종말을 상징하는 7개의 봉인 중 마지막 봉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중세를 빌어 현재의 인류가 '제7의 봉인' 앞에 서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극단의 비관주의를 표출했거나 감히 다룰 수 없는 주제를 건드린 셈일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인간은 그 봉인을 그대로 덮어둘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가지지 못한 것으로 그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제7의 봉인>은 교리문답에 관한 것도 신학논쟁에 관한 영화도 아니다. 결국 베리만이 강조점을 찍은 것은 사람들 사이의 단절이다. 그것이야말로 삶의 참을 수 없는 공포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고 신을 부정하며 신을 침묵하게 만드는 원인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블록이 체스말을 쓰러뜨리며 광대 요프 일가를 구하는 영화의 마지막은 매우 역설적이다. 이 장면은 베리만의 예술가로서의 자기존재와 인간에 대해 마지막 믿음의 끈을 잡으려는 몸부림에 가까운 절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요컨대 <제7의 봉인>은 중세적 주제가 아니라 현대의 삶의 공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 이정하/영화평론가>
39. <현기증 vertigo>(1958) /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활용하였던 히치콕 특유의 버릇 '훔쳐보기'는 <현기증>에 이르러 마침내 관음주의자의 한계를 벗어나 창조자의 도구 구실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연구의 대상이 되는 <현기증>은 자신 때문에 동료경관이 사망한 과거의 사건 때문에 고소공포증이라는 도덕적 마조히즘에 빠진 전직 형사 스카티의 '자기치료' 과정과 함께 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혀나가는 과정을 다룬 전형적 이중플롯의 작품으로 히치콕의 관음주의와 환상주의가 만들어낸 지극히 남성적 시각의 작품이기도 하다.
친구의 부탁으로 그의 아내 마들린을 쫓는 스카티는 언제나 마들린을 훔쳐보며 동시에 관객도 마들린을 훔쳐본다(이러한 훔쳐보기의 배후조정자는 물른 히치콕이다). 그것은 스카티에게 있어서는 환상이다. 스카티는 마들린이 죽고난 뒤 그를 꼭 닮은 주디를 발견하고는 그를 마들린으로 만들려 한다. 이제 스카티는 환상을 현실로 바꾸는 창조주의 위치에 서려는 것이다. 물론 그 모든 시도는 실제로 주디가 스카티가 쫓던 마들린의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뒤 주디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스카티는 고소공포증에서 벗어나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히치콕이 이 모든 과정에서 보여주는 남성적 시각은 너무도 뚜렷하다. 스카티의 시점은 분명히 제시하는 반면, 주디와 마들린, 그리고 마들린의 선조인 카를로타의 시점은 애매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것은 히치콕이 노린 함정이다. 이를테면 주디가 연기하는 마들린은 그의 역할이 끝날 때까지 딱 한번의 분명한 자기시점만이 보여질 뿐이다. 그러나 그 시점도 사실은 마들린이 아닌 주디의 시점이었다는 사실은 영화의 결말부분에 간 뒤 다시 그 장면으로 피드백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마들린의 남편 엘스터와 스카티가 주디를 마들린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히치콕이 킴 노박을 주디로 만들고 또 마들린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히치콕의 이런 반페미니스트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 곧 죽음의 충동에 대한 이야기를 은밀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깊이있는 이해와 통찰을 요구한다. 카를로타와 마들린으로 대변되는 죽음에의 욕망은 그에게 이끌리는 스카티의 심리상태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욕망을 이처럼 은유적이고 우회적으로 묘사한 영화는 찾기 힘든다(물론 여성이 환상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이미지로 묘사된다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의 또다른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 관음주의와 환상주의 그리고 죽음에의 충동을 짜맞추어 나가는 할리우드의 프로이드 히치콕의 세밀한 연출기법은 범접하기 힘든 개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영화적 형식의 탁월함은 두고두고 논의의 대상이 된다. 이를테면 4번에 걸쳐 사용된 줌과 트랙의 결합장면은 주인공 스카티의 고소공포증을 묘사하는 데 매우 효율적이었고, 스카티의 시점에 관객을 동일화하기 위해 사용한 주관적 트래킹 숏은 이제는 영화문법의 고전처럼 이야기된다.
히치콕에게 영화는 환상의 실현수단이고 동시에 관객과의 게임도구다. 그래서 그는 늘 지적 우월감을 만끽한다. 그중에서 <현기증>에 감추어진 비밀들은 관객들에게 고난도의 지적 게임을 요구한다. 어차피 게임의 승자는 늘 히치콕이겠지만 관객은 패배를 기분좋게 받아들인다. <현기증>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필자: 김지석/영화평론가·부산예술학교 교수>
40.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North by Northwest>(1959) /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국에서의 대표작이 <39계단>이라면 미국에서의 대표작은 MGM사 제작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일 것이다. 많은 평론가들은 <현기증>을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지만 <북북서…>가 극적 구성이나 형식, 서스펜스에서 더 세련되고 잘 짜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미 CIA가 실존하지 않는 인물을 내세워 사건을 해결하는 예가 있다는 것이 뉴욕의 한 신문기자를 통해 알려지자, 여기서 영감을 얻은 히치콕은 어니스트 레흐만에게 시나리오를 의뢰했다. 상영시간이 1백36분이 되자 MGM은 뒷부분을 줄일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양보하지 않았다.
뉴욕의 광고업자 로저 손힐은 어느날 아침 비서에게 일정을 알려주고 택시에서 내리다 두 명의 괴한에게 납치된다. 그는 글렌코브의 어느 저택에서 술을 강제로 마신 뒤 버려져 음주운전으로 체포된다. 다음날 홀어머니와 함께 현장으로 가보나 그곳은 전날밤의 내부가 아니다. 그 저택주인이 유엔에 나가는 타운젠드라는 이야기를 듣고 유엔 본부 로비에서 그에게 면회를 신청하나 엉뚱한 사람이 나왔다가 현장에서 등에 칼을 맞고 쓰러진다. 삽시간에 살인범 누명을 쓰게 된 손힐은 괴한들이 그를 조지 캐플런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고 놀란다. 여기서부터 사건은 복잡하게 미궁으로 빠져들어간다. 결국 손힐은 조지 캐플런이라는 인물의 정체를 찾아나서 누명을 벗어야겠다고 생각해 추적에 나선다. 그는 시카고행 열차에서 이브 켄들이라는 금발의 미녀 산업디자이너를 만나게 되어 사랑을 속삭인다. 켄들의 제보로 손힐은 41번 국도변에서 캐플런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으나 헬리콥터의 습격을 받는다. 켄들에게 속은 것이다. 손힐은 미술품 경매장에서 납치범의 두목격인 밴덤과 함께 나타나는 켄들을 본다. 그들이 조각품을 사가지고 사라지자 손힐은 소란을 피워 경찰에게 끌려가 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사우스다코타주 라피트 시티의 커다란 대통령 얼굴석상이 있는 러시모어 산 아래 카페에서 다시 밴덤과 나타난 켄들을 만나게 된다. 켄들은 권총 두 발로 손힐을 쓰러뜨리고 사라진다. 한 대학교수가 손힐을 구출해 차에 싣고 숲으로 오나, 그것은 공탄이었다. 대학교수는 자신은 CIA 고문이고, 켄들은 밴덤의 정부라고 말한다. 밴덤은 경매장에서 구입한 조각품 속에 국가기밀의 마이크로필름을 넣어 그날밤 함께 비행기로 탈출한다.
그러나 켄들도 CIA의 요원이며 조지 캐플런은 CIA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었다. 켄들은 손힐의 기지로 조각품을 빼앗아 도망쳐 대통령 얼굴 석상 밑으로 내려오다 CIA 요원들의 구조로 살아난다. 뉴욕으로 돌아오는 열차에서 둘은 결합한다.
조지 캐플런이 누구인가 하는 의문 속에서 복잡한 사건, 반전은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냉전시대 첩보전의 비정한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엔 빌딩 안에서의 촬영은 하마슐드 사무총장이 금지시켜 몰래카메라로 복도를 찍고 로비는 재현했다. 커다란 대통령 얼굴 조각상도 재현한 것이고 밴덤의 별장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물이다. 켄들 역의 에바 마리 세인트가 손힐 역의 미남 케리 그랜트를 유혹하는 침대차의 시퀀스는 전 미국 영화중 가장 감미로운 러브신의 하나이다.
히치콕은 일찍이 말했다. "내가 신데렐라를 만든다면 마차 속에 시체를 넣겠다.… 나는 스토리보다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 히치콕과 인터뷰한 프랑수아 트뤼포는 그의 죽음에 즈음하여 그의 작품세계를 이렇게 요약했다. "히치콕에게 형식은 내용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다. 형식 자체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필자: 안병섭/영화평론가·단국대 교수>
41. <재와 다이아몬드 Popiol i Diamont>(1958) / 감독: 안제이 바이다
폴란드 영화는 1956년부터 1959년 사이에 르네상스기를 맞았다. 현대 폴란드 영화는 이 때부터 시작됐다. 소련에서 스탈린이 죽은 직후 동구권에 불어닥친 해빙 분위기가 폴란드 영화인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자극했던 것이다. 당시 폴란드 영화들이 내용과 형식 면에서 하도 출중해서 서구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폴란드 유파라는 말이 떠돌았다. 그리고 안제이 바이다는 폴란드 유파 중에서 가장 주목되던 감독이었다. 바이다가 1958년에 발표한 <재와 다이아몬드>는 곧 당시의 폴란드 영화 수준을 대변하는 작품이 됐다.
<재와 다이아몬드>는 1948년에 출간된 예르지 안드레예프스키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평화가 시작되던 해방 첫 날부터 복잡다단한 정치적 사연이 있던 폴란드 사회를 묘사한 이 소설을 바이다는 하룻밤 하루 낮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로 축약했다. 배경도 자잘한 에피소드를 빼면 주로 호텔이라는 한 공간으로 좁혀 놓았다.
그러나 단일한 시공간으로 좁힌 내용의 상징적 의미는 폭이 넓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해방을 맞이한 날, 전쟁은 끝났지만 폴란드에는 좌우 이데올로기 투쟁이라는 또 하나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다. 마체크와 안제이는 우파 민족주의 진영의 레지스탕스 대원이다. 두 사람은 공산주의자 슈츠카를 암살하는 임무를 명령받는다. 그러나 테러는 실패하고, 두 사람은 호텔로 피신한다. 이데올로기에 관심없는 마체크는 호텔 여급 크리스티나에게 수작걸기 바쁘고 다시 지시를 받으러 간 안제이는 상부의 테러 명령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나 역사는 이미 개인의 손을 떠나 있다. 크리스티나와 하룻밤을 보낸 마체크는 투쟁보다는 연인을 택하고 싶어하나 안제이의 설득에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심한다. 마체크는 새벽에 호텔을 나서는 슈츠카를 암살하고 도망치지만, 쓰레기장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재와 다이아몬드>는 정치영화지만 대단히 낭만적인 분위기로 포장돼 있다. 호텔 방과 폐허의 교회에서 두 주인공 남녀가 나누는 사랑 장면이라든지 쇼팽음악을 불
협화음으로 사용한 결말 장면은 특히 애상적이다. 그러나 이는 감상으로 흐르지 않고 전체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바이다는 슈츠카와 마체크를 모두 공감가게 묘사해 놓고 있다. 슈츠카는 폴란드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있는 사려깊은 지도자다. 그러나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르지만 충동적으로 싸우고 있는 폴란드의 이유없는 반항 세대 마체크 역시 관객에게 공감을 준다. 바이다는 폴란드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슈츠카와 역사의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린 마체크를 다같은 희생자로 묘사하는 독특한 결론을 내린다. 다분히 회의적인 관점이라고 해야겠지만 거기에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한 폴란드의 역사가 녹아 있는 것이다.
선굵은 조명과 딥 포커스로 짜임새를 갖춘 바이다의 화면 설계는 오슨 웰스 감독의 영향을 암시하고 있다.
제목 <재와 다이아몬드>는 폴란드 낭만주의 시인인 노르비트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횃불과 같이 네 몸에서 불꽃이 퍼질 때, 넌 아는가. 자기 몸을 태워가며 자유의 몸이 되어 감을…. 영원한 승리의 여명에 잿 속 깊은 곳에 찬란한 다이아몬드만이 남으리."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재가 될 것인지 다이아몬드가 될 것인지 알지 못한다. 바이다 역시 한 때의 역사적 순간에 대해 어떤 해답을 쥐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남는 것은 그저 역사와 인생의 부조리함뿐이다.
<필자: 김영진/영화평론가·<씨네 21> 기자>
42. <오발탄>(1961) / 감독: 유현목
<오발탄>은 1960년에 만들어져 1961년에 상영되었다. 5·16 쿠데타 세력에 의해 상영이 중단되었다가 1963년에 다시 상영되었고 이후 20여년이 지나 이 영화는 다시 떠오르게 되었는데, 이러한 복권 아닌 복권은 한국영화의 굴곡과 비슷한 그래프를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80년대 세대'에 의해 <오발탄>은 다시 대중들 앞에 나타났고, 이제는 비디오 가게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틈만 나면 "가자"고 외치는 늙은 어머니, 상이군인인 동생 영호, 만삭인 아내와 어른들을 믿지 않는 딸, 양공주가 된 여동생, 신문팔이를 하는 막내동생 그리고 주인공 철호는 언덕바지에 있는 마치 영화 세트 같은 판잣집에서 살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꿰뚫고 있는 것은 바로 '전쟁'이다. 환경과 심성의 뒤틀림은 전쟁으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없다. 60년대 한국영화의 놀라운 포착이다.
비록 이범선의 원작에 기대고 있긴 하지만 유현목이 자기 작품에서 포착한 것은 문학적 서술이 아니라 영화적 표현, 에이젠슈테인에 기대서 말하자면 유기성과 파토스(정념)였던 셈이다. 유현목은 전쟁이 휩쓸고 간 서울의 바지런함 속의 공허, 공허 속의 실낱같은 희망, 희망의 좌절 등을 차례차례 그려가고 있다. 이런 순차적 배열은 계획적인 주제 전달로서 유기성을 획득하고 그 결과 치열한 정서가 폭발한다.
멀쩡한 신사복 사내가 치통이 있으면서도 병원에 가지 않는 이유를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동생이 양공주가 된 사연과 동생 영호의 은행 강도짓이라든가 딸의 불신 등을 이해하는 것 또한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주요 배경인 집안을 비춘 화면 구도와 빛의 명암 그리고 배우들의 동선과 그것을 잡은 카메라 렌즈의 깊이 등을 눈치채기 위해서는 공을 좀 들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불협화음이 일어난다. 반항아 영호(최무룡) 등이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배경과 몸짓, 집안 실내 배경의 서구적 구도 등은 미학적으로는 완결성을 갖추고 있지만 낯설게 보인다. 이 낯설음은 서구 영화를 기준으로 하면 낯익은 것이고, 우리 상황으로 보면 낯선 것이다. 유현목은 안의 고민을 바깥 것을 동원하여 드러내려 하였고 그럼으로써 '근대 영화'에 다가섰던 것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유현목의 발걸음은 갈팡질팡한다. 죽은 아내가 있는 병원? 동생이 갇힌 경찰서? 어머니가 있는 집? 꼭 그만큼 그는 방황한다. 감정의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영화? 네오리얼리즘? 몽타주? 할리우드 또는 유럽의 대중 영화? 결국 유현목은 결정하지 못한다. 단지 택시기사가 "나참,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군…" 하고 불평할 뿐이다. 이렇게 유현목은 단역의 입을 빌려서 영화를 마감하였다. 꼭 그만큼 유현목은 전쟁과 서울을 놀랍도록 날카롭게 묘사하지만 그 고민 방식은 어딘가에 기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오발탄>의 좌표는 한국 현실이라는 수직선과 '빌려온 근대영화적 고민'이라는 수평선 위에서 찍힌다. 수직으로는 한없이 올라간 지점이며 수평으로도 멀리 나아간 지점. 물론 수평의 마이너스 영역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추앙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 될 때, <오발탄>은 다시 부활할 것이고 당분간 혹은 오랫동안 한국 최고의 영화라는 영예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이효인/영화평론가>
43. <히로시마 내사랑 Hiroshima Mon Amour>(1959) / 감독: 알랭 레네
사운드가 사라진 뒤의 낯선 침묵, 이미지의 이상스런 유혹, 그리고 사운드와 이미지의 새로운 만남. 영화는 이렇게 늘 실험중이었다. 적어도 50년대 말에서 6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는 그랬다. 20년대의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실험 이후 두번째로 맞는 르네상스 시기의 영화들은 새로움이라는 뜻의 '누벨'(프랑스), '노이에'(독일), '노보'(브라질)라는 이름으로 영화 매체를 재구성한다. 영화의 네오 모더니즘 시대가 된 것이다.
<히로시마 내사랑>의 감독인 알랭 레네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장 뤼크 고다르가 <마지막 숨결>(네멋대로 해라)를 내놓은 바로 그 해에 그들의 첫번째 공동 작업을 완성한다. 그들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운드와 이미지의 매체인 영화로 2차대전이 남긴 기억의 흔적을 텍스트화한다. 무대는 사람들 개개인의 육체 속에 원폭의 악몽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히로시마라는 도시, 그 히로시마에서 에로티시즘과 역사적 기억이 만난다. 영화가 시작되면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벗은 몸 위, 애무의 손길 위로 원폭 피해자의 상흔을 연상시키는 거친 모래입자 같은 것이 오버랩된다.
전쟁이 끝난 지 10여년 뒤, 히로시마의 강가 카페들은 네온으로 눈부시고, 원폭의 공포는 전쟁기념관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듯이 보이며, 프랑스 여배우(에마뉘엘 리바)는 일본인 건축가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히로시마는 완강하게 과거의 박제화에 반대한다.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는 바로 그 박제화에 대항하는 형식이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제작된다는 영화 속에서 히로시마의 거리는 피해자들의 시위로 뒤덮이고, 사람들은 울부짖고 원폭으로 으깨진 손과 몸이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여주인공은 히로시마에서 자신의 전장이던 느베르를 기억한다.
독일군 점령 당시 여주인공은 프랑스의 느베르에서 독일군 병사와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은 마을사람들의 분노 속에서 죽어갔다. 그 죽음과도 같은 고통 때문에 그는 자신이 히로시마의 모든 고통을 보았고 이해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일본인은 그의 기억과 보기의 방식을 거부한다. 그래서 여자는 "나는 히로시마에서 모든 것을 보았어요"라고 말하고 남자는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라고 되받는다. 사실 히로시마와 느베르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플래시백과 오버랩을 반복하며 그 두 공간을 잇는다. 플래시백을 통해 느베르는 히로시마의 공간 속에서 예기치 못하는 방식으로 솟아오르고 오버랩은 일본인 연인과 독일 연인을 환유의 관계로 만든다. 일본인 남자는 그러나 영화 이미지의 이러한 비역사적 마술에 사운드로 저항한다. 그는 오히려 "당신에겐 히로시마가 전쟁의 끝을 알리는 기쁨이었지만, 우리에겐 고통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이미지와 사운드는 프랑스 여성과 일본인 남성으로 주체화되어 서로 불화하며, 역사 역시 그들을 통과하며 그 의미에 대한 싸움을 벌인다. 마지막 장면, 여자가 남자에게 바로 당신이 히로시마였다고 말함으로써 개인적 층위의 화해는 이루어지지만 이 영화의 정치적 입장은 모호하다. 영화는 실험이다 라고 뒤라스와 레네가 말했을 때 그것은 일차적으로 이미지와 사운드의 복합성에 관한 진술이었고 그 의미로만 한정시킨다면 <히로시마 내사랑>은 영화라고 이름붙여진 작은 실험실 안에서는 성공적이다.
<필자: 김소영/영화평론가·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44. <정사 L'Avventura>(1961) / 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도둑맞은 자전거 문제도 없어진 이제 중요한 것은 자전거를 도둑맞은 적이 있는 사람의 마음과 머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 그는 어떻게 적응하고 사는지, 그의 과거경험, 전쟁과 전후의 시기, 전쟁을 치른 이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그에게 무엇으로 남아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는 네오레알리즘 시기에 각본쓰기, 단편영화 만들기로 습작기간을 거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그 전통을 빠져나오면서 던진 말이다. 안토니오니는 그 사람의 내면을 <어느 사랑의 이야기>(50)에서는 치정살인을 둘러싼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통해, <외침>(52)에서는 여인으로부터 버림받은 남자의 황폐한 여정을 통해 탐구하고자 했다. 그리고 <정사>에서부터 그는 산업사회로 급격히 진입하고 있는 이탈리아 현대인의 내면을 그려낸다. 안토니오니에 의하면 그 현대인은 기술의 진보에 한걸음 처지는 도덕적 수단으로 세계를 산다. 그래서 그는 그를 둘러싼 환경, 인간들, 사물들과 진솔한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 그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도덕적 갈등에 대응하기 위해 그는 성이나 사랑을 찾는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모험을 생성해낼 정서로 새로운 환경에 대응해야 한다.
여기서 '모험'은 바로 <정사>의 원제목이며, 영화는 그 모험이 필요한 현대인을 다룬다. 이야기는 너무 간단하다. 요트여행 중 안나라는 여자가 실종되고 그녀의 친구 클라우디아와 애인 산드로가 그녀를 찾아나선다. 소문을 따라 안나를 찾아다니던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그런 가운데 매춘부와 하룻밤을 지낸 산드로에게 클라우디아는 절망하나 연민으로 그를 감싸안는다. 연민이 새로운 모험의 첫걸음인 듯 세 사람 외에 영화는 다양한 인물들을 그 이야기와 필연적인 관계없는 배경으로, 어쩌면 잘못 연출된 섹스풍자극의 인물들처럼 간헐적으로 등장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두시간 이십분 가량 아주 느슨하게 방황하는 영화의 흐름은 안나의 실종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다룬다. 영화는 실종에 대한 답으로 향하지도 않으며 그 실종이 친구와 애인에게 던진 정신적 여파에도 별 관심이 없다.
꽉 짜인 이야기 구조를 지닌 영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영화가 칸에서 상영되었을 때 호된 야유를 보낸 관객들처럼 이 영화를 참아낼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구차한 삶에는 적용할 만한 부분이 눈곱만큼도 없는, 정말 하릴없는 부유층의 권태와 나른함과 거짓 욕망들을 바라보는 것도 참기 힘든 것이리라.
그러나 보통 영화에서 생략해 내버리는 우리 일상의 진실의 순간들, 인과의 고리가 없이도 생겨나는 무수한 순간들, 너무나 일상적이라 존재하지 않는 듯한 순간들 속의 현대인들을 이 영화처럼 잘 묘사해낸 작품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말없음, 미세한 움직임, 공허한 표정, 방향잃은 자태들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화면구성과 길고 짧음의 리듬감을 가진 촬영과 편집속에서 스스로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플롯이 이야기를 한다기 보다 관객 스스로가 빈 듯한 화면, 무표정한 인물들, 배경이 되는 지형과 인물간의 관계를 읽으며 그 너머의 이야기를 쌓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와 시각적 특성이 당대 이탈리아를 예술영화의 보고로 함께 세워낸 펠리니의 투명한 자기반영적 기법과도 다른, 바로크적 미학으로 성과 정치를 논한 비스콘티와도 다른, 영화를 하나의 예술작품, 그 자체로서 충분히 미학적 가치를 갖는, 오랜 시간을 견디는 미적 대상으로 만드는 데 안토니오니가 기여한 바일 것이다.
<필자: 주진숙/영화평론가·중앙대 교수>
45. <네멋대로 해라 A Bout de Souffle>(1959) / 감독: 장 뤽 고다르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자. 장 뤼크 고다르의 선언은 '새로운 영화'의 명제가 되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은 고전적 양식을 완성하였고(앨프리드 히치콕, 존 포드, 그리고 장르 영화들), 이탈리안 네오 레알리슴은 부패하기 시작하였고(펠리니, 안토니오니, 비스콘티), 프랑스영화는 문학의 진부한 재각색(르네 클레망, 앙리 조르주 클루조에서 알랭 레네까지)에 사로잡혔다. 영화는 진퇴양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이제 영화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결별(!)이 필요했다.
장 뤼크 고다르(1930∼)는 바로 이때 수호천사처럼 등장하였다. 프랑스 영화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영화평을 쓰던 고다르는 하워드 혹스와 뮤지컬, 험프리 보가트, 그리고 할리우드 B급 영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와 앙드레 바쟁의 미장센을 변증법적으로 통일시킬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비평가 시절 그가 쓴 '몽타주, 나의 멋진 근심'은 영화감독으로서의 고다르에 대한 예고편이다.
고다르는 8편의 단편영화 수업을 거쳐 그의 <카이에 뒤 시네마> 동료이자 영화감독인 프랑수아 트뤼포의 시나리오 <네 멋대로 해라>로 데뷔했다. 그는 스스로 이 영화를 '오토 플레밍거의 <슬픔이여 안녕>에 대한 속편'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으며, 또 한편으로 험프리 보가트에게 바치는 연애편지(!)라고 불렀다. 고다르는 <네 멋대로 해라>에서 자신의 영화광적인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영화에 바치는 존경심과 함께 정반대로 모든 영화에 대한 부정을 시도하고 있다. 영화는 마치 B급 갱스터 영화의 멜로드라마처럼 보인다. 주인공 미셸(장 폴 벨몽도)은 별다른 이유없이 차를 훔치고, 여자들을 울리고, 경찰을 총으로 쏘고, 미국에서 온 애인 패트리샤(진 세버그)를 설득해 도망치자고 유혹한다. 그러나 패트리샤는 경찰에 고발하고, 미셸은 거리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다.
고다르는 미셸과 함께 59년 파리를 달린다. 알제리가 프랑스 대혁명정신에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실존주의가 구조주의에 자리를 양보하고, 드골정권이 보수반동주의로 변질하고 있는 파리에서 '새로운 세대'의 공기와 시대정신이 무엇인가를 영화는 영화 스스로 질문한다. 고다르는 영화사상 최초로 '영화에 관한 영화'를 창조해낸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는 스스로의 자의식을 갖고 주인공과 이야기와 작가 사이에서 영화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은 갑자기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걸고, 화면은 점프 컷과 롱 테이크의 수사학으로 영화의 불문율을 차례로 돌파한다. 영화는 지켜야 할 문법을 갖고 있지 않은 담론이며, 고다르는 영화란 '네 멋대로' 만드는 것이라고 선동한다.
고다르는 단호하게 말한다. 영화에서 이론이란 불가능하다고. 그래서 영화에 관한 이론이란 영화(들)뿐이라고 대답한다. 만일 그러하다면 고다르는 여전히 영화로 영화를 말하는 영화평론가인 셈이다. 그는 <네 멋대로 해라>에서 미래의 영화를 발명한 것이며, 고다르를 통해서 영화는 무한히 다양한 상상력의 이미지를 타고 도주하는 복화술사가 되었다. 고다르 이전에 고다르 없고, 고다르 이후에 고다르 없다. 평생 고다르가 싫어했던 미셸 푸코의 찬사다.
<필자: 정성일/영화평론가>
46. <쥘과 짐 Jules et Jim>(1961) / 감독: 프랑소와 트뤼포
1953년, 73살의 앙리 피에르 로셰가 고령에도 불구하고 첫 소설 <쥘과 짐>을 발표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당시 21살, 랑글루아가 만든 시네마테크의 악동이자 앙드레 바쟁의 <카이에 뒤 시네마>로 평단에 입문한 그는 이 소설을 언젠가 반드시 영화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61년, 트뤼포는 기어코 그 꿈을 이루게 된다.
<쥘과 짐>은 두 남자와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상투적인 멜로드라마에서 닳고 닳도록 써먹은 소재다. 그러나 트뤼포는 진부한 삼각관계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는 여성의 자유와 그에 대한 남성의 반응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중심인물은 <쥘과 짐>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쥘이나 짐이 아니라 카트린이다. 쥘 그리고 짐과 친구이자 부부, 연인의 관계를 유지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카트린은 이상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누구에게 이해를 바라기보다는 행동으로 여성의 '해방'을 쟁취하려 했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문화적 순수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불안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유럽의 시대, 사회적 배경은 그가 설 공간을 남겨두지 않는다. 사실 카트린이 이루려고 했던 자유는 쥘과 짐이 스스로에게 던진 과제이기도 했다. 그 과제를 카트린만이 목숨을 던져가며 쟁취하는 것이다. <쥘과 짐>에서 가장 강력한 나름대로의 자기해
방이기도 하다. 그래서 카트린은 쥘과 짐에게, 아니 트뤼포에게 아나키스트이며 동시에 대지의 어머니다. 이처럼 60년대 그의 영화 속의 여성들은 매우 지적이며 또 남성들에 비해서도 훨씬 당당하고 진취적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성을 이해하는 척 하려 하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들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려 한다. 트뤼포의 관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삼각관계는 필연적으로 소외를 야기하는데 트뤼포는 이를 언어의 문제로 파악한다. 쥘의 독일식 액센트는 그를 타자와 분리시키고 쥘과 짐은 다른 트뤼포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언어가 가장 중요한 작가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카트린의 문제는 언어로는 풀리지 않는다.
확실히 트뤼포는 같은 랑글루아와 바쟁의 아이면서도 고다르처럼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성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쥘과 짐, 카트린 세 사람 사이의 관계는 가장 기초적인 정치집단, 즉 가정에 대한 관심의 일면이기도 하다. 정치란 가정에서 시작되며 따라서 사랑 이야기는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결혼이 불완전한 제도임을 인정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에 대한 대안도 부재한다는 사실을 굳이 부인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카트린의 죽음은 '성의 정치'에 관한 항거다.
르누아르로부터 일상적 삶의 시각적 표현에 대한 열정을, 히치콕으로부터 영상의 힘과 감각을 배운 호모-시네마티쿠스 트뤼포는 이러한 그의 주제의식을 때로는 서정적 스타일로 또 때로는 낯선 사진적 효과와 편집효과(스톱 프레임, 스위시 팬, 점프 컷 등)로 엮어나간다. 말하자면 대중성을 충분히 갖추면서도 누벨바그의 실험적 정신을 잃지 않는 조화로움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쥘과 짐>은 누벨바그 영화를 따분하게 생각하는 대중들에게조차 끊임없이 사랑받고 있다.
<필자: 김지석/영화평론가·부산예술학교 교수>
47. <8과 2분의 1 Otto E Mezzo>(1963) /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
이탈리아 영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네오레알리슴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8과 1/2>은 <무방비도시> 등 네오레알리슴의 걸작 대본을 도맡아 쓴 페데리코 펠리니와 그 네오레알리슴의 결별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는 제목 그대로 펠리니의 "8편 반째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크리스티앙 메츠)다. <달콤한 인생>에 로마의 퇴폐적이고 나태한 부자들의 생활을 보도하는 기자로 나온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역시 주인공이다. 그는 신경쇠약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장에 온 유명한 영화감독 '구이도'로 출연했다. 구이도는 우주로 도피하려는 제3차대전 생존자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그는 항상 동업자들, 제작자와 시나리오 작가와 배우들에게 포위되어 있다. 그들은 그에게 영화에 대한 의견과 생각을 쉴 새 없이 요구하고 질문을 해 대지만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는, 마침내 현실인식에 도달했을 때, 다시 말해서 자신이 인류를 위한 메시지를 담은 거창한 영화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며 그 대신 자신의 혼란, 불확실성, 타협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깨닫고서야 예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8과 1/2>은 흔히 모더니스트의 전통에 놓인 '의식의 흐름'의, 혹은 내적 독백의 영화로 분류되는데 여기서 펠리니는 주·객관적 시각을 교차시켜가며 관점의 복잡한 변화를 아주 기술적으로 구사한다. 구이도의 백일몽과 플래시백과 악몽을 돋보이게 해주는 건 '객관적' 장면들이다. 예를 들면 앞뒤로 꽉 막힌 상태를 암시하는 영화 시작 부분의 교통마비 장면은 구이도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도 그가 느끼는 폐소공포증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그가 자동차에서 탈출하여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 자유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발이 밧줄에 매달려 땅으로 당겨지는 장면을 통해 표현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것 또한 구이도의 악몽임이 드러난다.
현실세계에 대한 구이도의 부적응은 성적 무능과 여성관계에서 드러난다. 그는 두 가지 여성상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어린 시절 기억 속 한 자락을 차지하는 라 사라기나는 성욕과 순진함, 악마와 강력하고 두려운 생명력의 상징이다. 그의 뮤즈, 클라우디아는 환상 속에서 항상 그에게 무엇인가를 베푸는 이상적 여성이며 영원한 어머니 마돈나와 같다. 현실의 그는 또 자신의 정부를 창녀처럼 분장시키려는 욕구를 느낄 정도로 억압되어 있다.
<8과 1/2>의 1백35분(시중에는 2개의 비디오테이프로 나와 있다)동안 관객들이 보는 것은 구이도가 만들려는, 혹은 만들어놓은 영화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영화라기보다는 영화가 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한 여행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구이도는 "정말로 예술가라 불릴 가치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의 창조적 생활에서 한가지 것, 침묵에 대한 헌신을 맹세해야 한다"는 말에서 힘을 얻어 원무를 연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예술적 아이디어 고갈에 대한 작가의 두려움을 이 영화를 통해 그려보인 펠리니 자신의 미래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후 그는 스펙터클과 기억의 환상에 더욱 집착하였고 단순한 배경과 향수로 격하된 역사의 묘사, 자전적 표현주의 양식에 너무 깊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가의 삶과 상상력의 산물에 예술가의 영감이 서려 있다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가져
야 한다고 주장하는 낭만주의로 회귀하였다.
<필자: 변재란/영화평론가>
48.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 Teni Zabytykh Predkov>(1964) / 감독: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1964년, 서방세계 영화는 '실험주의 시대'라 불릴 만한 모더니즘과 컬트주의에 휩싸였다. 누벨 '까이에' 바그 악동들(고다르, 트뤼포, 리베트, 샤바를)은 막다른 영화로 치달렸으며, 돌아온 거장들(부뉴엘, 브레송, 펠리니, 베리만)은 형이상학적 주제에 매달렸다. 뉴욕에는 앤디 워홀 공장이 생겼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60년대 이미지의 계몽주의 프로젝트 속에서 가장 야심적이고 놀라운 성공을 거둔 이는 두 사람의 러시아인이었다. 한 사람은 <안드레이 루블례프>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였고, 또 한 사람은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의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였다.
파라자노프(1924∼1990)는 평생 '저주받은 작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그루지야에서 태어나 아르메니아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언제나 변방의 영화작가였다. 20년간 감옥과 감시 속에서 보낸 파라자노프는 옥중에서 8백점의 공예품을 만들고, 2백31편의 시나리오를 쓰고, 23편의 구체적 영화계획을 세우고, 7편의 영화만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력에서뿐만 아니라 영화수사학적으로도 변방의 영화, 바깥의 영화, 예외의 영화를 만들었다.
서방세계에서는 <불타는 말>로도 알려진 그의 세번째 영화 <잊혀진…>은 그 이후의 모든 영화감독들(파졸리니, 고다르, 펠리니, 헤어초그, 레네, 데릭 자만, 배용균)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언제나 그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모스필름에서 영화를 만들던 파라자노프는 평생 동료였던 촬영감독 유리 일리옌코와 함께 모스크바를 떠나 키에프의 도브젠코 스튜디오로 옮겼다. 거기서 우크라이나 지방의 소설가 코치유빈스키 원작과 카르파티나지방의 민담을 각색해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키는 비극을 만들어냈다. 이 영화는 12개의 에피소드로 나누어 촬영했다. 서로 반목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이반과 마르치카는 사랑에 빠진다. 이반은 마을을 떠나고, 마르치카는 기다린다. 기다리던 마르치카는 죽고, 이반이 돌아온다. 새아내 파라냐와 결혼하지만, 아내는 부정을 저지른다. 이반은 고통 속에서 죽는다. 파라자노프는 우리시대에 태어난 민담 소리꾼처럼 보인다. 그는 빅토리아 왕조 이후의 대중소설 이야기 구조나 조이스 또는 프루스트 이후 모더니즘의 자동기술의 '의식의 흐름' 모두를 부정한다. 또한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나 앙드레 바쟁이 정식화한 미장센도 거절한다. 파라자노프는 일시에 모든 영화의 수사학 바깥으로 나와 문어체 영화의 상상력으로부터 구어체 영화의 직관력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에 관한 모든 사고를 교란시킨다!
파라자노프는 마치 멜리에스 이후의 모든 영화가 없었던 것처럼 자유자재로 영화를 만든다. 영화는 시제를 잃고, 구조도 없으며, 형식도 없이 융단처럼 직조된 콜라주의 민담이 된다. 그는 중국 국경에서 흑해연안에 이르는 민담을 끌어모아 그 이야기의 방식에 따라 스스로 말하게 만든다. 그 속에서 여러개의 목소리가 울려나오는 민속박물관의 창연함이 있으며, 잊혀진 민중들의 세상이 살아나 벌이는 축제가 된다. 파라자노프의 영화는 이야기하는 자의 언어로 노래하는 영화이며, 공식문화에 저항하는 방언과 상소리와 속된 것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민중들의 다채로운 노래를 예술가의 영혼으로 듣는다. 이것이야말로 아래로부터 생각하는 영화이다.
그러나 이 단 한편의 영화로 파라자노프는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60년대 내내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것은 레닌의 교훈 "인민들 스스로의 예술로 말하게 하라"는 교훈과도 다른 것이다. 당 지도부는 틀린 것이며, 흐루시초프는 사회주의 영화를 죽인 것이다. 시간은 언제나 예술가의 편이 아니다. 파라자노프의 유언이다.
<필자: 정성일/영화평론가>
49. <알제리 전투 La Battaglia di Algeri>(1965) / 감독: 질로 폰테코르보
역동적인 시네마 베리테의 스타일로 알제리의 혁명을 재연한다. 1965년에 만들어진 질로 폰테코르보의 <알제리 전투>는 다큐멘터리와 드라마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알제리의 민족해방투쟁을 세부묘사한 서사극이다. 식민주의의 몰락을 염원하던 사람들은 이 영화에 대해 열광했고, 영화의 선언을 과대해석한 우파 평론가는 "사적 유물론의 메시지가 당신의 뼈 속 깊숙이 스며들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으며, 프랑스 정부는 영화의 배급을 금지시켰다.
"알제리의 전투를 드라마로 재연한 이 영화에는 뉴스릴이나 다큐멘터리 장면이 단 한 피트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이 자막이 없다면,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와 구분해낼 화면상의 근거는 그리 많지 않다. 무대는 1957년 알제리, 민족해방전선(NLF)의 비밀 아지트를 포위한 프랑스 공수부대는 항복할 것을 요구한다. 포위된 게릴라들 속에 앉아 있던 오마르 알리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상념에 잠기고, 시간을 거슬러 NLF가 재건되던 1954년으로 옮겨간다.
거리에서 야바위꾼 노릇을 하다 체포된 알리는 감옥에서 우연히 게릴라의 처형장면을 목격한다. 생명을 건 테스트를 거친 뒤 그는 게릴라 활동가로 변모해서 암살과 파괴의 임무를 수행한다. 1956년 6월을 기점으로 투쟁이 본격화하자, 이듬해 프랑스정부는 공수부대의 힘을 빌려 무력진압에 나서게 된다. 레지스탕스 출신의 지휘관 마튜 대령은 체계적으로 NLF의 하부 세포 조직을 파괴해나가고 오마르 알리 또한 항복을 거부한 채 폭사한다. 알리가 죽은 지 2년 뒤인 1960년, 갑작스럽게 알제리 민중들의 시위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오고 1960년 7월2일 알제리는 독립을 쟁취한다.
60년대 초반 요리스 이벤스의 영향 아래 몇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감독 질로 폰테코르보는 자신의 경험을 드라마 깊숙이 끌어들인다. 시위와 총격전의 가운데를 카메라는 마치 종군기자처럼 흔들거리면서도 집요하게 누벼가며, 인공적인 조명을 배제한 자연상태의 촬영은 마치 뉴스릴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강력한 현실성이 '보이는' 촬영 스타일에서만 출발한 것은 아니다. 알제리 정부의 지원 아래 만들어진 이 영화는 모두 알제리의 실제 장소에서 촬영되었고, 촬영현장에 동원된 알제리 민중은 전투의 기억을 되살리며 울부짖었다. 엑스트라의 표정이 살아 있다는 말이 이 영화만큼 적절한 경우도 흔치 않으며, 엔니오 모리코네의 격정적인 음악에 실려 있는 배우들의 진지함과 농축된 대사는 영화의 차갑고 건조한 기조를 보상해준다.
그 결과 <알제리 전투>는 스타일과 내러티브에 있어서, 이후 70년대를 풍미한 정치 영화의 전형이 되었지만, 질로 폰테코르보 자신은 그 이후로 다시는 <알제리 전투>로 돌아오지 않았다. 1969년 그는 베트남전에서의 미국과 프랑스의 위상을 우화처럼 다룬 <불살라라!>를 통해서 '전통적인' 영화도 모더니스트만큼이나 저항적일 수 있음을 입증하려 했다.
30년이 지난 현재, 감독은 베니스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되어 있고, 그가 출발점으로 삼았던 시네마 베리테는 캠코더의 보급에 힘입어 이제는 세계 곳곳에서 민중들의 손에 의해 날마다 수없이 재탄생하고 있다. 그리고 <알제리 전투>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알제리는 혼란의 와중에 있다. 영화 속에 스쳐지나가는, 체포된 지도자의 대사 한마디가 이토록 뼈아플 줄은 감독 자신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혁명은 일으키기도 어렵고, 지속해가기도 어려우며, 승리로 이끌기는 더욱 힘들다. 그러나 진정 힘든 문제들은 승리 그 이후에야 닥쳐올 것이다."
<필자: 김명준/영화평론가>
50. <무셰트 Mouchette>(1967) / 감독: 로베르 브레송
<무셰트>는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1936년 발표한 소설 <무셰트의 새로운 이야기>를 로베르 브레송이 각색하고 연출했다. 브레송은 '파편화'와 '벗김'의 개념, 몽타주에 의한 영상과 소리를 결합한 독특한 문체를 구상한 영화작가다. 이 영화에서 브레송은 영화의 시각적 기능을 넘어서 해독적 기능을 채용하여 시각적 이미지의 또다른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무셰트는 아주 가난한 마을에 사는 14살 소녀다. 그는 가슴을 앓고 있는 어머니,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6개월 된 남동생을 돌보아야만 한다. 어느날 무셰트는 학교가 파한 후, 숲속을 방황하다가 비를 만나 길을 잃게 된다. 어둠 속에서 비를 피하다가 밤사냥을 마치고 통나무 집으로 돌아가던 밀렵꾼 아르젠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술김에 삼림감시원 마티유를 죽였다"고 고백하고 무셰트는 "알리바이를 해주겠다"고 제의한다. 그날밤 간질발작에서 깨어난 아르젠느에게 무셰트는 강간당한다. 그후 아르젠느로부터 도망쳐 집으로 돌아온 그는 엄마에게 그날밤 겪은 고통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엄마는 숨을 거둔다. 다음날 아침, 식품가게 주인 여자에게 지난밤의 일이 발각되고 아르젠느가 죽였다는 삼림감시원을 그의 집에서 맞닥뜨리게 되자 아르젠느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무셰트는 엄마의 염을 맡은 노파에게서 엄마의 시신에 입힐 모슬린을 받아 걸친 채 마을 어귀의 작은 연못에 자신의 몸을 던져 자살한다.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연출은 동양화의 여백 같은 여운을 주는 침묵의 사용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침묵, 자살을 향한 길 위로 마치 다른 세계에서인 듯 들려오던 사냥꾼들의 총소리와 성당의 먼 종소리가 멎은 후의 침묵, 무셰트가 물에 빠질 때 둔탁한 음향 뒤에 오는 침묵 등이 그것이다.
가벼운 부감촬영은 브레송의 거의 모든 쇼트에 순환적으로 나타난다. <무셰트>에서도 그렇다.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이러한 카메라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 속에 항상 존재하는 억압상태를 느끼게 한다. 그가 수업을 마친 후 교실에서 나와 항상 적대감을 느껴온 급우들에게 진흙덩이를 던지기 위해 낮은 웅덩이 비탈에 숨는 장면에서 특히 그렇다. 그러나 아르젠느가 그에게 죄를 고백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그를 앙각으로 우러러 보게 된다. 그는 이 순간에 연약한 소녀가 아니다. 고백을 듣는다는 사실이 그에게 어떤 힘(모성애)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짧은 앙각촬영에 이어 카메라의 위치가 다시 높아지면 그의 사회문화적 핸디캡(연약한 소녀)도 다시 나타난다.
브레송은 이 영화에서 소음을 음악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면, 무셰트가 식료품 가게에 들르는 장면에서 들어가기 전 트럭에서 내는 소음이 트레블링된다. 안으로 들어갈 때 문에서 들리는 작은 종소리, 커피잔에 설탕을 넣을 때 나는 소리가 클로즈업되고 이어서 다른 손님이 들어올 때 작은 종소리가 들리며 커피 마시는 소리가 클로즈업된다. 길가에서 들려오는 트럭소리가 줌인되면서 무셰트가 떨어뜨린 커피잔 깨지는 소리가 클로즈업된다. 무셰트가 나갈 때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어우러져 훌륭한 음악을 만든다.
브레송은 직업 배우를 거부하고 모델이나 아마추어 배우를 선택한다. 그의 배우는 초상화가의 모델과 같다. 그는 이 모델에 등장인물이 투사되거나 외형화하는 것을 막는다. 그래서 그의 '모델'들의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지만, 무셰트는 두번 웃는다. 하나는 무셰트가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는 여인의 웃음이고 하나는 어머니 같은 웃음이다.
자살하기 전, 무셰트는 연못가에 난 길로 트랙터를 몰고 가는 농부에게 의미 모를 손짓을 한다. 죽기 전까지 그는 새로운 어떤 것의 계시를 기다린다. 그의 자살은 끝이 나지 않는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다. 마지막 부분의 클로드 몽테베르디의 '성모마리아의 찬가'는 그가 구원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믿게 해준다.
<필자: 지명혁/공륜새매체부장>